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창성 철학 에세이] 10. 타자의 배제- The Exclusion of the Other -

“불교적 삶의 목적은 욕망과 고뇌의 불길을 꺼트림으로써 불행해지지 않는 것”

 홍창성 교수의 이번 원고는 사실 4월 두 번째 에세이였다. 그러나 이미 5월로 접어들었으니, 며칠 늦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 번에 기고한 <대승불교형이상학: 비판불교를 넘어서>가 발표된 후 홍 교수의 글에 계속 댓글이 붙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 교수는 수준 높은 댓글을 통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새 에세이를 연재하면 그 논의가 중단될 것 같아서 며칠 더 기다렸다고 전해왔다. 댓글들이 지금 현재도 계속 올라오고 있다. 그러나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새 에세이를 기고한다고 홍 교수는 밝혔다.
그럼 이번 에세이에 대해 언급해보기로 하자. 이 원고는 홍창성 교수가 집필하고 있는 ‘Buddhism for Thinkers(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라는 책의 한 챕터이다. 이 챕터는 1년 반 전에 써 놓은 것인데 며칠 전 반쯤 한글로 번역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학기가 홍 교수보다 먼저 끝나 시간이 조금 더 있는 유선경 교수(홍 교수의 부인)가 번역을 해주었다.
지난 번 <대승불교형이상학>에서 전개한 홍 교수 논지의 Prequel(전편) 같은 논의가 많은데, 독자들이 <대승불교형이상학>에 관심을 많이 보여 그 논의의 철학적 배경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이번에 번역해서 <미디어붓다>에 보내온 것이다.
이번 원고는 200자 원고지로 100매에 이르는 장문의 글이다. 홍 교수는 <미디어붓다>의 독자들이 <대승불교형이상학>을 기대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고 토론에 임해 주어서 좀 고무되어 같은 주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더 상세한 논의를 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해 이 원고를 이번의 에세이로 선택했다고 밝혔다. 독자와 대화하고, 독자의 반응을 세심히 살피며, 그 과정에서 가장 적합한 에세이를 보내주시는 홍창성 교수에게 독자를 대신해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편집자

타자(他者)의 배제(排除)
- The Exclusion of the Other -

대학에는 의자들이 많다. 각각의 의자들은 쇠, 플라스틱, 나무, 천, 또는 이 여러 물질들을 조합해서 만든다. 이 의자들은 여러 재미있는 모양도 가지고 있다 – 어떤 것들은 둥글 넙적하고, 다른 것들은 네모나고 다리가 길기도 하다. 또 의자들은 색깔도 다르다. 재료, 모양, 그리고 색깔이 무척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인지 그 모두가 의자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모두 의자라고 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 상이한 물체들이 어떻게 모두 ‘의자’라는 하나의 종류(kind)에 속할까? 또 우리는 어떻게 이 다양한 물체들을 모두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흥미로운 현상은 우리 일상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의자들, 펜들, 엔진들, 계산기들, 개들, 고양이들, 사람들, 그리고 다른 무수히 많은 대상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인지는 몰라도 모두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라고 여겨진다.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보편자(universal)’의 개념을 도입해서 종(種 kind)의 존재를 설명하려 했다. 서구에서는 플라톤이 형상(form, 이데아)의 개념으로 여러 물체들이 공통된 특성을 보이는 것을 설명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형상들은 천상(天上)에 존재하는 보편자들이다. 여기 강의실의 이 의자는 천상(天上)에 존재하는 보편자인 의자의 형상을 나눠가져서(分有) 의자다. 다른 의자들도 의자의 형상을 나눠가져서 그 형상의 복제품(replica)이 되기 때문에 의자다. 의자들, 펜들, 개들, 사람들 등과 같은 다른 모든 물체들도 마찬가지다. 형이상학자들은 이렇게 극히 다양한 물체들이 예를 들어 모두 같은 종류인 ‘의자(chair)’에 속하게 된다는 신기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의자임(chair-ness)’이라는 보편자의 개념을 사용했다. 의자들은 같은 보편자인 ‘의자임’을 공유하고, 우리는 그 보편자의 존재를 쉽게 확인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모두 의자라고 알아보게 된다.
 
