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룸비니 동산
룸비니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붓다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나는 작은 언덕을 연상했는데, 룸비니는 평평하고 반듯했다. 룸비니동산이 한자로 남비니원(藍毗尼園)이니 구릉이나 언덕을 상기시키는 ‘룸비니 동산’보다는 ‘룸비니 정원’이 더 적확한 번역일 듯했다. 그러나 ‘동산’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큰 집의 정원에 만들어 놓은 숲’의 의미가 있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나는 나의 일천한 국어 실력을 한탄했다.
룸비니동산 입구(사진. 김왕근)
2017년12월14일. 이 날은 ‘불타여행사’가 진행하는 인도 성지 순례 9일째였다. 우리는 비행기와 기차, 버스 등을 타고 인도 전역을 돌며 엘로라석굴 아잔타석굴 산치대탑 타지마할 잔타르만타르 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들을 답사했다. 13일에는 석가모니의 주 활동무대인 스라바스티(사위성)에 입성했으며 14일, 드디어 부처님의 탄생지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버스로 비포장도로를 몇 시간 동안 달리다가 국경 가까이에서 교통 정체를 겪었고, 비자 문제가 해결되는 동안 일부는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을 다녀왔으며, 상점에서 차이(홍차에 우유·설탕·향신료 등을 넣어 만든 인도식 밀크티)를 마시기도 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기다리며 먼지에 시달린 끝에 네팔로 가는 국경을 넘어 도달한 룸비니는 말 그대로 ‘별세계’였고 ‘동산’, 즉 ‘행복하고 평화로운 정원’이었다.
룸비니에는 아소카왕(재위 : B.C. 273~232)이 세운 아소카 석주가 있었다. 아소카왕은 인도에 첫 통일 제국을 건국한 ‘전륜성왕’이다. 아소카왕의 할아버지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을 끝내고 철수한 뒤인 BC317년경, 군사를 일으켜 당시의 난다 왕조를 무너뜨렸으며, 인접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마우리아제국을 형성하였다. 아소카는 이 왕조의 제3대 왕으로서 인도 남단 타밀 지역을 제외한 전인도(북위 14도 이북)를 망라하는 통일제국을 세웠다.
그는 즉위 7년 만에 불교에 귀의하고, 8년 되는 해에는 동남 벵골만 해안에 위치한 칼링가국을 무력으로 정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10만 명이 살상되고 15만 명이 생포되었으며, 수십만 명이 질병과 고통으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참상 앞에서 아소카는 깊은 자책감을 느끼고 참회하였으며 급기야 무력정복 방침을 버리고 불법(佛法)에 의한 덕치주의(德治主義)를 추구하였다고 한다. 그가 왕위쟁탈전 기간에 형제 99명을 죽인 데 대한 참회가 불교 귀의의 계기가 됐다는 설도 있다.
아소카왕은 상용어인 팔리어로 불경을 수집했고, 10년간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도처의 불교 성지(聖地)에 불탑을 세우고 불법을 역설하였다. 그는 스리랑카 · 미얀마 · 시리아 · 이집트 · 마케도니아 · 그리스 · 북아프리카 등지에 불법을 전해 불교를 세계적 종교로 만들었다. 그가 왕자 마헨드라와 딸 산가미트라를 파견해 포교한 스리랑카는 남방불교의 근거지가 되었고 여기서 미얀마 · 타이 · 수마트라 · 자바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불교가 전파됐다.
아소카왕이 룸비니에 온 것은 BC 249년으로 비정(比定)된다. 그가 세운 아소카 석주(7.2m)에는 ‘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는 아소카 왕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 만에 친히 이곳 석가모니 탄생지를 참배하고 다녀간다’는 말, 이곳에 말 모양의 머리를 얹은 석주를 세웠다는 내용 그리고 “이곳에서 탄생하신 세존을 기념하여 이 마을의 조세를 감면해주고 생산물의 1/8만 거두라(다른 곳은 1/6)”라는 말들이 쓰여 있다고 한다.
여행을 이끌면서 유적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맡은 ‘붓다 순례’의 저자 자현 스님은 “아소카왕과 현장 스님을 이해했다면 인도 불교 유적을 모두 이해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1896년 12월 독일 고고학자 휘러에 의해서 룸비니의 아소카석주가 발굴되자, 현장 스님의 기록을 기초로 해서 나머지 아소카석주들을 비롯한 불교 유적들의 발굴이 쾌속으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현장은 627년부터 18년간 인도에 유학했고, 당시 세계문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던 바이샬리의 날란다대학에서 공부했다. 또한 인도 전역을 답사하면서 이를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는 전 12권의 책으로 남겼다. 자현 스님은 “현장 스님은 자기가 본 것과 남으로부터 들은 것을 모두 기록에 정확하게 써서, 이게 정밀한 ‘네비게이션 지도’의 역할을 했다”라고 덧붙였다.
