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3회
다섯 수행자를 찾아 떠난 부처
선융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로렌과 시몬이 ‘굿모닝!’ 하고 인사했다. 상좌들이 시봉하는 자세처럼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서서 기다리다가 다가왔다. 선융은 그들의 행동이 약간은 부담스러웠지만 물리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두 사람의 행동이 너무 진지했다. 로렌이 활기차게 말했다.
“마하보디사원 입구까지 릭샤를 탄답니다.”
“걷기에는 조금 멀어서 그럴 겁니다.”
릭샤를 타는 까닭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순례일행은 마하보디사원의 대탑 뒤에서 참선하고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기로 어제저녁에 공지했던 것이다. 이른 새벽인데도 마하보디사원으로 가는 길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대탑이 끌어당기는 중력이랄까,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이 대탑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순례자들의 옷차림은 다양했다. 승려들의 승복도 붉은색, 황색, 검은색, 흰색, 회색 등등 여러 가지였다.
선융은 릭샤가 언덕을 힘겹게 오를 때 내리려고 했다. 마른 과일처럼 쭈글쭈글한 릭샤꾼이 측은해 보였다. 수행자 싯다르타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릭샤꾼은 뒤를 돌아보면서 눈을 찡긋 하며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손님, 걱정하지 말아요.’라는 눈짓이었다. 그러나 릭샤꾼은 결국 언덕길을 다 올라가서 멈추고 말았다. 생각이 많아진 선융의 몸무게가 무거웠을 터였다. 선융은 줄곧 주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탑은 위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4각 4면의 형태였다. 보리수는 대탑 뒤쪽에 있으므로 아직 보이지는 않았다. 릭샤꾼은 보리수를 핍팔라(Pippala)나무라고 가르쳐 주었다. 선융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싯다르타가 핍팔라나무 아래서 보리(菩提, 진리)를 이룬 나무라 해서 보리수(菩提樹)라고 불렀다. 굽타가 인파에 밀리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사원 안에서는 신발을 신지 못합니다. 그러니 저기 건물에 신발을 맡겨 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저 마하보디사원은 부처님의 정각을 기념하기 위해 아쇼까 왕이 건립했다고 합니다. 대탑은 제 이름과 같은 굽타시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크게 바뀌었다고 전해집니다.”
마하보디사원이 불교의 성지가 된 것은 대탑 뒤의 보리수 때문이었다. 신발을 벗은 채 일행은 꽃목걸이가 걸어진 대탑 정문에서 흰 대리석계단을 밟고 내려섰다. 로렌이 말했다.
“선융 선생님, 결심했습니까?”
“아내에게 아직 편지를 띄우지 못했습니다.”
시몬도 선융을 선생님이라고 호칭했다.
“선융 선생님, 저게 뭣입니까?”
“아, 불족상(佛足像)이라고 합니다. 평생 맨발로 길을 걸으셨던 부처님의 두 발자국이지요.”
불족상에는 순례자들이 헌화한 붉고 노란 꽃잎이 흩뿌려져 있었다. 로렌이 휴대용카메라를 꺼내 불족상을 촬영했다. 굽타가 또 일행을 한 데 모으더니 말했다.
“저 안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35세 때 정각을 이룬 부처님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젊은 청년 부처님입니다. 부처님께 참배를 먼저 하고 핍팔라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 참선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굽타의 말대로 마하보디사원 안의 석가모니 부처상은 풋풋했다. 불단 양쪽 백련 등(燈)의 은은한 불빛이 석가모니 불상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쪽빛은 하늘을 상징하고 불상 좌우에는 하늘을 나는 두 천인의 금빛 비천상이 박혀 있었다. 청년 부처임을 강조하기 위해 머리는 꿈꾸는 듯한 빛깔의 보라색이었고, 분홍빛의 입술은 건강하고 젊게 보였다. 진공스님 일행은 삼배를 한 뒤 밀려오는 순례자들 때문에 더 머물지 못하고 법당을 빠져나왔다. 선융은 잠깐 한숨을 돌리며 순례자들을 바라보았다. 유독 맨발의 걸음걸이에 눈길이 갔다.
진실한 마음이 맨발의 걸음걸이에 있구나
맨발로 오시고 맨발로 가신 이 누구시던가
순례자 걸음걸이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아
다만, 간절하고 깨어 있는 시간만 있을 뿐
한 걸음 한 걸음 사람의 향기 솟구치는구나.
