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 기자 인도성지순례기] 3- ‘불교미술의 성소’ 엘로라를 가다
혜총스님 “화려한 조각만 보지 말고 옛 불제자들의 붉은 마음을 보라”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델리에서 비행기 편으로 1시간 30분을 날아 도착한 인도 중부의 도시 아우랑가바드는 ‘불교미술의 성소(聖所)’라고 부를 수 있다. 엘로라(Elora)와 아잔타(Ajanta) 석굴이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해야 한적한 분위기에서 엘로라 석굴을 볼 수 있다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 발길을 재촉한 것이다. 이곳은 늘 순례 인파로 붐빈다고 한다.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의 유적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니 그도 그럴 것이다.
짙은 안개를 뚫고 버스가 달린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광이 안개 때문인지 더욱 몽환적이다. 인도에서는 잘 보기 어려운 산기슭에 고대 도시의 유적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오랜 문명이 후손들에게 남긴 유산들이다. 이 유산들이 소중한 관광자원이 되어 후손들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는 유적을 조성한 선조들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우랑가바드의 북서쪽 약 3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엘로라에는 현재 34개에 이르는 불교 및 자이나교, 힌두교의 석굴사원이 있다. 엘로라는 인도 중세(6~8세기)인 굽타 시대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로 꼽히는 석굴이다.
엘로라의 불교석굴 군. 거대한 현무암 바위를 파 들어가 차이티아와 비하라를 조성했다.
서부 데칸 고원의 낮은 구릉지대 그 경사면에 조성되어 있는 엘로라에는 제1굴에서 제12굴에 이르는 12개의 불교사원과 제13굴에서 제29굴까지의 17개의 힌두교 사원, 제30굴에서 제34굴까지 5개의 자이나교 사원이 병존해 있다.
엘로라의 불교사원은 A.D. 4~7세기에, 힌두사원은 A,D. 7~9세기에, 자이나교 사원은 A.D. 9~13세기에 각각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어 1~2세기 정도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불교 석굴의 조성시기를 6~7세기로 보는 경우도 있고, 힌두교 석굴은 7~8세기, 자이나교 석굴은 8~10세기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기 다른 종교들의 사원들이 병립되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는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의 서로 다른 종교들이 순차적으로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종교 성지에 대해 인위적인 훼손을 하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아마도 당시 인도의 사회가 종교의 병존을 허용하는 관용과 포용의 문화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아우랑가바드에서 엘로라 석굴군 가는 길. 산 기슭에 오랜 유적들이 보인다.
그런데 왜 엘로라에 유적을 남긴 세 종교 가운데 불교만 인도사회에서 쇠망의 길을 걸었을까? 오늘의 불교도들은 엘로라를 순례하면서 이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처한 불교의 위치와 무관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일본과 호주 학자 사이에서 ‘인도에서 왜 불교가 사라졌는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 일본의 불교학자 호사카 슌지 교수가 불교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인 인도에서의 불교 소멸에 대한 자신의 연구논문을 지난 2007년 7월 초 단행본 책(김호성 역)으로 발표하자, 다음해인 2008년 가을 오대산 월정사에서 열린 교수불자대회에서 호주의 판카즈 교수가 이를 강력하게 반박하고 나섰던 것이다.
논쟁의 핵심은 “이슬람에게 안티힌두교의 위치를 잃었기 때문에 멸망했다”라는 호사카 교수의 주장에 대한 판카즈 교수의 “그것이 아니라 불교가 이슬람이 침공하기 이전에 이미 지지세력의 기반을 상실했기 때문에 쇠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반박이다.
이 논쟁이 관심을 끄는 것은 누가 더 정확한 분석을 했는가를 떠나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에서는 공히 뜨끔한 충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도불교의 멸망사가 먼 나라의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앞에 당면한 현실을 말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오늘을 사는 불자라면 이 논쟁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지난 2008년 <불교평론> 제 36호에 기고한 졸고 ‘인도불교 멸망사가 주는 교훈’이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한다.
“
일본 레이타구대 호사카 슌지 교수는 자신의 책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에서 불교가 쇠망할 당시의 인도이슬람 최고(最古)자료인 <차츠나마>를 통해 불교의 쇠망 요인을 분석해, 7∼8세기 서인도불교의 상황을 생생히 전달한다. <차츠나마>는 711년 이슬람이 처음으로 침공한 인도 신드 지역의 이슬람 전파 경위를 담고 있는 사료이다.