보편자는 한 장소 이상에 동시에 예화(例化)되어 존재할 수 있는 대상(entity)으로 정의(定義)된다. 빨강은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 지금 현재 이 시각에도 빨강은 불자동차의 표면에, 여배우들의 입술에, 부상당한 병사들이 흘리는 피에, 어떤 꽃들 등등에 모두 존재한다. 암소를 기르는 축사에 가 보면 “암소”라고 부르는 많은 동물들을 보게 된다. 그것들이 모두 암소들인 이유는 ‘암소임(cow-ness)’이라는 보편자가 그들 모두에 예화되어 현재 이 시각에 그곳들 모두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들은 모두 ‘자동차임(car-ness)’인 보편자를 현재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동차들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다양한 의자들이 공통으로 실재(實在)하는 무엇인가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모두 같은 종류(種類)에 속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보편자 실재론(the realism of universals)은 철학사의 오랜 기간 동안 유력한 견해였다. 그러나 이 견해는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빨강, 의자임, 그리고 암소임과 같은 보편자들은 추상적인(abstract) 대상들(entities)이다. 그래서 그것들은 시공(時空)에 제약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체들(objects)은 시공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하여 ‘만질 수 있는’ 개별자들(particulars)이다. 그렇다면 이런 추상적인 보편자들이 시공 속에 있는 개별자들 안으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보편자는 대상들에 예화된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예화(instantiation)라는 관계 자체가 무엇인가이다. 이 ‘예화’의 속성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없다. 또 이 예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한소급의 문제도 있다. 어떤 대상에 보편자가 예화(예화#1)되는 것은 이 예화를 존재하게 해 주는 예화의 보편자가 이 경우에 예화(예화#2)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예화#2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예화의 보편자가 예화(예화#3)되어야 한다. 이렇게 무한소급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무한소급이 생겨나는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
 
또 하나 잘 알려진 문제는 보편자 실재론(實在論 realism)이 가져오는 존재세계의 과밀화(crowdedness) 이슈이다. 실재론자들이 그들의 존재론에 보편자들을 더한다면 그들의 존재론은 개별자들 이외에 추가로 많은 대상들을 갖게 된다. 보편자는 대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있는 술어들(predicates)을 통해 그 존재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빨강,” “둥근,” “네모난,” “무거운,” “가벼운” 등과 같은 술어들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실재론자들은 각각의 술어에 상응하는 보편자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나의 술어에 하나의 보편자가 존재한다고 상정하면 실재론자들의 존재세계에는 술어들의 수만큼 보편자들이 있게 된다. 보편자 실재론은 벌써부터 사유와 존재의 경제성의 원리에 어긋나 보인다. 실은 이 과밀화 문제는 생각보다도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고’를 이용해 무수히 많은 새 술어들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빨갛고 둥근,” “빨갛고 네모만,” “빨갛고 별모양의,” “빨갛고 둥글고 무거운,” “빨갛고 둥글고 반짝이는“ 등등. 이런 술어들에 상응하는 대상으로서의 무수히 많은 보편자들이 실재론자들의 존재세계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우리의 존재론은, 세계에 대해 동일한 설명력을 가지는 한, 가벼울수록 즉 적은 수의 대상들만을 상정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유명론자(唯名論者 Nominalist)들은 보편자들을 도입하지 않고서도 존재론을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보편자들이란 실은 우리가 대상들을 집합으로 나누기 위해 사용하는 편리한 술어들(predicates) 또는 이름들(names)일 뿐이다. 그래서 유명론자들은 보편자 실재론자들이 이런 술어들이 존재세계에 그 지시체를 가져야만 하고 또 그 지시체들은 추상적이지만 실재하는 대상들(real entities)이라고 보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유명론자들은 그런 보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개별자들을 구별지어주는 술어들(이름들)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견해가 유명론(唯名論)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이다. 유명론자들이 그들의 존재론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개별자들뿐이다. 술어들은 단지 이름들이기 때문에 존재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들의 수를 늘리지 않는다. 또 그들의 존재론에 보편자가 없기 때문에 유명론에는 예화(instantiation)의 문제도 없다. 유명론자들에게는 이 세상에 예화되어야 할 추상적인 존재자란 없다.
 
