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동영
<제5장> 5회
눈을 뜬 이여, 거룩한 이여
라즈기르 싯다르타호텔에서 1박을 한 순례일행은 파트나로 이동하기 위해 승합차를 탔다. 라즈기르에서 파트나까지는 90km로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다. 휴게소에서 짜이를 마시거나 시골의 시장을 들러 구경하더라도 3시간 안에 갈 수 있는 도시였다. 파트나는 비하르 주의 주도로서 강가강 남쪽에 있는데, 일행이 그곳에서 숙박하려고 하는 까닭은 거기에도 아쇼까 왕 석주가 있기 때문이었다. 파트나의 옛 이름은 파탈리푸트라, 혹은 쿠수마푸라. 한역경전에는 꽃들이 많다고 해서 화씨성(華氏城)으로 소개된 도시였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 왕이 수도를 라자그리하(왕사성)에서 파탈리푸트라로 천도한 이후 도시는 더욱 번성했다고 굽타가 승합차 안에서 말했다. “마가다국이 멸망하고 마우리아왕조가 인도를 통일한 이후에도 계속 번영했지만 7세기 중반쯤에 순례한 현장은 유적지만 남아 있을 뿐 황폐한 도시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마가다국의 수도 빠딸리뿌뜨라는 원래 ‘빠딸리’라고 불리는 조그만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굽타의 발음은 된소리가 많았다. 예컨대 ‘카필라성’을 ‘까삘라성’으로, ‘카샤파 삼형제’를 ‘깟샤빠 삼형제’라든가, ‘파탈리푸트라’를 ‘빠딸리뿌뜨라’라고 발음했다. 어쩌면 된소리가 현지음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부처의 일생을 소개하는 책 속의 영어발음을 된소리로 하면 현지발음과 비슷하게 되는 것이었다. 부처님이 사리불 고향 나란다마을의 망고동산에 머물면서 바라문교를 믿는 주민들을 교화한 뒤, 다시 이동하여 멈추었던 곳이 파탈리마을이었다. 굽타의 설명이 끝난 뒤 선융도 한 마디 했다.
“어제 영취산에 올라갈 때 저는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 부처님이 부활했다는 겁니까?”
시몬이 선융의 말에 놀랐다. 시몬은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이 이제는 부처까지 만나고 다닌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로렌이 말했다.
“선생님, 부처님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스님들께서도 만났습니다. 로렌이나 시몬도 마찬가지고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선원장스님과 원일스님은 웃기만 했다. 난센스 퀴즈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진공스님은 몹시 흥미를 느끼는 듯 선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공스님이 물었다.
“어떤 사람에게서 부처를 보았다는 건가?”
“우리 일행을 안내해준 인도경찰입니다.”
“인도경찰에게서 부처를 보았다고?”
“네, 인도경찰이 ‘자신은 아침마다 붓다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굽타가 눈치를 챘다.
“스님, 아침마다 눈을 뜨니까 붓다가 된다고 말했을 겁니다. 이곳에서는 붓다를 ‘눈을 뜨는 사람’이라고 하거든요.”
상좌스님이 큰소리로 말했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는 부처님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부처님을 ‘눈을 뜨는 이’ ‘거룩한 이’라고 부릅니다. 2천5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말이 남아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서울에서 M승가대학을 나온 진공스님의 상좌는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기뻐했다. 선융도 2천5백 년 동안 살아남은 ‘눈을 뜬 이’라는 말의 생명력에 감탄했다. 인도경찰은 농담으로 말했지만 선융은 뒤늦게 ‘눈을 뜬 이’가 역사적인 부처임을 알았다.