호사카 슌지는 지금까지 제기돼온 기존의 불교 쇠망 원인들을 모두 소개하면서 그 이유가 그럴듯하지만 틀린 이유를 조목조목 제기한다. 우선 ‘이슬람 침공으로 망했다’라는 설에 대해 “이슬람 침공으로 불교가 쇠망했다면, 다른 종교들 즉 힌두교나 자이나교는 왜 망하지 않고 건재했을까. 따라서 이 설은 타당성이 떨어진다”라고 지적한다.
둘째 ‘불교가 가진 이성주의적 경향(현실부정의 경향까지 포함) 때문에 심원한 철학을 발달시켰지만 일반 민중에 보급되지 않아 힌두와의 경쟁에서 졌다’라는 유력설에 대해 “<차츠나마>에 등장하는 당시 인도사회에서 불교는 결코 민중들에게 유리되지 않았고, 밀교적인 의식까지 수용해 민중들의 삶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라고 일축한다.
셋째는 ‘불교가 밀교화되면서 힌두교로 흡수됐다’라는 설에 대해서는 “불교는 가정의례나 일상 의례를 발달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힌두교 사회에서 불우했던 하층민이나 이민족, 상인계층이나 정통성을 갖지 못한 하층 출신의 왕(대표적인 예가 아소카왕), 이민족의 지배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그래서 훨씬 더 많은 계층에 흡수될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훨씬 더 큰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라고 반박한다.
그렇다면 호사카 슌지 교수가 내놓은 불교 멸망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분석이 독특하고 신선하다. “이슬람 침략 이후 안티힌두교라는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이슬람이 대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도에서 불교의 정치적 역할은 소멸됐다”는 주장을 제기한 것이다.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침입하자,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담당하고 있던 안티힌두교로서의 역할이 불안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호사카 교수는 <차츠나마>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이슬람이 쳐들어와 “개종, 공물, 죽음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불교 승려들은 당시 정치 지도자에게 항복을 선택하도록 권유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불교가 쇠망한 것은 이슬람의 침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지만 무력적 탄압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이 불교가 인도에서 지닌 사회적 지분을 너무도 강력하게 삼켜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호사카 교수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호주 시드니대 판카즈 모한 교수의 주장은 어떤가. 그는 말한다. “불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이슬람을 수용했다는 <차츠나마>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이 쓴 한국사를, 이라크전을 일으킨 부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오류”라고. 판카즈의 주장대로라면 7~8세기의 불교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이미 상실했고, 불교의 생명력이 병든 상태였다.
인도의 불교는 왜 병들게 된 것일까. 판카즈 교수는 가장 큰 원인으로 “힌두 의식을 받아들이면서 불교 본래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하게 된 점”을 꼽았다. 즉 7~8세기경 불교교단이 힌두교 의식을 받아들이면서 9~10세기경부터 불교는 힌두교와 크게 구분되지도 못했고, 인도 내에서 대중적인 지지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판카즈 교수는 “힌두교의 의식으로 변질된 불교교단에 대해 인도인들은 더 이상 유마경의 이상, 보살의 이상을 기대할 수 없었다”라고 꼬집었다. 또한 “방대한 불교경전을 요약본으로 만들고, 요약본을 다라니로, 다라니를 만트라로 줄였는데, 일반인들은 만트라만으로 불교를 이해할 수 없었던 점도 불교가 지지기반을 상실한 이유”라는 것이 판카즈 교수의 설명이다.
이와 같은 반론과 재반론은 기묘하게도 오늘날 한국불교가 한국사회에서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원인을 규명하는 모멘트를 제공해 준다.
돌아보면 우리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직장과 사회에서 불자임을 드러내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런 현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초래된 것일까. 호사카 교수와 판카즈 교수의 학설은 현재 한국불교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는 것일까.
호사카 교수의 학설에서처럼 한국불교는 과연 절대자에 매몰된 특정종교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다수 계층에게 대안이 되고 있는가. 대안은커녕 도리어 불보살을 절대적 신으로 둔갑시켜 손쉽게 종단과 사찰을 운영하고 있지는 않은가. 절의 불상을 십자가로 바꾼들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신행을 묵인하고 있지는 않은가. 냉철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판카즈 교수의 주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법불교보다는 방편불교가 성행하는, 부처님의 수승한 가르침을 배워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불교를 지향하기보다는 주술이나 기도, 구복으로 치달리고 있는 현실에서 불교가 설 땅은 갈수록 좁아들 뿐이다.