유명론자들이 위에서 지적한 것들과 같은 보편자 실재론이 직면한 난해한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명론이 가진 고유한 문제점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명론의 가장 큰 약점은 그것이 우리가 의자들, 빨간 물체들, 둥근 것들과 같이 각각 다양한 사물들을 어떻게 쉽게 구별해 집합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각각의 그룹 안에 속한 사물들이 아무런 공통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물들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하나의 그룹으로 분류되고, 우리는 또 그것들을 어떻게 하나의 공통된 이름(보통명사)으로 부를 수 있나?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술어를 만들어 내지 않고, 또 사물들을 임의로 함께 집합으로 만들어 하나의 술어 아래 귀속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 반대로 어떤 그룹에 속하는 모든 사물들에 실재하는 공통된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사물이 한 그룹에 속한다고 직관적으로 믿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런 직관을 포기할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보편자 실재론자들은 사물들 간의 공통된 속성을 가능케 하는 보편자를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우리의 직관을 설명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유명론적이다. 예를 들어 남방 아비달마계통 전통은 존재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다르마(dharma)를 속성개별자(property particular) 또는 트롭(trope)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보편자는 속성유형(property type)이므로 아비달마 전통은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당신이 검정구두를 신고 있다면, 여기에는 검정이 둘 있다: 왼쪽 구두의 검정과 오른쪽 구두의 검정이 그것들이다. 이 두 검정들은 각각 개별적인 존재자들(entities)이다. 그들은 다르마 또는 트롭으로서 구분되는 개별자들로 아무런 보편자도 공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통점도 없는 이 두 개별적인 존재자들을 어떻게 검정이라 부르며, 어떻게 이들이 같은 색으로 한 그룹에 속하는가? 서양의 유명론자들은 이런 것들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 그냥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해오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개별적인 검정 반점들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하나의 종(種)인 그룹으로 자연스럽게 구분되고, “검정”이라는 개념이나 술어로 분류된다. 이것은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자연의 당연한 사실(brute fact of the nature)이다.
 
그런데 어떤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한다고 강요하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보편자 실재론자들 그 누구도 이런 주장에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 유명론자들은 같은 술어로 표현되는 사물들 사이에 언뜻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공통된 특성들을 설명하는 또는 설명해서 그런 것이 없음을 보여 주는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본고에서 나는 불교 유명론자들이 어떻게 보편자 실재론자들의 주장을 비판하며 유명론 일반을 옹호하고 보강하는지 보이겠다. (속성개별자들인 다르마를 포함해 여느 존재자들의 내재적 본성을 부정하고 모든 사물들이 공(空)하다고 주장하는 대승불자들은 당연히 모든 사물에 들어있다는 보편자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부 불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궁극의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언어의 유용성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현대 분석 형이상학과 심리철학의 논의들이 불교 유명론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의 논의들을 가지고 고대 불교 유명론을 재구성해 보겠다.
 
제반의 유명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불교 유명론자들도 보편자들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대신에 개별자들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불교 유명론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존재세계가 보편자 실재론자들이 생각하는 존재세계보다 단순하고 대상들의 수가 많지 않아 이런 ‘가벼운(lighter)’ 존재론으로 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존재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먼저 모든 보편자들이 그것들의 고유한 대상을 가리키는 일차 속성들(first-order properties)이 아니라 이러한 일차 속성들의 집합에 대한 이차 속성들(second-order properties)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속성들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통해 모든 보편자들이 실제로는 논리적으로 산출된 이차 개념 (second-order concepts) 또는 편리한 지시어(convenient designators) 즉 이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보이겠다. 또한 지금껏 유명론자들을 괴롭혔던 ‘개별자들이 어떻게 하나의 그룹에 속하며’ 또 이런 ‘개별자들이 어떻게 하나의 동일한 술어(이름)로 불리어지나’ 하는 문제들을 설명해서 이것들이 실은 유명론에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이겠다.
 