마야데비 사원 주변 절터들. 아소카 석주가 세워진 후에 이곳에 사원들이 건립됐고 불교가 융성했음을 짐작하게 한다.(사진. 김왕근)
아소카 석주 바로 옆에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부인을 기리는 마야데비사원이 있었다. 이곳은 싯다르타가 태어난 장소의 발굴 현장을 그대로 사원으로 만든 것으로 원래 11세기에 세워졌고 현재의 사원은 1943년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이 사원과 아소카 석주의 위치는 '아소카 석주에서 동쪽으로 일곱 걸음 떨어진 곳에 부처님의 탄생지가 있다.'라는 7세기 현장(玄奬)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전설이 정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일까? 사원 안에는 옆구리로 싯다르타를 낳는 마야부인과 어린 싯다르타를 받는 브라흐마 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부조가 모셔져 있었다. 원래는 얼굴이 제대로 새겨져 있었지만 이슬람교도들에 의해서 훼손된 것이라고 한다.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는 이 부조상 밑에는 석가모니의 발자국이라고 전해지는 돌이 있었는데, 애초에 석가모니가 태어나서 바로 걸음을 걸었다는 말 자체가 후대에 꾸며진 신화였을 것이고, 걸음을 걸었다고 해도 그게 왜 흔적이 되어 바위로 굳어지겠는가? 만약 그렇다 해도 그 돌은 어른의 발보다도 더 커 보였으니 아기붓다의 발걸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사기(詐欺)’의 흔적에 기도하며 돈을 집어던지는 우리 순례단의 행태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대한민국의 순례단만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본 탄생 조각상. 그 밑에 있는 황금색 금박은 붓다를 기리는 각국 순례단들이 붙인 것이다.(사진. 김왕근)
불교에서의 기복(祈福)의 문제, 그리고 신화와 역사의 분리의 문제는 여행 출발 전부터 자현스님과 벌였던 토론의 한 주제였고, 순례 기간 내내 내 머릿속에 있던 화두였다. 나는 순례 두 달쯤 전, 내가 편집장으로 있는 잡지 ‘붓다로살자’ 7호에 자현스님을 인터뷰했었고 그때 우리는 이런 대화를 했다.
“부처님이 태어나서 정말로 갓난아이가 벌떡 일어서서 일곱 걸음씩 네 번 걸었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말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불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당시의 현실을 모른다. 부처님의 생애는, 물에 녹아있는 커피믹스와 같다. 이미 녹아있기 때문에 물에서 커피와 프림을 분리해낼 수 없다. ‘천상천하유아독존’과 같은 이야기에서 사실과 허구를 백프로 구분해낼 수는 없다.”
“없지만, ‘인간 붓다’의 삶이 어땠는가를 탐구하는 것, 석가모니의 삶을 현대 한국인들의 삶에 비추어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바뀔 수 있지 않겠는가?”
“과도한 해석이 들어가면, 이것은 자신이 말하고 싶은 상으로 붓다상을 만드는 것이 된다. 이것은 신화와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다. 붓다가 스스로 글로 쓴 것은 한 자도 없고, 제자들이 합송을 해서 붓다의 말을 복구했는데 그것이 문자로 기록된 것은 불멸 후 수백년이 지나서이다. 그런데 불경이 그렇게 문자화할 때, 그 불경은 문자화되는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을 반영해서 왜곡된다. 그러므로 석가모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전혀 없다. 그러니까 다만 상상할 뿐이다. 붓다의 삶에 대한 언급은, 누가 말하든 다 상상일 뿐이다. 나도 지금 상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상이 지금까지 있어왔던 신화적 설명을 가능한 한 줄이고 지금 우리들의 삶에 비추어서 어땠는가를 분석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 이후에 “석가모니가 8살부터 12살까지 언어, 무술, 통치술 등을 공부했다”라고 하는 자현스님의 책 ‘붓다순례’에 있는 말이 ‘인간 붓다’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내가 인도 성지 순례를 한 것은 그 상상을 위한 기초 자료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보리수 밑에 앉아 명상하는 네팔 승려들.(사진. 김왕근)
석주와 사원의 한쪽 주변으로는 수많은 절과 탑의 기단으로 보이는 유적들이 있었다. 그 너머에는 커다란 보리수가 서 있고, 네팔의 수도승들이 그 밑에 앉아서 명상을 혹은 염불을 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수도승은 “멀리서 찍지 말고 가까이 와서 찍으라”는 손짓을 했다. 포즈를 잡은 그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여줬더니 그는 ‘싸두’라고 했다.
미얀마의 원나 시리 스님이 쓰고 범라 스님이 번역한 ‘아난존자의 일기’(운주사 2006)에는 부처님이 ‘싸두’라는 감탄사로 제자들을 칭찬하는 장면들이 가끔 등장한다. 한 오렌지 주스 광고로 인해 친숙해진 포르투갈어 ‘따봉’과도 같은 쓰임새였을 그 언어를 현지의 수도승 입으로 직접 들으니 책이 현실로 화현(化現)하는 듯이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이 감격 또한 허구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싸두’라는 말은 원나 시리 스님이 네팔 현지 언어를 기반으로 소설에 도입한 것일 테고 그걸 현지에서 내가 확인한 것은 다만 원나 시리 스님의 열정을 확인한 것일 뿐이며 그것이 진짜 석가모니에게 닿아있다는 증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인도 성지 순례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일까?
룸비니동산에 서 있는 아기 붓다상.(사진. 김왕근)
석주에 새겨진 명문. 이곳이 석가모니의 탄생지였음을 증언하고 있다.(사진. 김왕근)
불타여행사 순례단은 밤늦게까지 ‘석가모니불’을 염하며 기도했다. 깃발들은 티벳이나 스리랑카 교단에서 매어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의 일대기 등이 글과 그림으로 적혀있다.(사진. 김왕근)
마야데비 사원의 야경(사진. 김왕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