선융은 보리수 옆 공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눈앞에는 진공스님과 선원장스님, 원일스님, 상좌스님이 편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득 수행자 싯다르타의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여기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침내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
결국 수행자 싯다르타는 자신을 유혹했던 마왕 마라를 굴복시킴으로 해서 선정에 들 수 있었다. 첫 번째 선정과 두 번째 선정, 세 번째 선정, 네 번째 선정에 차례로 들었다. 초저녁에는 전생을 아는 지혜, 즉 숙명통(宿命通)을 얻어 윤회하였던 수많은 생을 돌이켜 기억할 수 있었다.
한밤중에는 무량한 중생들이 업에 따라 오고 가는 것이 보이는 천안통(天眼通)을 얻었다. 번뇌가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구름에 가려졌던 해처럼 지혜가 나타났다. 진리를 보지 못하게 했던 무명에서 벗어났다. 고통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니 모든 고통에는 무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행자 싯다르타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도리를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새벽이 되어서는 인간의 미세한 번뇌까지 말끔히 씻어버리는 누진통(漏盡通)을 얻었다. 먼동이 트기 전, 샛별이 반짝이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수행자 싯다르타가 부처가 됐다. 해탈의 순간이었다.
‘나의 해탈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생애이고, 더 이상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사윤회를 하지 않게 된 수행자 싯다르타는 부처가 되어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경지를 확인하고 선언했다.
다시 태어나야 할 일은 끝났다
높은 수행을 하여 마쳤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다
해탈을 얻기 위해
다시 더 수행해야 할 일은 없다
이러한 것을 스스로의 지혜로 알았다.
그날 아침에도 수자타는 보리수 주변을 청소하기 위해 시녀 웃타라를 보냈다. 그러나 웃타라는 어제와 달라진 싯다르타의 모습에 놀라 집으로 돌아와 수자타에게 알렸다. 잠시 후 웃타라를 앞세우고 보리수가 있는 곳까지 잰걸음으로 걸어온 수자타는 깨달음을 이룬 부처에게 유미죽을 올리며 기뻐했다.
“웃타라야, 나의 공양을 받은 분이 세상에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셨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냐!”
부처가 된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보리수 아래서 7일 동안 선정에 들어 연기를 관하면서 해탈의 기쁨을 누리었다. 7일마다 장소를 옮겨가며 칠칠일, 즉 49일을 보냈다. 둘째 주에는 한 바라문이 나타나 석가모니 부처에게 말을 걸어왔으나 그는 제자가 될 기회를 놓쳐버렸다. 마지막 주에는 트라프사와 바루리카라는 두 상인이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지나가다가 석가모니 부처를 만났다. 앞서가던 소 두 마리가 꿈쩍 않자, 거대한 소달구지 행렬이 멈추었으므로 쩔쩔매고 있던 두 상인이었다. 숲속에서 한 수행자가 나타나 말했다.
“상인들이여, 걱정하지 마시오. 부처님이 출현하시었소. 부처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이오. 그런데 부처님은 지금 아무 것도 먹지 않으셨으니 그대들이 음식을 공양했으면 좋겠소.”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상인은 신선한 우유로 밥을 지어 향나무 그릇에 담아 석가모니 부처에게 공양을 올렸다. 부처가 공양을 마치자, 그 공덕으로 꼼짝 않던 두 마리의 소가 움직였다. 두 상인은 부처의 발밑에 머리를 대고 공손히 말했다.
“우리는 부처님께 귀의하겠습니다. 우파사카(優婆塞,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이로써 두 상인은 출가하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에게 귀의한 최초의 재가신자가 되었다.
선융은 자신과 보리수가 한 몸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늘로 치솟은 보리수의 키만큼이나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경외감이 솟구쳤고, 수만 장의 보리수 이파리들처럼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믿음이 무성해졌다. 순례일행의 표정도 참선을 시작할 때와 달랐다. 눈에서 빛이 났다. 마하보디사원의 법당처럼 보리수 옆자리도 마냥 차지할 수 없었다. 순례자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진공스님이 먼저 일어났다. 뒤따라 일행 모두가 보리수 옆자리를 벗어났다. 일행은 합장한 채 시계방향으로 대탑을 돌기 시작했다. 대탑 주위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행하는 티베트 승려와 신자들이 보였다. 티베트 승려들은 잔디밭에 둥그렇게 앉아 중저음으로 경전을 외고 있었고, 티베트 불교신자들은 널빤지를 준비해 와서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특히 잔디밭 정원에 앉은 붉은 승복을 입은 티베트 승려들의 모습은 거룩하기까지 했다. 정원에 만발한 붉은 꽃인 듯 장관이었다.
순례일행은 다시 릭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사르나트로 떠날 준비를 했다. 사르나트는 보드가야에서 바라나시 방향으로 250km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사르나트에는 우루벨라에서 자신의 수행을 도왔던, 라자그리하에서 온 다섯 명의 수행자가 머물고 있는 땅이었다.
