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3
“불교란 무엇인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연결돼 있는 질문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며 그 생각이 곧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자 자크 라캉은 이를 부정한다. 그는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라고 했다. 데카르트는 “나의 생각이 나”라고 했지만 라캉은 “나의 생각은 내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하나의 초점을 가진 원이었지만 라캉에게 인간은 두 개의 초점을 가진 타원이다. 인간은 ‘생각’과 ‘존재’를 왕복하는 존재다.
라캉에게 ‘생각’은 ‘나’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외부로부터 온 생각으로서의 ‘나’는 문명을 대변한다. 문명이란 인간들이 만들어낸 생각의 총화다. 인간은 문명의 세계에서 살며 문명에 봉사한다. 그런데 문명은 대체로 ‘이기적 자아’에 기반한 허구의 세계다. 그 문명 안에, 생각 안에 ‘나’는 없다. ‘나’는 문명에, 라캉의 언어에 따르면 ‘대타자(大他者)’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생각하게 되는 존재다. 나의 생각이란, 문명세계에 존재하는 언어가 내 안에 들어온 것일 뿐이다. 그 생각을 나로 착각하는 한, 나는 자주 비참해지며 허무해진다. 불교 용어로 말하자면 ‘고(苦)’를 겪는다.
사람은 해와 달과 새와 물고기, 네발짐승 등 온갖 자연과 연결돼 있는 존재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인드라망 무늬’(혹은 생명평화무늬). 인드라는 힌두교의 신으로, 그물을 무기로 갖고 있는데, 이 그물의 그물코마다 달려 있는 방울은 적들이 올 때 서로를 비춰주며 소리를 낸다. 이 그물 즉 인드라망은 온 세상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화엄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어, ‘연기법’을 상징한다. 이렇게 힌두교의 신이라 해도 그것이 중도나 연기법 등 석가모니 사상과 일치하는 것은 불교 문화로 적극적으로 수용할 만하다.
종교란, 이렇게 외부로부터 연유한, 이기적이고도 허무한 자아를 정화하는 운동을 말한다. 예수나 석가모니 등 고등 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끌어안고 그 뿌리를 찾아 문제 해결의 길을 찾고자 정성을 다했다. 그러다가 깊은 깨달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석가모니의 경우 그 깨달음은 ‘무아’로 요약된다. 무아란, “삶이 비참하다고 생각할 ‘내’가 없으므로 애초부터 비참할 건덕지가 없다”라는, 헛된 자아를 깨트리는 통쾌한 통찰이다. 이것은 이기적 자아에 대한 부정이어서 다른 말로는 ‘자비’로 표현된다. 예수가 설한 ‘사랑’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깨달은 삶의 진리는 문화를 통해서 전파된다. 그것이 ‘종교화’다. 석가모니 재세시에는 불교가 없었다. 예수 살아생전에는 기독교가 없었다. 종교는 성인의 가르침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대중화되면서 성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종교화,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문화가 깨달음을 오염시킨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 마가나 누가, 마태 등의 공관복음서들이 오히려 예수의 정신을 훼손시켰으며 바울이 만든 종말론적 부활과 재림의 사상이 ‘생명문화운동’으로서의 예수를 변질시켰다.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가장 예수의 원음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는 도마복음에는 종말론적인 성격이 없다. 예수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혁명을 얘기했지 미래에 혹은 죽고 나서 다가올 천국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예수냐 바울이냐’의 저자 문동환과 ‘도마복음 한글역주’의 저자 김용옥의 주장이다.
예수와 동시대인으로 예수를 박해했으나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계시를 받고 이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는 사도 바울. 그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세계 보편 종교로 성장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종말론과 예수의 재림은 바울의 신학일 뿐 예수의 생명운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불교나 기독교나 교주의 핵심 사상은 역사를 거쳐가면서, 혹은 그들 당대로부터 오염되고 있었으니 그들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가늠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의 오염은 우선 힌두교와 그 전신인 브라만교로부터 왔다. 불교는 브라만교로부터의 혁명이었다. 혁명은 원래 수많은 사람이 동참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사상에서의 혁명은 특히, 사상을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들이 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중(言衆)’이 사용하는 언어는 한 세트로 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이를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그러나 불교는 붓다 한 사람이 이룬 혁명이었다. 대중이 브라만교의 언어를 쓰는 상황에서 붓다 혼자서 언어를 바꿀 수는 없었다. 붓다의 사상은 혁명적인 것이었으되, 그 사상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브라만교의 언어들이었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상, 고, 윤회, 차안, 피안, 건너감, 깨달음, 열반, 범아일여 등은 원래 브라만교의 언어였다.
