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영주지역 불교문화유산 답사기] 11 소백산 자락의 사찰들3 비로사①

비로사 경내 삼성각에서 바라본 전경.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소백산 원적봉이다.
소백산 자락에는 의상 스님과 연관된 절들이 다수 있다. 부석사를 비롯하여 의상 스님이 이곳에서 화엄교학을 널리 펼칠 때 창건된 절들이 대부분이다.
이번에 소개할 비로사 또한 의상 스님 재세 시 창건된 절로 ‘사적기’에는 신문왕 3년(683)에 제자 진정(眞定) 스님의 효성에 감동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비로사가 90일 간 추동에서 열린 ‘화엄대전(華嚴大典)’을 강의했던 추동(錐洞)으로 비정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로사사적’은 1907년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과 사지(寺誌)가 화재로 소실되고 나서 1918년 희방사 주지 김해운 스님이 남긴 것이 권상로 선생의 『한국사찰전서』에 전하고 있다. 이 사적기의 거의 대부분은 『삼국유사』의 의상 스님 관련 자료를 인용한 것이다.
이 사적기에 따르면, 1918년 당시에 비로사는 지금과 달리 문경 김용사(金龍寺)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비로사의 창건은 『삼국유사』 ‘진정사 효선쌍미(眞定師 孝善雙美)’조에 소개된 내용을 언급하면서 의상 스님의 법문을 요약한 ‘추동기(錐洞記)’의 추동이 바로 ‘비로사’라고 사적기는 밝히고 있다.
사적기에서 밝힌 비로사의 연혁을 살펴보면 683년 창건과 더불어 930년께(이 때는 고려 태조 20년에 해당하지만 사적기에는 21년으로 되어 있다) 진공 대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선풍(禪風)을 드날리다 937년 입적하였다.
이에 태조는 진공 대사라는 시호와 함께 보법(普法)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려주었으며, 경내에 대사의 행적을 탑은 비석과 부도가 남아 있다.(진공 대사의 부도 등과 관련해서는 다음 회에 상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경내 종각에서 바라본 비로사 경내. 앞에 보이는 비석이 진공대사 탑비이다.
이후 1126년(인종 4)에는 왕이 김부식(金富軾)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385년(우왕 11)에는 환암(幻庵) 스님이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1469년(예종 1)에는 김수온(金守溫)이 복전(福田) 5명을 두고 『화엄경』을 강의케 하고,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광평대군 영순군, 무안군, 삼한국대부인 왕 씨 등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그러나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비로사도 전란에 휩싸여 모든 건물이 불에 타고 석불 2구만 겨우 남게 된다. 1609년 전란으로 폐허가 된 비로사를 경희(慶熙) 대사가 중건하고, 1684년 월하(月河) 대사가 40여 칸의 당우와 법당, 산신각 등을 중건하여 3창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07년 8월 25일 소백산과 영주, 풍기, 단양, 영월 등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 과정에서 비로사는 또 다시 모든 건물들이 불에 타버린다.
이후 1919년에 주지 범선(泛船) 스님이 이 법당을 중수하였고, 1927년에는 요사를, 1932년에 다시 법당을 중수하였지만,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또 다시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