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쇼까 왕의 선물
점심은 노상 가게에서 간단하게 하기로 했다. 조금 전에 가트에서 시신을 태운 모습을 본 진공스님의 상좌스님과 원일스님이 메스꺼워서 구역질이 날 것 같다고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선융도 식당으로 들어가 점심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한줌 재로 사라지는 인생의 종말을 보고 나니 한 끼의 허기와 포만감이 허망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두운 가게 안은 둥근 탁자가 몇 개 놓여 있고 낙서들을 휘갈긴 벽이 지저분했다. 순례일행은 한두 명씩 탁자를 차지했다. 굽타와 여행사 직원이 비닐 컵에 짜이를 담아 날랐다. 홍차와 우유, 설탕을 섞은 따뜻한 음료수를 짜이라고 불렀다. 가게 주인이 즉석에서 구워낸 밀가루 빵인 짜빠티는 진공스님부터 배분했다. 선융은 짜빠티를 가져온 굽타에게 물었다.
“카트만두에 석가(샤카)족도 삽니까?”
“점심 후에 가볼 아쇼까 스투파들은 샤카족이 살 수 있도록 아쇼까 왕이 허락한 땅의 경계 표시이기도 합니다.”
“석가족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데 그럴 수 있습니까?”
“가이드를 하는 샤카족 사내가 있는데 찾아보겠습니다. 그 친구는 독일어를 잘해서 주로 독일 사람들에게 가이드를 하고 있습니다.”
굽타가 가게 밖으로 나가더니 네팔어로 휴대전화를 했다. 샤카족 가이드와 의사소통이 잘 됐는지 굽타가 웃으며 들어와 말했다.
“마침 파탄(Patan) 광장에서 독일인 부부 가이드를 끝냈다고 합니다. 아쇼까 스투파 중에 동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니 만날 수 있습니다.”
짜빠티로 요기를 한 순례 일행은 승합차에 올라 아쇼까 스투파 중에 하나인 동탑으로 이동했다. 굽타는 카트만두 계곡에 세 개의 왕국이 있었는데, 샤카족은 주로 파탄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왔다고 설명했다.
“현재 카트만두의 중심부인 파탄의 인구는 20만입니다. 그 중에서 부처님의 후예인 샤카족은 5만여 명이나 됩니다. 샤카족은 금은세공 기술이 뛰어나 파탄에서 예부터 불상이나 불교용품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샤카족이 만든 불상이 한국 조계사 부근 상점에도 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석가족이 카트만두에 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샤카족 가이드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굽타가 머리를 긁적이며 차창 밖으로 무언가를 찾았다. 승합차는 물이 말라가는 파탄의 테타(Teta) 천을 지나가고 있었다. 전선줄이 복잡하게 노출된 건물들 사이로 흰 탑이 하나 보였다. 굽타가 샤카족 가이드를 발견한 듯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 왔습니다.”
“저게 아쇼까 동탑인가요?”
“네, 샤카족 가이드도 와 있습니다.”
건물들 사이에 갇혀 있는 듯한 아쇼카 동탑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동탑 앞에는 굽타의 키와 엇비슷한 사내가 서 있었다. 일행이 승합차에서 내리자마자 굽타가 샤카족인 가이드를 순례일행에게 소개했다. 그러자 그는 일행을 위해서 독일어 대신 영어로 말했다.
“저는 파탄에 살고 있는 슈라즈 샤카(Suraj Shakya)입니다. 주로 독일인을 상대로 가이드를 하고 있습니다. 나이는 41세입니다.”
통역은 여행사 직원이 하려다가 손사래를 쳤다. 공항에서 입국 수속 때 보여주었던 자신감을 접고 슬그머니 선융에게 부탁했다. 할 수 없이 선융은 통역을 맡았다. 선융이 슈라즈 옆에 서자,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슈라즈의 영문자 명함이 눈길을 끌었다. 선원장스님도 그에게 명함을 달라고 했다.
“나도 한 장 줘요. 석가족이라고 하니까.”