다음은 보편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 유명론의 논증이다. (이 논증은 마크 시더리츠 교수의 2007년 저서 『철학으로의 불교(Buddhism as Philosophy)』에 있는 불교 유명론 논증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밑에서 곧 이 논증을 한 줄씩 설명하겠다:

1. 보편자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영원하다.
2. 영원한 것들은 불변할 것이다.
3. 실재한다(real)는 것은 인과적으로 효력이 있다(causally efficacious)는 것이다.  
4. 인과적으로 효력이 있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순간에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다. 
5. 불변하는 것이 다른 순간은 아니고 어떤 특정한 순간에만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6. 따라서 영원한 어떤 것도 인과적으로 효력이 없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보편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보편자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삼각형, 숫자, 빨강, 노랑, 암소를 암소이게 하는 ‘암소임(cow-ness),’ 의자를 의자이게 하는 ‘의자임(chair-ness)’등과 같이 추상적이고 실재하는 대상들이다. 세모난 사물들, 빨강 반점들, 암소들, 의자들과 같이 이러한 보편자들이 예화된다고 하는 장소들인 개별적 대상들은 오직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만 존재한다. 반면에 보편자들은 어떤 특정한 물리적 공간이나 시간에 제한 받지 않고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보편자들은 시공에 구속되지 않는 추상적 존재자들이다. 보편자들의 존재는 시간에 제한 받지 않기에, 만약 보편자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영원하다. 만약 변한다면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자들은 불변한다. 예를 들어 만약 삼각형의 보편자가 변하여 사각형의 보편자가 된다면 삼각형의 보편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 영원하지 않게 된다.
 
위의 3에서 말한 “실재하는 것은 인과적으로 효력이 있다는 것”이라는 견해에는 많은 현대 철학자들도 동의한다. 어떤 것이 실재하기 위해서는 인과적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즉 어떤 효과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결과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 존재세계에서 아무런 인과적 역할도 할 수 없어서 제거되어야 할 부담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이러한 요소는 우리의 존재세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실재한다는 것은 인과적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과관계란 개별자들 간의 관계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우연적(contingent) 관계이다. 그래서 인과적 결과는 어떤 특별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에서 산출된다.
 
만약 보편자가 있다면 영원불변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영원히 불변한 것이 만약 실재하고 인과적으로 효력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순간이 아닌 어떤 한 순간에만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시공의 제한을 받는 개별자인 암석은 암석으로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인과적 효력을 발휘한다. 암석의 인과적 효력이란 예를 들어 그것이 어떤 표면을 그것이 가진 무게로 누르거나, 던지면 유리를 깨거나,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있을 수도 있었을 다른 사물들을 그것 밖으로 밀어 내거나, 일정 범위의 전자파를 반사하는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암석이 부서진다면 그 암석의 인과적 효력은 사라지고 그와 함께 암석의 존재도 사라진다. 그러나 만약 영원불변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과적 효력을 끊임없이 발휘하며 영원토록 쉼 없이 결과를 산출해야만 한다. 그러나 물론 이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영원불변한 것이 어떤 효과도 만들어 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경우에는 영원불변한 것의 인과적 효력과 함께 그것의 존재자체가 부정된다. 이런 이유들로 우리는 영원한 어떤 것도 인과적 효력이 없다고 받아들여야한다. 따라서 실재하는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보편자는 없다. 이것이 보편자들의 존재를 반대하는 불교유명론 논증의 결론이다.
 
이런 불교유명론은 6세기 인도에서 발달한 아포아론(Apoha theory)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아포아(aphoa)’란 ‘타자의 배제(the exclusion of the other)’를 뜻한다. 불교유명론자들은 보편자를 상정하지 않고도 아포아의 개념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사물들을 인지하고 같은 술어(이름)를 갖는 사물들로 분류하는지 설명했다. 다음의 예는 우리가 불교유명론과 아포아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음악교육이 어린이들 지능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수십 년간 이야기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실망스럽게도 조기음악교육과 어린이들의 지능발달이 서로 별 상관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음악의 무엇이 유익하고 좋아서 부모들이 자식들을 어린 나이부터 음악공부를 시키는가? 음악의 본질적인 장점은 무엇인가? 음악의 본질(essence)은 무엇인가? 이것은 근본적으로 음악의 본질을 이루는 보편자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다. 답하기 쉽지 않다.
 