호사카 교수의 주장이든, 판카즈 교수의 반박이든, 이번 논쟁의 본질은 오늘날 한국불교계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교훈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한국사회에서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원인을 찾게 해 주는 논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이 땅에서 불교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절박한 국면을 맞이하게 된 21세기 초입의 한국불교가 대외적으로 분노를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철저한 살핌을 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제12석굴의 모습. 3층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엘로라 제10굴의 모습. 불교석굴 가운데 대표격이다.
엘로라에는 총 12개의 불교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엘로라의 석굴 사원 입구 및 사원의 벽 등에는 수많은 조각 작품들이 새겨져 있다. 석굴은 하나의 거대한 바위를 파고 들어가면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 고대 건축양식의 절정이라 불러도 될 만큼 실로 어마어마한 불사가 아닐 수 없다.
일각에서는 이곳에 불교석굴을 만든 이유가 이곳에 살고 있는 불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곳을 지나는 무역상들을 불러들이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곳의 차이티아(불당)와 비하라(사원)를 돌아보는 것으로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곳이 간절한 불심, 간절한 정진심, 간절한 신심이 아니면 조성할 수 없는 성소라는 것은 굳이 재론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12개의 불교 석굴사원 가운데 제10굴이 전형적인 차이티야(불당)이고 나머지 11개의 굴은 비하라(승원)이다.
제2굴은 일반 동굴사원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차이티야(불당)가 아닌 비하라(승원)임에도 불구하고 예배공간을 마련해 가지고 있다. 이 굴은 A.D. 580~642년 경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 입구 및 12개의 기둥으로 떠받혀진 사원 내부에는 많은 조각들이 남아 있다.
사원 입구에 관음보살과 밀적금강보살이 일종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옆으로는 수많은 천신들과 ‘관음구제도’의 모습이 관음보살상 왼쪽에 새겨져 있다. 사원 내부로는 다라(Tara) 보살을 포함한 몇몇 천녀들의 모습과 함께 연꽃대좌에 서 있는 붓다의 모습과 감실 입구의 관음보살과 문수보살의 형상과 더불어 밀적금강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등에 둘러싸인 채 사자좌에 모셔진 붓다의 형상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내부 북동쪽 구석에는 ‘붓다의 탄생’이라 불리는 4개의 불상이 남아 있어, 각각 미완성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조각과정에 따른 불상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불교석굴 가운데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제10굴은 길이 26미터, 넒이 13.4미터에 이르는 엘로라 유일의 순수 차이티아로 비스와카르마(Visvakarma) 차이티아라고도 불린다. A.D. 700~750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 내부 7번째의 석주에서 발견된 명문에 의하면 13세기 경에 재차 증축됐다. 이 석굴에는 입구부터 내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름다운 조각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중에는 간혹 금강승(밀교) 불교의 독특한 조각 작품들도 눈에 띈다.
목조서까래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천장의 모습. 순례단은 절로 절을 한다.
이 석굴은 엘로라에서 외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목수의 동굴’이라는 애칭이 붙은 곳으로 엘로라에서는 유일하게 사리탑을 모신 사원이기도 하다. ‘목수의 동굴’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천장을 받치는 목조 모양의 석조 서까래 조각에서 비롯됐다. 전체 30개의 석주로 떠받혀져 거주공간으로도 사용되었던 이 차이티야는 높이 8.2미터, 직경 4.9미터에 이르는 중앙 스투파에는 그 앞면에 붓다 설법상과 관음보살, 미륵보살의 형상과 더불어 수많은 천녀들이 새겨진 거대한 조각들이 남아 있다.