명함은 작은 카드 같았다. 그의 얼굴을 만화처럼 그려 인쇄했는데 감각적인 터치가 수준급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 밑에는 독일인 가이드, 예술가, 번역가라고 인쇄돼 있었다. 아마도 청년시절에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샤카족인 듯했다. 일행이 스투파 주위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는 동안 선융은 슈라즈에게 물었다.
“석가족이 왜 인도 카필라성에서 카트만두까지 올라와 살게 된 것입니까?”
“기원 전 5세기쯤 카필라성이 멸망하면서 샤카족은 세 군데로 피난을 갔습니다. 하나는 인도 상카시아 지역이고, 또 다른 곳은 인도중부 웃제니 지역 산치 부근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일부는 히말라야산맥 쪽으로 피난을 왔는데 지금은 파탄에 모여 샤카족의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샤카족이 모여 살던 카필라성이 멸망한 이유는 코살라국 왕의 복수극 때문이었습니다.”
슈라즈의 거침없는 말투에는 샤카족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 당대의 역사를 환히 알고 있었다. 선융은 슈라즈가 말하는 카필라성의 역사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카필라성의 비극은 강대국인 코살라국이 옆에 있었다는 것에서 기인했다. 코살라국 파세나디(Pasenadi) 왕은 석가모니 부처를 흠모한 나머지 샤카족 출신의 왕비를 맞아들이고 싶어 했다. 결국 파세나디 왕은 카필라성으로 사신을 보내 자신의 의향을 전했던 바, 카필라성 왕은 강대국 왕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카필라성 왕은 순수한 왕족 혈통의 여성 대신 여종의 딸 바사바카티야를 보냈다. 파세나디 왕은 크게 기뻐하며 바사바카티야를 정비로 맞아들였다. 정비는 얼마 후 비두다바 태자를 낳았고, 태자는 성장하여 생모의 고향이자 자신의 외가인 카필라성을 방문하였다. 그때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출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비두다바는 코살라국으로 돌아와서 부왕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고, 파세나디 왕은 분노하여 정비와 태자의 지위를 박탈했다. 그러나 태자는 부왕을 살해한 뒤, 복수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카필라성을 공격했다. 그는 샤카족을 연못에 몰아놓고 수장시키는 등 잔인하게 학살하며 복수극을 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성을 탈출하여 피난을 떠났는데 그중 일부 후손들이 현재도 네팔 지역에 살게 됐던 것이다.
“여기 탑은 기원전 3세기 때 아쇼까 왕이 파탄을 방문한 기념으로 세운 동서남북과 중앙에 다섯 기의 스투파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동서남북 네 기만 있습니다.”
“아쇼까 왕이 왜 탑을 세웠을까?”
오랜 만에 진공스님이 물었다. 그러자 슈라즈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캬족이 파탄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땅을 하사한 것입니다. 그 증표가 아쇼까 스투파입니다.”
“부처님을 존경했던 아쇼까 왕이 석가족에게 땅을 선물한 셈이군.”
“그렇습니다.”
아쇼까 동탑을 현지인들은 타이타 투라(Taita Thura) 혹은 테타 투라(Teta Thura)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동탑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보드나트 스투파 형식이었지만 규모가 아주 작았다. 스투파 하단에 명문이 적힌 검은 표지석이 있었는데 아쇼까 왕 시대에 사용했던 팔리어가 희미하게 보였다. 아마도 학자들이 석가모니 부처 당대부터 민중들이 썼던 팔리어의 흔적을 보고 아쇼까 스투파라고 단정했을 터였다.
굽타가 다시 남탑으로 이동하는 승합차 안에서 아쇼까 왕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쇼까 왕은 알렉산더, 칭기스칸과 더불어 세계 3대 대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쇼까 왕이 칭기스칸과 알렉산더보다 더 위대한 점은 단순한 정복왕이 아니라 통치 철학이 있는 제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전법사를 받아주는 나라와는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아쇼까 왕은 인도 전역에 떠도는 걸인을 구제했으며 동물병원을 세우고 약초밭을 일구게 하는 등 복지의 리더십을 가졌던 것입니다. 동물도 사람과 똑같이 존엄한 생명을 가졌다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했던 겁니다.”
