원각사 설립 당시부터 이희옥 언니(84, 법명 如如心)와 함께 무료급식을 위한 밥을 짓는 등 봉사활동을 해 온 이희필(80, 법명 智慧成) 씨<사진>를 만났다. 팔순의 연세에도 원각사를 찾는 노인들을 위해 아침부터 밥을 짓는 등 22년 간 왕성한 봉사활동 펼쳐 온 원각사의 ‘터줏대감’이다.
이 씨를 만나기 위해 두 번째 방문한 원각사에서 이 씨는 앞서 전임 주지 보리 스님과 현 주지 원경 스님의 원력으로 무료급식소가 이어질 수 있었는데 왜 자신을 찾아왔느냐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다.
“인터뷰 하지 말아요. 뭔 대단한 사람이라고. 남들 앞에 드러내는 거 싫어해요. 여기 이 언니가 열심히 했어요, 이 분한테 물어봐요.”
인터뷰를 재차 요청했을 땐 ‘좋아서 왔다 갔다 한 것밖에 없는데 뭘 물어보느냐’고 말하며 언니 이희옥 씨와 박분수 씨(88, 법명 大願行)를 내세우며 공을 돌렸다.
이들 어르신도 원각사 개원 당시부터 봉사해 온 ‘원각사 지킴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를 인터뷰하려 한 것은 22년 간 신도회가 조직되지 못한 원각사에서 사실상 총무 겸 신도회장 역을 해왔던 숨은 일꾼이기 때문이다.
이희필 씨가 아침에 손수 준비한 반찬이 잘 익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솥뚜껑을 열어보고 있다.
이희필 씨는 원각사 개원 후 이희옥․박분수 씨와 함께 배고픈 노인들을 위해 20여 년 간 날마다 밥과 반찬 만들기, 연등 만들기 등 봉사활동을 해 왔다.
이 날도 이 씨는 원각사 무료급식소를 위해 오전 6시 30분 집을 나섰다. 기자가 그를 찾았을 땐 이미 나물과 양파 등 채소 다듬기는 물론, 양배추․버섯 볶음, 무채, 두부 부침 등 점심 준비를 마친 뒤였다. 그는 식사 준비가 끝나자 무료급식소 한 귀퉁이에 노보살들과 함께 하나의 연등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연등을 만드는 중간에도 솥뚜껑을 열어보며 밥의 뜸이 들었는지를 확인했다. 원각복지회장 원경 스님이 사시 불공을 시작하자 이 씨 등 어르신들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합장한 채 원경 스님의 목탁에 따라 염불했다. 일정에 익숙한 그들의 모습에서 오래된 봉사 활동의 습관을 엿볼 수 있었다.
30세 때부터 서울 우이동 보광사와 서울 조계사를 다니던 이희필 씨는 친목계 모임의 계주로부터 아픈 스님을 돕자는 권유를 받으면서 언니와 함께 원각사로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 이후 원각사는 그에게 평생 봉사해 나갈 도량이 됐다.
“와 보니 보리 스님이 너무 안 된 거예요. 몸이 아파서. 무릎도 아파 수술했데요. 그래서 법당에 오니까 앉지도 못해 엎드려서 목탁을 치시는 거예요. 고생을 하셔서 마음이 아파 스님을 모시고 저 다니는 한의원을 간 거예요. 너무 안 돼 녹용을 넣은 보약을 한 재 지어드렸어요. 언니도 마음을 보탰죠.”
이희필 씨가 다 된 밥을 주걱으로 아래위를 뒤집어 뜨거운 김을 날리고 있다.
그는 당시 인근에 복지관이 없었기에 원각사 무료급식소에 500~700명의 어르신이 몰렸다고 회고했다. 급식을 받기 위해 탑골공원에까지 줄을 선 어르신에게 표를 나눠주던 일도 그의 몫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복지관을 장엄할 연등을 만들자는 것도 이 씨의 제안이었다. 반대하는 신도를 설득하고 봉사자들에게 등 불사를 권유하며 모은 시주금으로 어려운 사찰 재정도 지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당시 돌봐주던 세 살배기 손녀를 매일 데리고 다니며 오후 2~3시까지 원각사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10년 전부턴 손자를 돌보게 되면서 못 나올 뻔했으나 주어진 상황에서 스님과 이곳을 찾는 어르신들을 위해 원력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에 오전 8시 전후부터 오전 11~12시까지 봉사해왔다.