순례일행을 태운 승합차는 파트나 시내에 진입하자마자 서행했다. 도로변에는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달동네였다. 마을사람들은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는 듯했다. 도로변 집들의 마당에는 물레가 하나씩 놓여 있고, 실제로 사내들은 흙을 빚어 작은 잔을 만들고 있었다. 크기로 보아 짜이 잔들이었다. 인도를 여행하려면 짜이를 사랑하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 했다. 그래야 인도의 풍토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었다. 일행이 숙소를 바로 가지 않고 들르려고 하는 곳은 파트나 시내에 있는 쿰나하르(Kumnahar)였다. 쿰나하르에는 마우리아왕조의 궁전 터도 있고, 아쇼까왕의 이름을 붙인 아쇼카라마(Asokarama)도 있다고 굽타가 말했다. 아쇼카라마를 한역하자면 아육왕사(阿育王寺) 혹은 아육원사(阿育園寺)였다. 물론 사원 터만 남아 있을 터이지만 파괴된 아쇼까 왕 석주가 있다니 답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굽타가 안내서를 꺼내 들고서 거의 읽는 수준으로 설명했다. 불분명한 기억으로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안내서를 읽어주는 것이 신뢰할 만했다. “아육원사에는 6만 명 이상의 수행자들이 머물렀다고 합니다. 이들 중에는 이교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교도들도 노란색 가사만 입으면 아육원사에 들어와 생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교도들은 불교수행자들을 비방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난하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매달 한 번씩 갖는 우뽀사따(Uposatha; 포살법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포살법회란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함께 모여 계율을 외우며 장로의 설법을 듣고 자기를 되돌아보는 참회법회인데, 이교도들은 참석하기를 거부하며 법회를 방해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불교 장로들은 아쇼까 왕 즉위 10년에 더 이상 법회를 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목갈라뿟따띳사 장로가 아육원사의 관리를 제자인 마힌다 장로에게 맡기고는 강가강 상류인 아호강가의 동굴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곧 아쇼까 왕에게 보고됐습니다.” 그러나 아쇼까 왕은 이교도들을 내쫓지 않고 그들과 함께 포살법회를 하도록 명을 내렸다. 왕의 취지는 여러 종교 수행자들이 서로 화합하라는 것이었다. 아쇼까 왕은 신하를 보내 포살법회를 감독케 하고 왕명을 거부하는 불교 장로는 궁으로 데려와 사형을 시켰다. 나중에는 아쇼까 왕의 동생 팃사쿠마라 장로가 잡혀왔다. 신하들이 그를 알아본 뒤 아쇼까 왕에게 ‘띳사꾸마라 장로는 하나밖에 없는 대왕님의 동생이옵니다.’라고 보고하자 사형을 중지시켰다. 아쇼까 왕은 동생 팃사쿠마라 장로에게 그간의 사정을 보고 받고는 참회했다. 부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통치하고자 인도 전역에 8만 4천 개의 사원을 건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을 전하는 장로들을 죽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그런데 아육원사의 정화는 쉽지 않았다. 마힌다 장로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할 수 없이 아호강가 동굴로 은둔한 목갈리붓다팃사 장로를 불러오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팃사 장로는 아쇼까 왕이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자 그제야 왕의 부름에 응했다. 팃사 장로는 먼저 아쇼까 왕에게 7일 동안 설법한 뒤 자신이 제안한 방법으로 아육원사를 정화했다. 첫 번째로 사원 안에 설치된 이교도들의 신상(神像)들을 치웠다. 그러고 나서 모든 수행자들에게 순서에 따라 불법을 물었다. “가장 온전하고 위없는 깨달음에 도달한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쳤는가?” 수행자들의 견해를 들어 본 뒤 이교도들을 가려내어 노란색 가사를 벗기고 흰 옷을 입혀 사원 밖으로 추방했다. 거리에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려 6만 명이나 되었다. 당시 승단이 얼마나 무질서했는지를 증명하는 숫자였다. 목갈리붓다팃사 장로가 승단을 정화하고 난 뒤, 7년 만에 포살법회는 다시 시작되었다. 아쇼까 왕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은 팃사 장로의 공은 승단정화 뿐만 아니라 또 있었다. 경전결집이 바로 그것이었다. 팃사 장로는 삼장에 통달한 1천 명의 장로들을 선발하여 9달 동안 경전결집을 하였던 것이다.
일행은 버스를 길가에 주차한 뒤 쿰나하르로 입장했다. 안내판에는 파트나 주변의 불교 유적지 사진들과 함께 설명문이 영문과 힌디어로 쓰여 있었다. 왼쪽으로 몇 십 걸음 걸어가자 동강 난 아쇼까 왕 석주가 보호각 속에 누워 있었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불족석 정사 옆 가까운 곳에 큰 돌기둥이 있다. 높이는 30여 척이고 각문은 흐려져 있으나 그 내용은 ‘아쇼까왕은 신심이 깊어서 세 번이나 잠부주(인도)를 스님에게 보시한 다음 세 번 모두 진귀한 보물을 주고 사들였다.’고 쓰여 있다.’ 아쇼까 왕 석주 옆에는 마우리아왕조의 궁전 일부로 추측되는 유적지가 보였다. 동서로 8열, 남북으로 10열의 돌기둥이 선 흔적이었다. 아육원사로 추정되는 터는 현재 연못 부근이라고 안내판은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트나 주민들이 사원 터를 잠식하여 지금은 극히 일부만 남아 있었다. 천인결집(千人結集)이라고 부르는 제 3차 경전결집을 할 때 1천 명의 장로가 머물렀던 사원 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협소했다. 일행은 연못가에 앉아서 아쇼까 왕이 왜 전륜성왕으로 추앙받고 있는지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의 업적은 이렇게 모아졌다. 첫 번째는 재위 4년에 목갈라붓다팃사 장로로부터 부처의 가르침이 8만 4천의 법장(法藏)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법문을 듣고는 인도 전역에 8만 4천 개의 사원을 짓기로 결심한 뒤 실제로 그만큼의 전법사원을 건립했다는 점이었다. 아육원사도 그때 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회향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종교 간에 화합을 도모하되 부처의 정법으로 승단을 정화했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포살법회의 전통을 지속하게 하여 계율정신을 되살렸다는 점이었다. 네 번째는 자신의 아들(마힌다)과 딸(상가밋타)을 출가시키어 수행케 한 뒤 전법사 자격으로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불교를 세계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남인도와 서인도, 그리스까지 전법사를 파견한 사실로 보아 아쇼까 왕의 신심에 경외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 번째는 3차 경전결집을 하여 훼손된 부처의 가르침을 체계화하였고 특히 각 부파의 논장을 결집하였다는 점이었다. 여섯 번째는 세계 3대 대왕으로 평가되는 칭기스칸이나 알렉산더와 비교했을 때 정복왕의 면모는 같으나 그들과 달리 통치철학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무력을 버리고 불법에 의지하여 모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람과 동물의 행복을 더불어 추구하는 생태복지를 실현한 최초의 제왕이라는 점이었다. 기원전 3세기경의 제왕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정치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었다. 쿰나하르는 파트나 시민들에게 공원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벤치에 앉아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일행은 마지막으로 박물관에 들러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을 살폈다. 그러나 전시된 유물들은 초라했다. 중요 유적들은 모두 주립 파트나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숙소에 도착한 선융은 로렌과 함께 진공스님이 쉬고 있는 방으로 갔다. 자신의 결심을 로렌 앞에서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진공스님은 선융의 마음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여기 남기로 결심했군 그래.”