그러면 붓다가 창조적으로 얻은 깨달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아’이며 ‘중도’다. ‘무아’라는 말로써 붓다는 브라만교의 이론을 전복시켰다. 브라만교에서는 우주의 본체인 브라만과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는 브라만의 파편으로서의 아트만을 설했고, 우리 몸의 실체로서의 정신인 이 아트만을 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붓다가 보기에 그런 아트만은 없었다. 그래서 붓다는 “아트만은 없다”라고 선언했다. 또한 이로부터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라는 일반론을 이끌어냈다.
붓다는 또한 ‘중도’라는 말로써 수행의 방법을 바꿨다. 기존의 수행은 극한의 고행을 하거나 극한의 명상을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붓다는 “원을 세우지만 그 원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라는, 평상심의 마음 자세를 강조했다.
붓다의 이런 깨달음은 그러나 불교문화, 브라만문화로 오염됐다. 새로운 사상에 따르는 새로운 문화가 생겨야 했으나 이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붓다는 모자라는 언어 때문에 고군분투했으나 문화의 오염을 막지는 못했다.
오염된 문화 중에 대표적인 것이 윤회론이다. 윤회론은 무아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지만 당시 대중의 세계관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윤회론을 부정하고서는 말을 시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붓다의 전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전생담, 자타카는 그 내용은 불교적일지 모르지만 ‘전생’을 전제하는 그 형식은 반불교적이다.
한국 불교에 수용된 관세음보살, 즉 힌두교의 아발로키테스바라 상. 천수천안으로 모든 중생을 구원한다고 한다.
불교에는 힌두교의 신인 브라만(범천)이 초기부터 들어와 있었다. 석가모니가 법을 설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범천이 법을 설하라고 권했다는 범천권청의 설화는 유명하다. 불교에는 또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으로 힌두교의 신인 아발로키테스바라가 들어와 있다. 관세음보살이 대승경전인 반야심경에도 주체로서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 연원은 뿌리깊다. 붓다 이후 56억7천만년 후에 이 세상을 구할 미륵보살 신앙도, 이미 힌두교의 설화에 나와 있는, 붓다의 후신으로서의 칼키와 맥을 같이한다. 미륵이 오기 전까지 중생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도 힌두교의 윤회 신화 속 인물이다. 힌두교에서는 심지어 붓다 자신도 유지와 수복, 평화의 신인 비슈누 신의 9번째 화신이다.
오늘날에는 불교나 힌두교 전통에도 없고 한국 고유의 전통에도 없던 정체불명의 49재가 불교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절간 한켠에 있는 산신각이나 삼성각, 칠성각은 한국의 전통 신앙이 불교에 스며든 것이다. 우리 순례단원 한경자씨가 마하보디 사원에서 ‘도량을 맑게 해주고 업장과 액난을 소멸시켜주기 위해’ 춘 살풀이춤도 한국의 전통 문화를 불교에 가미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를 전하기 위해서 문화를 이용하는 것은 장려할 일이다. 문제는 그러한 노력의 방향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불교란 ‘무아’의 사상인데, 이 사상을 해치는 문화는 좀 생각해볼 일이다.
무아 사상은, 실체를 부정하므로, 태생적으로 비판을 지지한다. ‘이단(異端)의 역사’가 불교의 역사가 된 것은, 불교가 가르침을 그냥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붓다의 최대 적은 수제자 사리불이다. 사리불은 석가모니에게 “붓다시여, 저는 당신보다 더 훌륭한 깨달음을 얻은 이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고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라고 칭송의 말을 건넨다. 그러자 붓다는 사리불에게 “과거 오래 전에 부처를 이룬 분들이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미래 오랜 시간 뒤의 부처를 이룰 분들이 어떤 깨달음을 얻을 것인지, 지금 붓다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를 너는 알고 있느냐”라고 묻는다. 사리불로부터 세 번 모두 ‘모른다’는 답을 얻은 붓다는 “그런데 너는 왜 그런 사자후를 토한 것이냐”라고 반문한다.