선융은 아침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승합차에 올라탔다. 자신의 지정석이 되다시피 한 맨 뒷자리에 앉아 차창 밖에 눈을 주었다. 거대한 빌딩처럼 치솟은 대탑이 점점 멀어졌다. 보리수는 처음부터 대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선융의 눈앞에는 보리수 이파리들이 어른거렸다. 바람을 만난 물결처럼 경쾌하게 찰랑거렸다. 오랜 만에 여행사 직원이 한 마디 했다.
“사르나트까지는 5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요즘 도로 사정이 좋아져 그럽니다. 예전 비포장일 때는 하루가 걸렸습니다. 장시간 이동하니까 한숨 주무시는 것이 덜 지루할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가다가 휴게소에서 볼일도 보고 짜이 한 잔 하겠습니다.”
그런데 안심하고 잠을 잘 분위기는 아니었다. 짐을 실은 트럭들이 무지막지하게 과속으로 달려오곤 했다. 그때마다 순례일행을 태운 승합차가 도로변으로 가까스로 피하면서 휘청했다. 그 바람에 선융은 한두 시간이 지나 마하보디사원과 보리수의 잔영을 자신도 모르게 떨쳐버렸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교행(交行)을 하는 차들이 정면으로 부딪칠 것 같은 순간마다 움찔하면서 보드가야의 잔상들이 쓱쓱 지워졌다.
선융은 잠시 눈을 감고 주혜를 생각했다. 주혜에게 띄울 편지 내용을 머릿속으로 썼다가 지우곤 했다. 주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자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당장 취업하기가 힘들 뿐더러 특별한 일 없이 하루하루 무위도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팔에 남는다면 로렌과 시몬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니 배우고 싶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그들에게 한국불교의 참선을 지도해 줄 수 있으므로 일거양득이었다. 진공스님의 말대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약할 수 없었다. 굽타에게 알아보니 비자도 간단하게 받을 수 있었다. 굽타가 룸비니불교대학의 입학허가증을 발급해주면 여행사 직원이 한국으로 돌아가 네팔대사관에 가서 학생비자만 받아오면 네팔과 인도에 체류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선융은 사르나트를 30여 분 정도 남겨놓고 주혜에게 편지로 할 이야기를 겨우 정리했다. 보드가야에서부터 간헐적으로 떠오른 단상들을 이리저리 꿰맞춘 것이었다.
<사랑하는 주혜 씨. 나는 물론이고 진공스님을 비롯하여 일행 모두 부처님 성지를 감격하고 감탄하면서 순례하고 있다오. 우리는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네팔의 룸비니 동산을 출발하여 태자가 성장하면서 인생의 생로병사를 놓고 번민한 틸라우라코트의 카필라성을 순례한 뒤, 수행자 싯다르타가 고행한 우루벨라를 지나 마침내 수행자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 보리수 아래서 참선했다오. 보리수 옆자리에서 참선하는 순간 나는 부처님에 대한 경외감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보리수 이파리들처럼 무성해지는 것을 느꼈다오.
수행자 싯다르타가 정각을 이룬 장소에 와 있다는 감격 때문만은 아니라오. 싯다르타 태자가 6년 동안 극한의 고행을 마치고 처음으로 한 일이 무엇인 줄 아시오? 네란자라강 강물에 몸을 씻은 뒤 공동묘지로 찾아가 시체를 싼 천 조각들을 주운 일이라오. 싯다르타는 산속의 굴로 들어가 천 조각들을 기워 옷을 만들어 입었다오. 탁발하려면 수행자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오. 그런 모습이야말로 수행자의 위의(威儀)가 아니겠소? 그 누더기 옷을 입고 처음으로 탁발하고자 찾아간 곳이 수자타 집이었다오. 나는 수자타가 수행자 싯다르타에게 올린 죽도 너무 정성스러워 감격했지만 그보다는 공동묘지를 찾아가 시체를 쌌던 천 조각들을 주워 옷을 기워 입는 수행자 싯다르타 모습을 생각하면서 몰래 눈물을 흘렸다오. 그 모습이야말로 어느 종교이건 간에 수행자로서의 정신과 태도가 다 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이런 자각이 순례의 진정한 기쁨이 아니겠소.
유럽에서 룸비니불교대학으로 유학 온 로렌, 시몬과 함께 성지를 순례하는 것도 큰 기쁨이라오. 두 유학생은 나를 선생으로 생각하며 의지하고 있다오. 두 유학생은 내가 이곳에 남아 한국불교의 참선을 지도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오. 내가 네팔에 머무는 동안 모든 경비 일체를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진심이 느껴진다오. 나 역시 룸비니불교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다오. 부처님의 육성이 생생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라오. 진공스님은 나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의하셨지만 그보다는 당신의 허락이 있어야 내가 자유로워지지 않겠소? 어찌했으면 좋을지 당신의 결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소.