“네, 스님. 그렇습니다. 내일이면 순례도 끝입니다. 내일로 미루기보다 지금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잘했어. 보살이 어떨지 모르겠구먼.”
“사르나트에서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뿐인가?”
“네. 그런데 스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언가?”
“로렌과 시몬이 저의 이곳 생활경비를 모두 책임져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진원스님이 스님께 준 이 봉투는 필요 없습니다. 돌려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돌려받겠나. 그러나 이 봉투는 보살에게 주겠네. 선융당이 전해달라고 해서 가져왔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네.”
“고맙습니다.”
“시몬은 왜 함께 오지 않았는가?”
“굽타와 함께 시내에 나갔습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나 봅니다.”
방 거울 옆에는 1회용 홍차와 전기포트, 그리고 생수병이 놓여 있었다. 로렌이 물을 끓여 커피 잔에 홍차를 담아왔다. 선융은 차를 마신 뒤 피곤해 하는 진공스님 방을 곧 나왔다. 일행은 지쳐가고 있었다. 물이 맞지 않아 배탈이 난 사람도 한둘 생겼다. 여정이 강행군은 아니었지만 인도 거리의 소음과 먼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사람을 지치게 했다.
방으로 돌아온 선융은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책을 폈다. 나란다마을에서 파탈리마을로 온 부처의 흔적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굽타에게서 빌려 온 부처의 일생을 서술한 책에는 파탈리마을에 도착한 부처가 다음과 같은 설법을 했다고 나왔다. ‘계율을 지키지 않는 행실이 나쁜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손실이 있다. 첫째는 재산이 크게 줄어든다. 둘째는 평판이 나빠진다. 셋째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면 겁이 나 두려움이 생긴다. 넷째는 죽을 때 괴로워한다. 다섯째는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이와 반대로 계율을 잘 지켜 행실이 바른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첫째는 재산이 크게 늘어난다. 둘째는 평판이 좋아진다. 셋째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더라도 자신 있게 처신한다. 넷째는 죽을 때 허둥대지 않는다. 다섯째 죽은 다음에 천상에 태어난다.’ 선융은 부처가 파탈리마을 사람들에게 왜 계율과 바른 행실을 강조하셨는지 궁금해졌다. 계율을 지키지 않아서 행실이 나쁜 사람은 죽을 때 괴로워하고 죽은 다음에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와 같은 설법이 결코 재가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출가수행자들은 재가신자보다 더욱 엄격한 계율을 지켜야 할 것이었다.
다음날.
일행은 주립 파트나박물관과 강가강을 들르지 않고 바로 바이샬리로 향했다. 파트나박물관은 월요일이므로 문을 열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했고, 파트나 도심지 북쪽으로 흐르는 강가강은 강폭이 바다와 같이 넓으므로 유람선을 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지만 일행은 바이샬리로 곧장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파트나의 강가강 강폭이 바다와 같은 까닭은 네 개의 강이 만나므로 그랬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칸타키강과 골고라강, 그리고 야무나강과 데칸고원에서 시작한 손강이 합류하여 흐르기 때문이었다. 부처는 네 개의 강이 만나는 파트나의 강가강을 가만히 응시하고는 사람도 신분차별이 없음을 설법했다. “세상에는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와 같은 신분차별이 있지만 여래의 법 안에는 차별이 없다. 네 개의 강이 마침내 하나가 되어 흐르듯 여래의 법 안에서는 모두 다 하나가 된다.” 파트나에서 바이샬리까지는 70km쯤 된다고 하니 승합차로 2시간이면 넉넉할 것 같았다. 유마거사의 고향인 바이샬리는 한역경전에서는 비야리(毗耶離) 혹은 비사리(毘舍離)로 나왔다. 어쨌든 바이샬리는 부처와 아주 인연이 깊은 땅이었다. 파후푸트라카(Pahuputraka, 多子塔)에서 마하가섭을 제자로 맞아들이기도 했고, 카필라성을 나와 첫 스승을 만난 곳이기도 하거니와 정각을 이룬 뒤 그곳으로 가 이적으로 가뭄과 질병을 퇴치했고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으며, 열반 3개월 전에 또 다시 마지막으로 들렀던 도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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