사원 입구 위쪽에 새겨진 중앙 아치형 창문 양옆에는 힌두교 쉬바파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후대 금강승불교 특유의 조각 작품들이 남아 있다. 그 각각의 조각에는 전체 야마의 형상을 중심으로 챠크라를 상징하는 부분 부분에 챠크라의 기능을 형상화한 조각이 있고, 그 상단부분에는 전체 챠크라의 상징으로서의 뱀이, 중심부에는 관음보살 및 관음보살의 여성적 에너지를 형상화한 샥티(Sakti)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띤 탈(Teen Tal), 즉 ‘3층 건물’이라 불리는 12굴은 불교석굴의 백미에 해당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석굴은 전체 산의 일부를 파 들어가 건축한 넒이 35미터*21.33미터에 이르는 3층의 대형 비하라(승원)로, 건물 내벽에는 후기 대승불교 및 초기 금강승불교(밀교)의 교리 발전에 따라 나타난 많은 보살상들 및 기타 천신들이 조각되어 있다. 맨 위쪽 노천에는 힌두교 시바 신전이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카일라스 산, 곧 수미산 형상으로 된 신전에는 인도 고대의 양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 사건들이 역동적인 양상으로 조각돼 있다.
1층은 수행자들의 침실로 이용되었고, 2층은 큰 홀로 만들어졌다. 3층은 14개의 부처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한쪽의 7개 불상은 설법인을 하고 있고 맞은편 7개의 불상은 선정인을 하고 있다.
현재 이곳 석굴에 남아 있는 미술품 중 중요한 것으로는 1층 배후벽면에 그려진 만다라로서, 9개의 구획을 만들어 무수한 영겁의 윤회 및 그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표현하고 있다. 이 만다라에는 밀적금강보살 및 오지여래, 연화수보살, 군다리보살, 다라보살 등 많은 보살과 천신들, 그리고 붓다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계단을 올라 3층에 이르면 그 동쪽 배후벽면에는 일곱의 마노사불이 조각되어 있으며, 내부 감실의 동쪽 벽에는 사르나트의 초전법륜을 묘사한 붓다 및 그 옆에 관음보살, 밀적금강보살의 상과 함께 동쪽 면에는 일산 아래 일곱 분의 마노사불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맞은편에는 다라보살과 잠발라 나무가 조각되어 있다.
24개의 석주가 거대한 승원을 떠받치고 있다. 사람의 힘으로 이런 비하라를 조성할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밖에도 제5굴은 24개의 석주로 받혀진 넓이 35.6미터*17.6미터에 이르는 엘로라 최대의 비하라 건물이다. 양쪽으로 배열된 석주 뒤쪽으로는 2평 정도 크기의 승방들이 반듯하게 파져 있다. 이 굴은 자체 교육기관의 기숙사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 감실에 붓다 좌상과 관음보살, 다라보살, 미륵보살과 몇몇 여신들이 조각되어 있다.
제6굴은 비교적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굴 안에 전체적으로 금강승(밀교) 불교의 많은 상들이 새겨져 있다. 문에는 힌두교의 강가 여신과 야무나 여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며, 사원 안 붓다 좌상 옆에 불다 좌상 및 샥티(그의 여성적 에너지)의 모습이 새겨진 판텔이 있으며, 힌두 여신 락쉬미(불교의 길상천)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촘촘하게 짜인 순례일정으로 한 석굴에서 오래 머물 시간적 여유가 없다. 콩 볶아 먹듯이 여기 저기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나중에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이런 다급한 마음에 종종종 석굴들을 뛰어다니다가 혜총 큰스님의 “자, 이곳에서 기도합시다”라는 한 마디에 순례 일행은 제10굴로 운집한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삼귀의로 시작된 기도는 반야심경에 이어 광명진언, 찬불가 합창, 사홍서원으로 이어졌다.
부처님을 향한 옛 선대 불제자들의 마음을 느꼈을 순례 불자들이 지극한 합장을 하고 있다.
설법을 하고 계시는 혜총스님. 스님은 이 석굴사원을 조성하며 정진하던 옛 불제자들의 마음을 보라고 강조했다.