나는 지금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 우루벨라에서 고행할 때 옆에서 도왔던 다섯 명의 수행자를 위해 걸어서 떠나셨던, 사르나트 녹야원으로 가고 있소. 사르나트 이정표가 방금 스친 것으로 보아 곧 도착할 것 같소. 앞으로도 순례의 소식을 더 정리하여 편지에 쓸 것을 약속하겠소. 당신의 현명한 결정을 기대하는 선융이.>
챠우칸디 스투파.
우루벨라에서 온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 머물다가 석가모니 부처를 맞이한 곳이라고 해서 영불탑(迎佛塔)이라고도 불렀다. 순례일행은 거대한 흙더미 같은 챠우칸디 스투파 위에 올랐다. 진공스님이 “서래사에서 온 우리도 선융당까지 다섯 명이군.”라고 말하면서 “전생의 우리들이 부처님을 이곳에서 맞이했는지도 모르지.” 하고 웃었다. 그러자 선원장스님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에 설렙니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스투파 꼭대기에 이르자 전망대처럼 사르나트와 바라나시 시가지가 한눈에 들었다. 지근거리에 있는 사르나트박물관과 다메크 스투파가 보였다. 거기가 바로 사슴동산이 있는 녹야원이었다.
그때, 다섯 명의 수행자는 석가모니 부처가 자신들을 향해서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순간까지도 우루벨라에서 받은 싯다르타에 대한 실망감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저 수행자는 싯다르타가 아닌가. 6년 동안 고행을 했으면서도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싯다르타 사문이 아닌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음식도 먹는 타락한 수행자가 아닌가. 우리가 또 다시 우루벨라에서 한 것처럼 싯다르타를 시중들 필요가 있을까. 이제 스승의 예를 갖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때 시중을 들었으니 손발 씻는 물과 음식이나 내다주고 그가 무엇을 하던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
그런데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다섯 명의 수행자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절하고 시중들었다. 한 수행자는 부처의 누더기 가사를 받아들었고, 또 한 수행자는 부처가 앉을 자리를 쓸었으며, 또 한 수행자는 부처가 발 씻을 물을 떠 오고, 또 한 수행자는 부처의 발을 씻어주었고, 또 한 수행자는 부처가 먹을 음식을 내왔다. 다섯 명 중에서 한 수행자가 부처에게 조금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여, 가장 윗자리에 앉으시오.”
그러자 부처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그대들은 나 여래를 친구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나는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었다. 내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대들도 아라한이 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다섯 수행자에게 단호하지만 자애로운 말투로 자신은 친구가 아니라 여래(如來)라고 말했다.
순례일행은 챠우칸디 스투파를 내려와 걸어서 실제로 사슴들이 사는 녹야원으로 들어갔다. 녹야원에는 ‘진리를 보다(法眼)’라는 뜻이 서린 다메크 스투파가 우뚝 솟아 있었다. 다메크 스투파는 끝이 뭉툭한 티베트인의 모자 같은 모습이었다. 굽타가 다메크 스투파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장소라 해서 아쇼까 왕이 탑을 조성하였는데 굽타 왕조 때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크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높이가 40여 미터 되니까 한국 아파트로 치자면 20층 높이는 될 것입니다. 다메크 스투파 옆에는 사슴동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녹야원이라고 하지요.”
다메크 스투파도 마하보디사원의 대탑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자력 같은 것이 있었다. 티베트에서 온 붉은색의 옷, 태국에서 온 흰색의 옷, 대만에서 온 검은색의 옷들 차림의 불교신자들이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스투파 옆쪽 잔디밭에서는 유럽에서 온 듯한 여인이 울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과 함께 있는 친구인 듯한 두 명은 웃고 있었다. 여인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감격해서 울고 있음이 분명했다. 진공스님이 이끄는 순례일행도 <반야심경>을 외면서 다메크 스투파를 돌았다. 탑돌이가 끝나자 굽타가 또 자유시간을 주었다.
선융은 좀전 사르나트 박물관 앞에서 샀던 편지지를 배낭에서 꺼냈다. 울고 있는 여성 뒤쪽 벤치로 가서 주혜에게 편지를 썼다. 로렌과 시몬이 좌우에 앉아 선융이 쓰고 있는 편지를 물끄러미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선융은 로렌에게 룸비니불교대학의 주소를 묻고는 봉투에 주소까지 썼다. 그러자 시몬이 편지를 부쳐주겠다면서 선융에게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선융은 로렌과 시몬의 선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어느 새 세 사람은 한 몸인 듯 움직이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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