동탑에서 남탑까지는 승합차로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현지인들은 남탑을 라간 투라(Lagan Thura)라고 부르고 있었다. 남탑 역시 동탑처럼 주택가에 있었는데 관리인이 일행에게 다가와 샤카족의 시주기록이 쓰인 안내판을 가리켰다. 안내판에는 샤카족이 5천 루피를 시주하여 스투파를 정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일행은 다시 서탑인 푸초투라(Pucho Thura)로 갔다. 서탑 역시 승합차로 15분쯤의 거리에 있었다.
이번에는 선융이 일어나 굽타를 대신해서 한 마디 했다.
“아쇼까 왕은 기원전 3세기에 활약한 인물입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때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으로 4세기 후반입니다. 시대가 다른 데도 불구하고 아쇼까 왕은 우리 한국역사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삼국시대 우리나라 왕들이 아쇼까 왕을 제왕의 모델로 연모했기 때문입니다. 신라 진흥왕은 아쇼까 왕이 배 한 척에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푼을 실어 보내주어 황룡사 장육존상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인도 불교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꾸민 이야기일 것입니다. 아쇼까 왕을 닮고 싶은 진흥왕을 위해서 백성들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 것입니다.”
진공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융당이 방금 말한 뒤쪽 얘기가 맞을 것 같아요. 터무니없는 얘기지만 <삼국유사>는 바로 그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거요.”
“신라는 그렇게 아쇼까 왕을 끌어들였고, 고구려는 요동에 육왕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습니다.”
“육왕은 누구인가?”
“아쇼까 왕을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육왕(阿育王) 또는 줄여서 육왕(育王)이라 불렀습니다.”
“중국 사찰 중에 아육왕사(阿育王寺)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고구려의 얘기도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광개토왕이 요동성을 정복한 뒤 신하들과 순행하다가 아쇼까 왕이 세운 불탑 자리를 발견하고는 신앙심이 생겨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세웠다는 내용입니다. 백제의 왕들도 아쇼까 왕을 연모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제 성왕이 그랬습니다. 성왕이란 전륜성왕의 준말이기 때문입니다.”
서탑은 파탄 광장의 정문에서 가까웠다. 스투파 입구 안내판에는 시주자 명단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명단 끝에는 네팔의 연대가 명기되어 있었는데, 네팔 연대는 서력(西曆)보다 97년이나 빨랐다. 한갓진 장소인지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스님들이 탑돌이를 하자 데이트를 하던 젊은이들이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선융이 굽타에게 말했다.
“아쇼까 왕이 파탄 지역으로 온 까닭은 석가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지 정복하고자 온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파탄왕국에 시집 온 딸을 만나기 위해 왔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역사시간에 배운 지식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샤카족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일행은 다시 이바이 투라(Ibahi Thura)라고 불리는 북탑으로 향했다. 북탑은 네 스투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관리가 잘 되어 스투파 주변이 깨끗했다. 부자들이 사는 곳인 듯 5층 아파트가 옆에 있었고 만국기 같은 룽가가 바람에 펄럭였다.
이로써 순례일행은 아쇼까 동서남북 스투파를 다 참배한 셈이었다. 선융은 아쇼까 왕의 흔적들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에 감격했지만 스님들은 어느 새 무덤덤해져 있었다. 동서남북의 스투파들이 엇비슷했고, 보드나트 스투파와 비교했을 때 왜소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눈치를 챈 여행사 직원과 굽타가 귓속말로 잠시 무언가를 수군거렸다. 이윽고 여행사 직원이 순례일행에게 다가왔다.
“지금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일정표에는 없습니다만 사원을 한 군데 더 참배하겠습니까?”
“어렵게 왔으니 사원을 가봅시다.”