“오늘 우리는 부처님 8대 성지를 순례하기에 앞서 엘로라와 아잔타 석굴을 참례합니다. 8대 성지는 부처님께서 재세 시에 머물며 전법과 정진을 하신 곳이지만, 이곳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을 그리워하며, 부처님을 조성하고, 수행했던 곳입니다. 부처님과 그 가르침에 대한 신심과 그리움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부처님의 제자들이 이런 엄청난 불사를 했을까요. 바위를 파 들어가고 그곳에 불보살상을 조각하고, 온갖 화려한 문양을 새겨 넣으면서 이들이 가졌을 원력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부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뜨겁고 붉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문양과 멋들어진 조각에만 눈길을 줄 것이 아니라 이 위대한 조각을 조성하던 선대 불제자들의 마음을 읽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간절한 기도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석굴 안에서의 혜총 스님 법문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이곳에서 석굴을 조성했을, 이곳에서 정진했을 옛 불제자들의 마음을 생각하라는 말씀에 가슴 깊숙이 더운 기운이 느껴졌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흑흑…”
이 때 정적을 깨는 흐느낌이 들려왔다. 일행 가운데 한 보살님이 그만 감격의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몸이 아파서 순례에 참석할지를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다던 그 보살이었다. 흐느낌은 이내 울음으로, 통곡으로 진화했다. 그래. 울어야 한다. 이럴 때 울지 않으면 언제 또 감동의 눈물을 흘리겠는가. 아마도 나머지 모든 순례단들도 가슴으로 흐느끼고 있으리라.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부처님을 향한 고마움, 그리움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 이 위대한 유적을 보며 절감했을 것이리라.
“엘로라를 대표하는 힌두사원 제16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곧바로 아잔타로 떠나야 한다”는 가이드의 호소가 아니었으면 우리 일행의 발걸음은 차마 제10굴을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감동을 가슴에 묻은 채 서둘러 제16굴로 향했다.
엘로라 제16굴. 앙코르와트와 함께 2대 힌두사원으로 꼽힌다. 엘로라 전체 석굴 가운데 하일라이트에 해당한다.
엘로라 제16굴은 엘로라 전체 석굴 가운데 하이라이트에 해당한다. 카일라시 사원으로 불리는 제16굴은 캄보디아 시엠립에 있는 앙코르와트와 함께 세계 2대 힌두교 유적으로 꼽힌다. 카일라시는 티베트 땅에 있는 산 이름으로 불교와 힌두교의 공동 성지이다. 세계의 중심을 떠받치는 수미산으로 믿어지는 곳으로 이 조각을 보면 카일라시 산을 본 것과 같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제16굴은 라슈뜨라꾸따 왕조시대 크리쉬나 1세(8세기)에 의해 건설되었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위에서 아래로 깎아내려갔고, 앞에서 뒤로 깎아 들어갔다. 깊이가 86미터, 너비 46미터, 높이 35미터의 크기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보다 2배가 큰 규모다. 파르테논 신전이 모든 석재들을 가져다가 쌓아 올렸다면, 엘로라의 카일라시 사원은 한 덩어리의 거대한 바위를 파 들어가면서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다. 깎아진 돌덩이의 무게만 해도 20만 톤에 이른다고 한다. 완성되는 데 약 15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석공들은 대를 이어 이 일에 참여했을 것이다.
바위를 깎아 공간을 만든 후 탑도 세우고 사원도 만들었다. 이런 공간을 생각해냈다는 자체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설계도는 있었는지, 그 엄청난 돌들은 어떻게 치웠는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인도의 석굴 가운데 대표로 손꼽히는 카일라시는 ‘인도 석굴의 어머니’라는 존경을 받고 있다. 불교 성지는 아니지만, 엘로라에 가면 눈 여겨 보아야 할 곳이 아닐 수 없다.
엘로라 석굴사원을 뒤로 아잔타 석굴로 출발할 전세버스로 되돌아오는 발길이 무겁다. 좀 더 오랜 시간을 두고 살펴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리라. 후일을 기약하고 돌아오는 길에 엘로라 석굴을 소개하는 책자를 파는 여러 현지 장사꾼들의 외침에 정신이 산란하다. 10달러, 5달러를 외치는 그들의 목청이 낭랑하다. 수십 미터를 따라붙으며 책을 팔려했지만 대부분은 실패를 거듭한다. 그래도 그들의 목청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책 한 권을 팔기 위해 매일매일 이곳에서 10달러, 5달러를 외치고 있을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만큼 나는 나의 일에 정진하고 있는가. 돌연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난다.
아잔타로 향해 갈 버스에 올라 좌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어두운 차이티아 가장 깊은 곳 중앙에 앉아 계신, 두 손을 모은 수인(설법인)을 한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인도의 거의 모든 불상들은 설법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전법! 나는, 아니 한국의 불자들은 전법을 하고 있는가.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들었을 ‘칠보로 세상을 장엄하는 것보다 사구게를 전하는 것이 더 큰 공덕’이라는 가르침을 오직 머릿속에만 넣고 살지는 않았는가. 시나브로 나는 참회진언을 웅얼거리고 있다.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