몸이 아프거나 집안 일이 있을 때 빼고는 항상 원각사에서 밥을 준비했다는 할머니의 봉사 시간은 최소 3시간 30분 만을 계산해도 22년 간 총 2만8,105시간이다. 온종일 봉사에 매달렸을 때 1,171일로 3년이 넘는다. 그러나 그 봉사 가치를 수치로 계산할 수 있을까.
그의 신행활동은 복지재단이나 복지관 소속이 아니기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다른 신심과 봉사를 해야겠다는 큰 결심으로 원각사를 찾는 어르신들을 외면하지 않고, 어린 손주를 보살피며 20여 년 해 온 봉사이기에 그 어떤 높은 수치보다도 귀하리라.
이 씨가 이토록 오랜 시간을 원각사를 위해 헌신한 까닭은 ‘그동안 받은 부처님 은혜를 봉사로 갚겠다’고 부처님 전에 고한 ‘약속’ 때문이란다.
“저는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웃음) 애들 5남매를 혼자 다 키워서 대학교까지 보내 시집 장가보냈으니까요. 제가 애들 키우면서 부처님께 잘 키우게 해 달라고만 했는데 애들이 잘 컸어요. 제가 ‘해 달라’고만 했으니 드려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원각사에 회향하게 됐어요. 제가 부처님 법을 좋아하니까 하는 거예요.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결국 다 나 자신을 위하는 길이에요.”
1남 4녀 자녀들에게도 ‘나는 너희들 잘 키워서 부처님 앞에 회향할 테니 절에 가는 것 막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했다. 이에 자제분들은 ‘건강 잘 챙기시라’면서 시간이 될 때마다 틈틈이 원각사에서 배식을 돕고, 집안 경조사 땐 잔치 대신 잔치비용을 모아 원각사에 시주해왔단다.
그는 “봉사는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 기쁨이고, 못 먹는 사람도 함께 먹으니 행복”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봉사에 임하는 불자들에게도 “봉사는 무언가를 바라면 힘들다”면서 “바라는 생각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전했다.
현재 그와 함께 신행활동을 해 온 언니는 봄부터 가을까지 가평으로 내려가 밭에서 일을 하고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원각사 일을 돕는다고 했다. 이 씨는 “여든이 되니 마음과 달리 다리가 아프고 때론 힘도 들지만 저보다 더 힘든 배고픈 누군가를 생각하면 피로를 잊게 된다”면서 “이제는 모든 일이 익숙해 다른 데서 일하는 것보다 힘들지 않다”고 설명했다.
원각사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는 그는 원각복지회장 원경 스님의 원력으로 다시 문을 열어 한없이 기쁘다면서 어르신들을 위해 더 맛있게 차려드려야겠다고 말했다.
이날 반찬을 준비하다 칼에 손을 벤 이희필 씨는 “이 나이에 다른 어르신을 도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 아니냐”며 “앞으로 계획은 없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계속 회향하겠다”고 밝혔다.
전임 보리 스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이희필 씨 등 어르신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이날 이 씨를 비롯한 어르신들은 사시 불공 후 또 한 귀퉁이에 모여앉아 연등을 만들며 보리 스님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10년 전 보리 스님과 함께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온 기억은 어르신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우리 스님 참 잘 생겼는데.” 여든여덟의 박분수 씨가 운을 떼자 봉사 ‘후배’ 격인 송계남(94) 씨도 맞장구를 쳤다. 보리 스님의 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이들은 기자에게 보리 스님 건강하시라고 꼭 전해달라며 “파이팅!”을 외쳤다.
할머니들을 바라보던 원각사 원경 스님은 “원각사가 지금껏 어르신에게 밥을 공양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사람들도 힘든 일을 100수에 가까운 어르신들의 노력과 열의가 있어서 가능했다”면서 이 씨를 비롯한 어르신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