나의 14살 쌍둥이 딸들은 지난 수년간 악기를 배우고 있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음악공부를 시작할 때 위와 같은 질문을 했었다. 음악의 사전적 정의는 만족스럽지 않았고 조기음악교육의 혜택에 대한 과학적 보고는 온전히 믿을만하지 못했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었다. 우리는 마침내 평범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전적으로 낯설지도 않은 방법으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음악교육이 근본적으로 뭐가 그리 좋은지 또 음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레슬링이나 요트 항해술 배우기, 또는 바비 인형 갖고 놀기보다 음악교육이 어린 아이들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은 알았다. 우리는 이렇게 가능한 선택지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것이 바로 음악교육이었다. 우리 딸들에게 음악교육이 여느 가능한 특별활동보다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음악교육을 선택했다. 다른 많은 예들도 있다. 아이들에 따라서는 미술교육, 수학교육, 그리고 언어교육이 똑같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 음악의 본질을 규명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여러 가능한 다른 선택지들을 제외하고 남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가 시도한 방법은 우연히도 불교유명론자들이 꾀한 방법과 매우 흡사했다. 이제 주제를 의자로 바꿔 이야기를 풀어보면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의자”라 부르는 수없이 많은 사물들이 있다. 이들은 나무, 플라스틱, 천, 쇠, 얼음 등 제각기 다른 물질로 만들어져있다. 의자들의 모양과 색깔도 제각각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이지 이 사물들은 모두 의자이다. 그렇다면 이 의자들이 지닌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 모든 각각의 의자가 공유하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만질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람들은 의자의 기능(function)이 모든 의자가 공유하는 그 어떤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물이 의자의 기능을 하고 있는 한 그 사물은 의자라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기능은 오랫동안 보편자로 여겨져 왔다. 만약 기능이 보편자의 한 종류라면 우리가 위에서 토론한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유명론자들의 논증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의자들이 공유하는 것은 결국 “의자”라는 이름뿐이란 말이다. 우리는 “의자”라고 불리는 모든 물체들에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어떤 실재하는 것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이 역사상 존재하던 모든 유명론자들이 직면했던 바로 그 문제인 것 같다: 어떻게 각각의 다양한 의자들이 의자라는 하나의 집합으로 구분지어지고 이 모든 사물들이 “의자”라 불리는가? 
 
고대 불교유명론자들의 견해인 아포아론으로 유명론을 곤경에 빠뜨렸던 위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내가 위에서 말한 어린이들의 조기 음악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상기해보자. 나는 음악이 무엇인지 음악교육이 어떻게 유익한지 몰랐지만, 다른 모든 가능한 특별활동들을 배제한 후에 남은 것이 음악교육임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음악교육을 선택한 이유였다. 이와 비슷하게 불교유명론자들은 아포아론에 근거하여 의자에 관한 질문들에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사물들이 의자라는 하나의 집합으로 구분지어지는 이유는 그 사물들이 모두 의자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they are all not non-chairs). 여기서는 의자들이 가지는 어떤 공통된 본성이나 의자의 보편자의 존재가 고려되지 않았다. 아포아론은 이것들을 상정하지 않는다. 의자가 아닌 사물들을 배제한 후 남은 사물들이 의자들이라는 하나의 그룹을 형성한다. ‘의자임(chair-ness)’이라는 보편자가 없어도 이 모든 다양한 사물들이 어떻게 한 집합으로 구분지어져 “의자”라고 불리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불교유명론의 답은 타자의 배제(the exclusion of the other, 아포아)이다. 동일한 철학적 논점이 책상들, 펜들, 엔진들 같은 인공물 종류뿐만 아니라 암소들, 레몬들, 나무들, 금(gold) 등 자연종들에도 적용된다. 암소들은 암소가 아닌 것이 아니기에 암소의 집합이 되고, 금은 그것이 아닌 것이 아니기에 금이다.
 
