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의 널디 너른 바다 위로 솟아 오르는 장엄한 일출의 광경을 보기 위해 정동진으로 간다. 신년 첫날이 이미 닷새나 지났건만 그래도 동해에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그 뜨거운 기운을 가득 받는다면 삶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더욱 충만할것만 같아 길을 나서는 것이다.

정동진. 옛날 한양의 광화문으로부터 정동쪽에 있는 나루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지어진 지명이지만 실은 요즘의 과학으로 볼때는 위도상 도봉산으로부터 정동쪽이라고 하니 그 오차가 작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당시의 기술로 따지자면 근사치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 대략난감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 당시의 조건으로 본다면 이 정도 오차면 훌륭하다 하겠다.

이곳 정동진은 신라때부터 사해용왕에게 임금이 친히 제사를 올리던 곳이기도 했다하니 해돋이 감상은 그야말로 명당 중에 명당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정동진에 도착하니 칠흑같은 밤바다는 쓸쓸하며 허망하기 짝이 없다. 검은 밤바다는 짝짓기 즈음 울어대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처럼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귓전을 핥고 금방이라도 발목까지 달려와 한입에 싹둑 베어 물고 달아날 것 같은 허연 파도가 시커먼 바다에서 치달려 와 거품만 남겨두고 모래 사이로 사그라 든다.

돌아 봐도 돌아 봐도 누구 하나 없는 정동진의 겨울 밤바다는 그래서 쓸쓸하고 허망하며 을씨년스럽기만 한 것이다.

이른 아침 알람 소리에 깨어 일어나 부스스 눈을 비비며 발코니로 나가 바다를 바라본다. 여명의 바다가 펼쳐지기 시작을 한다. 검은 하늘 검은 바다에 진홍빛이 녹아 들고 있다. 검은 하늘 검은 바다에 진홍빛이 번지고 있다. 해 뜨기 직전, 이렇게 여명이 시작될 즈음이 가장 긴장되고 제일 설렌다.

이미 머리 속에는 붉게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이 가득해져 있기 때문이다.

차디찬 바닷바람이 불어와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그나마 남았던 졸음까지 모두 털려져 나가는 듯하다.

하늘이 점점 푸른빛으로 바뀌어 가고 바다도 서서히 제 빛을 찾아가는 순간. 적잖은 실망감이 덮쳐 온다.

수평선 위로 드리운 두터운 검은 구름. '멋드러진 동해의 아침 일출은 물 건너 가는구나.'

실상 동해 바다에서 온전한 아침 일출을 감상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 만은 아니다. 동해 바다에 사는 현지인들도 일년에 삼분의 일 정도만 제대로 된 일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외지인이야 말로 어련하시겠나.

그렇게 삼십 분쯤 지나자 구름 사이로 빼꼼이 얼굴을 내미는 아침 해. 눈 부시게 밝은 아침 태양이다.

'그래. 이 뜨거운 기운만 받아가자.'

정동진 해돋이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등명낙가사를 찾았다. 정동진 역에서 아름다운 동해 바다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따라 북으로 약 5km 가량을 달려가면 쉽사리 찾을 수 있는 절이다.

등명낙가사의 웅장한 일주문으로 들어섰다. 괘방산등명낙가사(掛榜山燈明洛伽寺)라고 금분으로 쓰여진 일주문 현액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등명낙가사가 자리잡고 있는 산이 일단은 괘방산 일테고 등명낙가사일 것이리라, 절 이름이 조금 긴 절집이다.

등명낙가사. 조계종 종단의 사찰로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다.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괘방산 자락에 자리잡은 절집으로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북쪽으로는 고구려로부터 동쪽으로는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당시에는 수다사(水多寺)라는 이름이었는데 신라 말기 전쟁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고려 초기에 중창하여 등명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 다시 폐사되었던 사찰을 1956년 경덕스님에 의해 중창 되면서 옛 등명사의 이름을 따서 등명낙가사로 이름을 바꾸고 1977년 주법당인 영산전을 새로 세운 이후 범종각과 삼성각, 극락전, 약사전, 요사채 등을 세워 오늘의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

일주문을 지나 비탈길을 조금 오르면 길이 갈라지는데 좌측으로는 영산전으로 들어서는 길이고 우측으로 들어서면 오백나한전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주법당이 있는 영산전으로 쪽으로 들어서니 마당에는 흰 눈이 가득 쌓여 있다.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일까? 마당의 흰 눈을 치워 쌓아놓은 눈 더미에 굴을 파서 눈사람 모양의 부처님을 만들어 놓았다. 석굴암이 아닌 그야말로 설굴암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제법 솜씨가 있다.

불이문을 지나 영산전에서 참배를 드리고 다시 극락보전에서 참배를 드린다. 삼성각을 돌아보고 다시 영산전 앞 마당으로 내려오니 기와담장 너머로 쪽빛 바다가 드러난다.

바다가 보이는 마당을 지나 오백나한전으로 향한다. 돌담 사이로 보이던 대나무 숲이 한 겨울임을 잊게 하는 푸르름이 넘쳐 보기가 좋다.

오백나한전 앞에 이르니 옥개석이 여기저기 떨어져나간 석탑 하나가 마당 한 가운데를 지키고 섰다. 이 석탑이 강원도 유형문화재 37호로 지정되어 있는 오층석탑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선덕여왕 당시 세기의 석탑을 세웠는데 하나는 6.25전쟁때 없어지고 다른 하나는 절 앞 바다에 세운 수중탑이고, 지금 남은 것은 이 오층석탑인데 석탑의 양식은 신라의 양식이 아닌 고려 초기의 석탑 양식을 하고 있어 고려초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또 등명사는 조선 중기에 폐사가 되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불을 질러 폐사되었다는 설과 왕실에서 일부러 폐사시켰다는 설이 전해지는데 등명사가 한양의 정동쪽에 위치해 있어 왕실 보다 먼저 일출의 정기를 받으므로 정동쪽의 등불을 끄면 조선의 불교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주장에 따라 폐사 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렇게 밝은 등이 꺼졌으니 어찌 보면 지금의 등명낙가사는 그 꺼진 등불을 다시 켜기 위한 소망으로 앞에 등명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닐까.

서울로 돌아오는 길. 간밤에 잠시 내리던 눈발이 백두대간의 능성이에 하얀 눈꽃을 피워 놓았다. 그 위로 쏟아지던 하얀 광채들. 그 빛은 마치 서방 정토의 부처님의 빛인 서광(西光) 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그 하얀 빛은 산마루를 따라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