그럼에도 사리불은 “우리 붓다가 제일”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이는 붓다의 가르침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개인에 대한 전적인 신앙은 붓다의 가르침과 배치될 개연성을 갖는다. 붓다는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을 극구 막으려 했지만, 결국 신격화되고 말았다. 신이란 세상과 동떨어져 홀로, 그리고 영원히 존재한다. 이는 모든 것은 상호의존한다는 연기법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존재다. 붓다를 붓다의 가르침과는 다른 ‘신’으로 만든 것은 사리불과 같은 그의 신실한 제자들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후대에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여라”라고 하는 과격한 표어가 등장한 것은 바로 붓다 가르침에 내장된 비판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엘로라 석굴 중 한 힌두교 사원에 조각된 브라만, 비슈누, 쉬바 상. 불교는 석가모니를 신으로 만들어 이런 힌두교의 신들과 경쟁하는 가운데 개성을 잃고 힌두교에 동화되어 인도에서 생명을 다했었다.
신이 된 붓다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받들어졌지만, 그럼으로써 불교는 개성을 잃었고, 인도에서 힌두교로 흡수되어 생명을 다했다. 그 불교가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나 혹은 태국, 라오스 등 동남아로 퍼졌지만 ‘신’으로서의 붓다가 그 핵심으로 존재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비불교적인 불교가 생명을 다할 것임은 인도의 예를 보면 예견 가능한 일이다. 붓다나 관세음보살에게 복을 비는 일이나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복을 비는 일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기독교의 교주 예수도 인간의 삶의 방법을 가르친 것이지 죽은 다음에 다가올 심판을 대비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지금 너의 삶을 용감하게 창조해 나가라”라는 것이지 불상에 기도하고 복을 빌라는 것이 아니었다. 주문에 복을 이루는 힘이 있으니 그걸 암송하라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오늘날 종교인구가 나날이 줄어드는 것은, 교조들이 애초에 한 고민과 깨달음에서 종교가 너무나 멀어졌기 때문이며, 그 가르침이 개인의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절에서 49재를 할 때 “수리수리마수리 수수리사바하”라는 주문을 듣고, 청년들은 부모가 시키는 대로 절은 하지만, 한켠에 핸드폰을 켜 놓고 친구와 문자로 얘기한다. “여기 완전히 외계어 하고 있어 ㅋㅋ”
지금까지 종교는 ‘전승’돼 왔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 신화들을 의심 없이 믿었고 ‘삶의 의미’ 같은 인간의 큰 고민은 그 이야기 안에서 해결됐다. 그러나 막스 베버가 말한 바 합리화, 탈주술화의 흐름은 이런 태도를 용납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왔다. 언어에 의한 합리적 소통이 빛의 속도로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적 사고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전승된 이야기들에 미래 세대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제 종교는 백화점 진열창의 상품처럼 개인의 선택 앞에 놓여 있다. 개인의 삶에 얼마나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종교의 미래는 없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의 가르침이 없이 ‘대입 기도 10만원’, ‘승진 기도 20만원’ 등의 자본주의에 오염된 표어들이 절집에 붙어있는 한 불교는 미래 사회에서 퇴출될 것이다.
“붓다가 3겁을 수행하다가 현세에 깨달음을 얻었다”라는 식의 신비주의적 이야기도 앞으로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붓다는 태생부터 나와 다른 천재니까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현생에서는 안 되니 몸을 바꿔 다음 생에 다시 시도하겠다”라는 심리를 조장해 파계와 막행막식을 유도한다. 이것은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에 묘사된 20세기 한국 불교의 모습이다. 만약 불교가 이처럼 이룰 수 없는 깨달음 자체만을 위한 것이라면 현대 일상인들에게 불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인간은 사람 사이에 있는 존재다. 사람 사이는 언어를 통해 연결되며, 그것이 문명이다. 인간은 문명 안에서 산다. 깨달음이란 문명 생활에 지친 내가 나의 존재로 돌아오는 기술이다. 혹은 문명생활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기술이다. 그 기술 중 하나가 간화선인데, 그것은 손가락 한번 튕기는 혹은 소젖을 한번 짜는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그것은 ‘개껌던지기’ 같은 일이다. 개가 주인의 뜻과 달리 제 마음대로 어디로 가려 할 때, 개껌을 던져서 주의를 되돌리는 것처럼 마음을 다잡는 일이 간화선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사람은 다시 문명으로 돌아가야 한다. 깨달음이란 문명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이며 문명 안에서 살기 위한 마음가짐이다. 라캉은 깨달음에 안주해 문명으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를 정신병으로 규정한다. “있음을 깨달은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라는 당나라 시대 임제종 승려 조주의 질문에 스승 남전이 “저 아랫동네에 내려가 밭가는 소가 되라”라고 한 말은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조계종단이 2016년부터 펼치고 있는 신행혁신운동 ‘붓다로 살자’는 이런 철학적 진리에 기반한 것이다. 사람은 이미 붓다이므로 붓다로 사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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