누군가가 숙소로 돌아가 자유 시간을 갖고 싶어 했지만 진공스님이 사원을 참배하자고 유도했다. 그러자 굽타가 말했다.
“사원 한 군데를 참배하고도 시간은 넉넉합니다. 그때 자유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가는 곳은 카트만두 7대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불교사원 스와얌부나트(Swayambhunath)입니다. 야생 원숭이들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어 ‘원숭이 사원’이라고도 불립니다.”
승합차가 가다가 멈추었다. 인파나 자동차 때문이 아니었다. 서너 마리의 소가 길을 막고 있었다. 승합차 운전사는 느긋했다. 소가 길 옆 골목으로 한가하게 꼬리치며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굽타가 순례일행에게 말했다.
“인도나 네팔처럼 소를 예우하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소를 죽이면 네팔의 경우 20년 징역형을 받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비춰보면 이해할 수 있어요. 동물이나 사람이나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니까요.”
선융은 승합차가 스와얌부나트로 가는 도중에 <카트만두 여행>이란 책을 또 꺼내서 폈다. 스와얌부나트 역사를 알기 위해서였다. 여행서는 스와얌부나트가 카트만두 전설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과거 칠불시대(七佛時代) 중 두 번째 부처 때의 카트만두 분지는 커다란 호수였는데 어느 날 호수에 핀 연꽃에 대일여래(大日如來)가 나타났고, 이후 문수보살이 스와얌부나트에 들러 호수에 사는 악한 뱀을 물리치기 위해 주변 산을 금강검으로 자른바, 호수와 뱀이 사라지고 카트만두 땅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으로 바뀌었다는 전설이었다.
“지질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카트만두가 3만 년 전에는 실제로 호수였다고 하니 전혀 터무니없는 전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스와얌부나트도 보드나트처럼 릿차비왕조 때에 건립되었는데 435년에 만데바 왕이 후원했고, 이후 무굴제국의 침략으로 사원과 탑이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지만 1614년 말라왕조의 프라탑 왕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는 내용이 여행서에 나와 있었다. 릿차비족이나 말라족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와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그 선연(善緣)이 시공을 초월해 카트만두에서 이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승합차는 사원 입구까지 다가갔다. 매표소를 거치자 385계단이 나타났다. 스와얌부나트는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히말라야 설산이 보인다는 175미터나 돌출한 언덕 위에 있었다. 실제로 사원에 오르자 설산이 희미하게 보였고, 카트만두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사원의 주탑은 보드나트와 거의 흡사했다. 황금을 칠한 상륜부의 열세 계단이 눈길을 확 잡아당겼다.
산스크리트어로 ‘스와’는 ‘스스로’이고, ‘얌부’는 ‘솟아난다’는 뜻이라고 하니 사원의 이름은 지명과 부합했다. 사원은 카트만두 시내에서 한 송이 연꽃 같은 형상인 것이었다. 선융은 사원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불시대 두 번째 부처님 때
카트만두 호수의 한 송이 홍련은 대일여래
호수는 사람 사는 카트만두 땅으로 변하고
홍련은 봉긋한 언덕으로 솟아 사원이 되었네.
진공스님 일행은 석양이 기울 때까지 스와얌부나트에서 기도와 명상을 했다. 가게에 들러 기념품을 흥정하기도 했다. 선융은 진원스님에게 선물할 청동으로 된 부엉이를 샀다. 눈을 부릅뜬 부엉이를 보자, 선방에서 홀로 정진하고 있을 진원스님이 생각났던 것이다.
선융은 졸졸 따라다니는 원숭이와 장난을 쳤다. 결국에는 원숭이가 선융이 들고 있던 바나나를 낚아채더니 달아났다. 바나나 한쪽이라도 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달랐다. 선융은 눈을 찡긋거리며 따라오는 어린 원숭이에게 남은 바나나를 던져주며 사원 계단을 내려갔다. 문득 석양이 한 송이 홍련으로 보였다. 카트만두가 호수였을 때 붉은 연꽃에 내려앉았다는 그 대일여래로 보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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