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야
“불교의 사대성지는 어디어디인가요?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 성도(成道.깨달음을 얻음)지 붓다가야, 전법(傳法. 법을 전함)지 사르나트, 열반(涅槃. 완전한 해탈, 즉 ‘죽음’)지 쿠시나가르 네 곳을 사대성지라고 하지요. 사실 이 네 곳을 사대성지라고 한 것은 석가모니 자신은 아니고, 후대의 어떤 불교 세력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 중에 가장 중요한 성지는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보리수 밑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덜컹거리며 성도지 붓다가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자현스님은 이렇게 물었다. 일행 39명 중에 다수가 ‘성도지’를 택했다. 탄생이나 열반을 선택한 사람들도 몇 있었다. ‘전법’을 택한 사람은 나까지 2명으로 가장 소수파였다. 이는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견해를 묻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붓다가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온 것이었고, ‘답은 언제나 문제 안에 있으므로’ 자현스님이 생각한 정답이 성도지였음은 추론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독교에서는 탄생지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는 태어나면서부터 신이었죠. 그러나 석가모니는 그냥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만삭의 마야부인이 출산을 하려고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가는 길에 ‘가마 멀미’를 했고 양수가 터져 싯다르타가 태어났으며 마야 부인은 죽었어요. 이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탄생이죠. 깨달은 자로서의 ‘붓다’는, 육신의 출산 시점이 아니라 그가 도를 깨달은 시점에 탄생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러므로 탄생지의 의미가 줄어들고 대신 성도지, 혹은 완전한 해탈을 얻었을 열반지의 의미가 커진다고 스님은 덧붙였다. 전법지는 언급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법’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부처님의 가르침이 ‘종교’로 성립하게 된 것이며 따라서 전법의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인도의 불교 성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그 가운데에서도 마하보디 사원 순례자의 수는 압도적이다. 붓다가 ‘깨달은 자’로서 재탄생한 곳이므로 그럴 만도 하다.
마하보디사원
높이 52m에 9층의 피라미드 형 건축물. 기원전 3세기 아소카 왕이 세웠고 5~6세기 굽타 왕조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춘 이 사원에는 한국 일본 티벳 미얀마 등은 물론이고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도 순례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12월17일에는 티벳인들이 가장 많이 보였다. 우리와 닮고 티벳인처럼 생긴 예쁜 소녀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내게는 생소했던 ‘시킴’에서 왔다는 답이 왔다. 그는 “시킴은 인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시킴은 1642년에 건립된, 티벳 불교를 믿는 독립된 왕국이었으나 영국의 보호령, 인도의 보호령을 거쳐 1975년 인도의 22번째 주로 편입됐다. 히말라야 산맥 자락, 인도 서벵골주 북부에 위치한 이 지역은 그러나 입국을 위해서는 따로 비자를 받아야 한다. 힌두교가 다수지만 불교도도 30%에 달한다고 하는데, 불교도가 1%도 안 되는 인도와는 의식구조가 다르고 독립의식이 남아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킴에서 온 순례단
우리 순례단은 시킴 순례단이 자리를 뜬 이후 붓다가 정각을 얻었다는 보리수 밑을 ‘장악’해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벽에 금박을 붙였다. 주변의 미얀마 순례단은 끊임없이 독송을 했고 티벳 승려들은 오체투지에 여념이 없었다. 그 가운데 부부로 보이는 백인 두 명이 눈에 띄어 사진을 찍고 옆에 가서 물었다. “어디에서 왔나?” 남자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자기들의 얘기를 술술 이어갔다.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던, 젊은 중국인 부부와는 태도가 달랐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왔다. 서구 사회는 재산, 물질 등 외적인 소유를 가치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내적인 평온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불교에서 그 평온을 찾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달 전 일본에서 시작해 홍콩 대만 라오스 미얀마 태국을 거쳐 여기까지 성지순례를 하고 있다. 최근 3~4년 간 유럽에서는 불교 붐이 일고 있다.”
