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영주지역 불교문화유산 답사기] 10 소백산 자락 사찰들3
희방사②끝…한국전쟁 당시 훈민정음 목판 등 귀중한 유물을 불질러
‘그 후 공산(空山) 빈터에 잡초만이 우거지고 작전상 출입금지구역이 되어 몇 해 동안 인영영절(人影永絶)의 처참한 현상에 있었다. 그때 거주하던 승려의 억울함이야 어찌 형언할 수 있겠는가. 각처의 인사들도 탄식을 금치 못하고 이 고을의 인사들은 면목이 없으니 비조(飛鳥)도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산신령도 필경 슬퍼 눈물을 지었을 것이다’ 〈희방사 중건비〉에서
1천 수백 년 동안 소백산을 지켜온 희방사였지만 전란의 참화를 비켜가지 못했다. 어쩌면 조금만 더 신중하고 깊이 있는 논의와 계획이 있었다면 비켜갔을 비극이었다. 희방사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잿더미로 변하기 전에 이곳에는 중요한 유물들이 있었다.
전쟁 전 희방사의 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희방사는 예천 김룡사의 말사였던 것으로 일제 강점기의 자료에서 확인된다.
당시 자료를 살펴보면 목조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상과 더불어 모두 4위의 불상이 있었으며, 소조나한상 27위, 불화 9폭, 조사탱 2폭, 반쟁(盤錚: 금고[金鼓]) 1개, 석탑 1기, 경판 364장, 경책(經冊)53권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가운데 조사탱 2폭 중 1폭의 주인공은 희방사 창건주인 두운대사로 보인다. 또한 경판 360여장은 『월인석보』,『훈민정음』,『묘법연화경』(1561년 판각) 등의 것으로 보인다.
이들 경판과 관련한 당시 신문 자료를 살펴보면 1929년 11월 14일자 중외일보에 당시 불교사의 편집원이었던 도진호 씨가 풍기면 희방사에서 『월인천강지곡』권 1,2 목판을 발견하고 이를 인경해 왔다는 것이다. 또한 기사 말미에는 『월인천강지곡』(1568년 판각)과 더불어 『오대진언집』,『칠대만법(七大萬法)』(1569년 판각),『영험록』,『부모은중경』(1592년 판각) 등의 경판이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훈민정음』목판은 비록 복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것이다.

1568년 판각된 월인천강지곡과 함께 있었던 훈민정음 판본.(국사편찬위 자료 사진)

1561년 판각된 묘법연화경 변상판화.

1568년 판각된 월인천강지곡.
그러나 이처럼 소중한 유물들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동아일보」 1952년 11월 12일자에 당시 연희대학교(현재 연세대학교) 민영규 교수의 기고문에 그 진상이 밝혀져 있다. 당시 기고문의 일부를 살펴보면,
연희대학교 민영규 교수, 문화재 보존문제가 시급함을 주장
1951년 1월 10일 영주군 풍기면 일대에 소개령이 내리자 그 부근에 있는 喜方寺 근처가 무인지경이 됨으로 인하여 그 사찰에 비장해둔 고귀한 문화재가 유실될까 염려한 영주군수는 이의 소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그 비용으로 금 10만 원을 경북도청에 공문으로 청구하였으나, 그 공문은 물위에 떠도는 浮草처럼 경북도청 내를 두루두루 돌아다니다가 아무 효과를 나타내지도 못한 채 다음해 1월 13일에 이르러 아차산에 있는 광흥사의 방화(6년 전 야소교 신자들의 소치)에 연달아 희방사 등의 회진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비장해 둔 月印釋譜 2집 1권과 그 판목 222장 등 15장 훈민정음 판목 400여 장 기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예술적 가치가 풍부한 불상 및 중요문화재가 거대한 사찰과 함께 한줌의 재로 화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로 봐서 그 때 소개비용 10만 원이라고 하면 당시의 시가에 의한 백미 7·8가마 값밖에 되지 않는 돈인데 그 금액만 있었다면 능히 안전지대에 옮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시한 경북 당국자들의 소치는 실로 가탄할 바이며, 특히 당시의 문교사회국장이었던 임병진씨는 마땅히 이에 대한 총책임을 지고 선처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오불관의 태도를 취하여 마침내 막대한 국보의 소실을 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또한 희방사 일대의 길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석불은 무지각 한국군 사병들의 사격목표가 되어 한 놈의 수십 발의 탄환을 받아 길이 2寸 이상이나 되는 상처를 무수히 내고, 심지어는 台石 위에 안치해 둔 돌부처를 꺼내려다가 두부를 떼어 팽개쳐 버리고 또는 두 조각으로 잘라 내던지는 등 만행을 하여 우리의 지보인 문화재를 여지없이 파괴하고만 것에 대하여 근방 주민들의 원성은 자못 높다하여 군인들의 문화재에 대한 교양을 높이는 데 있어 금후 강력한 추진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다.
이 기고문의 내용대로라면 충분히 유물들을 피난시킬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소각했다는 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국군에 의해 죽령자락에 남아 있는 다수의 석불들이 사격용 표적지가 되어 총알받이로 파괴됐다는 사실은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이후 희방사는 1954년 봄부터 안대근 스님과 퇴경당 권상로 박사, 진호 안석연 스님, 백성욱 박사는 물론 순흥의 안경재 거사 등 신도들과 지역유지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큰 요사채와 대웅전, 영산전, 삼성각, 향로전, 응접실, 선방, 공수방, 범종각 등 10여동의 건물을 다시 지었다. 또한 신도들의 편안한 왕래를 위해 영주의 유지였던 이종순 거사가 통행로를 개설하고, 이듬해인 1955년 진입로를 확장하였다. 이러한 중수 내용은 1976년 안호상 박사가 지은 ‘희방사 중수 사적비’에 전하고 있다.

희방사 중수 사적비

퇴경당 권상로 박사가 쓴 희방사 현판.
희방사의 유물
-.경북도유형문화재 제226호 희방사 동종.
희방사에는 한국전쟁 통에 남아 있던 모든 문화유산이 소실되어 현재는 단 한 점의 유물만이 남아 있다. 물론 경내 인근에 석조 부도 2기가 있지만 그것은 예외로 두겠다.
희방사 동종은 본래 충북 단양 황정산 대흥사에 있던 것으로 명문에 따르면 ‘1742년 5월에 제작된 것으로 그 무게는 300근이다. 이를 제작한 종장(鍾匠)으로는 해철(海哲), 초부(楚符)스님’ 등이며, 이 종의 높이는 약 85㎝ 정도이다.

경북도유형문화재 제226호 희방사 동종과 세부 도상과 명문.
단양 대흥사에 있던 종이 언제 이 희방사로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종에 남아 있는 명문을 통해 대략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이 종에는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의 장수를 축원하는 명문이 남아 있는데, 이 명문이 작성된 시기가 1899년이다. 단양 대흥사는 창건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통도사 창건시기인 7세기 중반에 절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폐사 시기는 1876년께 화재로 절이 모두 불타고 나서 경내에 남아 있던 오백나한상을 금강산 유점사에서 이운해갔다는 얘기가 전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대흥사가 불에 타 사라진 빈터에 남아 있던 종을 1899년에 희방사로 가져간 것이다. 또한 이 종에 영친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명문이 남아 있는 까닭은 1899년에는 해운 보선(海雲 寶璿) 스님이 서울 봉은사를 왕래하며 시주를 받아 요사채 등을 중수할 당시 궁궐의 상궁들로부터의 시주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