성지 순례중인 프랑스인 마르텔 부부. 그들은 내게 “한국의 불교는 대승불교인가?”라고 물었고 나는 “대승불교 비슷하다”라고 답했다. 한국의 불교는 ‘대승불교+선불교’인 것으로 나는 파악하고 있는데, 이를 설명하기에는 내 영어가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 당신의 종교는?
“천주교다.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이다. 그 철학은 어떤 종교와도 어울릴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순례 떠나기 전, 12월3일 시사회에서 봤던 ‘산상수훈’을 떠올렸다. 비구니 대해 스님이 만든 이 영화는 불교 철학으로 기독교 이론을 설명하는 영화였다. 영화 속 출연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신은 왜 선악과를 사람들 곁에 두어 원죄를 짓게 만들었나? 선악과를 아예 만들지 않으면 됐을텐데.” 영화에서 그에 대한 답은 “선악과는 필요하지만,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선악을 분별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분별심에 사로잡히거나 분별심에 휘둘리지는 말라”라는 뜻으로 내게는 이해됐다. 이 영화에서는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설도 불교 이론으로 설명했다. “금으로 그릇을 만들면 그 그릇은 금이기도 하고 그릇이기도 하지 않나?”와 같은 논리였다. 모스크바영화제에도 초청된 이 영화는 현지에서 관심의 초점이 됐고, 러시아의 기독교도들은 기독교 교리에 비구니가 관심을 가져 준 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사원 안에는 붓다가 일곱 주 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가 일곱 곳에 팻말로 붙어 있었다. 6주째에는 “비가 많이 와 비에 휩쓸릴 위기에서, 용왕이 붓다를 보호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이런 말을 글자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붓다가 깨달은 이후 일곱 주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마하보디사원을 만든 사람들은 이를 신화적인 내용까지 동원하여 채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전에 ‘깨달음’ 이후의 정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구월심 사유하던 성자에게 /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날 /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 연기(緣起)의 도리를 알았으므로” 라고 자설경 보리품에는 적혀 있다. 그 연기의 도리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한다는 상의성(相依性), 이것이 연기법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붓다의 ‘깨달음’이란 일차적으로 ‘철학적 깨달음’이다. 그 철학적 깨달음이 난해한 기독교 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며 프랑스인 천주교 신자에게도 내적인 평온을 가져다 주고 있는 것이다.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현대 첨단 물리학의 연구 결과와도 고도의 정합성을 갖는다고 한다. 이는 “현대의 물리학자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옳음을 입증해 가고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다만 ‘철학’, 혹은 ‘과학’일 뿐이며 본연의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종교로서의 불교는 무엇일까?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석가모니불’을 혹은 ‘관세음보살’을 외며 복을 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은 힌두교의 신(神) 아발로키테스바라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것은 “진화하지 못한 힌두교에 매달리는 것”이며 “토속 신앙의 변형”이라고 폄하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철학’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복을 비는 무당의 굿으로 타락한 현대 한국 불교”를 개혁해야 하는 것일까? 스스로 신이 되기를 거부했으나 제자들과 후손들에 의해 신격화의 길을 걷게 된 석가모니에게서 그 신화를 벗겨내고 그를 ‘인간 붓다’로 끌어내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불교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불교 유산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보리수 밑. 석가모니가 앉아있었다고 추정되는 자리에 설치한 좌대. 자현 스님은 “실제 정각을 얻은 자리는 탑의 중앙일 것이며, 이 자리는 후대인들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우리 순례단 한경자씨가 탑 밑에서 살풀이춤을 추고 있다. 한경자 씨는 “살풀이춤은 도량을 맑게 해주고 업장과 액난을 소멸시켜주는 춤”이라고 말했다.
오체투지에 여념이 없는 티벳 스님들
아소카석주. 이곳에서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글 · 사진 =김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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