타자의 배제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는 유명론 전통 전반에 걸쳐 불교가 기여한 중요한 공로가 될 것이다. 개별자들이 하나의 그룹으로 구분되고, 우리가 그 각각의 집합을 의자들, 암소들, 금과 같이 하나의 공통된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을 설명하기위해 유명론자들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없이 당연한 사실(brute fact)’을 거론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불자들은 유명론자들에게 훨씬 좋은 답을 줄 수 있다: 수없이 다양한 사물들이 어떤 하나의 집합에 속하는 것은 비록 그것들이 공통된 보편자를 공유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똑같이 다른 것들을 배제한다. ‘사람’은 사람이 아닌 존재자들을 사람의 집합에서 제외하기에 ‘사람’은 하나의 사람의 그룹을 형성한다. 암석이 모두 “암석”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것들이 모두 암석이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자동차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자동차이다.
 
아마도 어떤 독자들은 이러한 불교유명론자들의 설명에 논리적 흠이 있다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의자의 집합이 공유하는 공통의 본성인 보편자를 상정하지 않고서 어떻게 의자의 집합에서 의자가 아닌 것들을 모두 배제할 수 있는가? 불교유명론의 논지는 순환논법의 오류를 범하는 것 아닌가? 불교유명론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하나인 다르마키르티(Dharmakirti)는 우리가 어떻게 사물들을 구분하는지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사물들이 하나의 집합을 구성한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앉을 수 있는 가구들을 원한다. 이러한 편한 물건들을 원하는 우리의 욕구가 그 욕구에 부응하는 물건들을 만들게 한다. 우리는 여러 다양한 모양을 생각해 보고 이런 물건들을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재료들을 시장 조사한 후 재료를 정하고 그 재료들을 이용해 여러 모양의 가구들을 만든다. 우리는 이렇게 목적을 가지고 제작한 물건들의 집합체를 명칭하기 위해 그것들을 “의자들”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제 위에서 살펴본 보편자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유명론자들의 논지처럼 우리들도 이 모든 가구들을 의자로 만드는 그 어떤 보편자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 필요를 만족시키는 이 물건들을 여전히 사용한다. 어쨌든 우리는 앉을 수 있는 가구를 원하니까. 의자가 아닌 물건들은 우리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자들의 집합에서 의자가 아닌 것들을 배제하는 이유이며 방법이다. 타자의 배제는 집합이 공유하는 보편자의 상정 없이 모든 집합에 적용시킬 수 있다. 타자의 배제의 이러한 점이 자연종이나 인공물종류 모두를 포함한 모든 사물에 적용된다고 불교 유명론자들을 주장한다.
       
주어진 그룹의 모든 물체들을 의자라는 같은 종류(kind)로 만드는 것은 본질적 속성(보편자인 본질)이 아니다. 그런 보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물체들이 가진 효용성–우리의 욕구가 만들어 내는 효용성–이 그것들을 그룹지어 가구의 한 ‘종류’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와 욕구로 만들어지는 이런 ‘종류’는 불교도들에게는 우리 존재세계에 존재하는 실재적 대상이 아니라 단지 환(幻 환상 illusion)에 불과하다. 이러한 불교 유명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우리가 “의자”라고 부르는 저 나무로 된 물체들은 우리가 그 위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의자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추운 겨울에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그것들을 화로에 집어 던져 태운다면 그것들은 단지 가연성 물질들(combustible materials)로 이용되게 된다. 즉 장작이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수백 개 모아서 나무로 된 집을 지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들은 건축자재가 된다. 범죄자들이 사람을 해칠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그것들은 또 무기로도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용도로 쓰일 수 있다. 같은 물체들을 그 수많은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욕구, 필요, 그리고 실용적 관심사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용적 목적이 존재세계에 보편자들을 창조해 내는 것은 아니다. 만약 계속 늘어나기만 하는 우리의 실용적 욕구가 새로운 보편자들을 끊임없이 창조해 낸다면 우리의 존재세계는 극도로 과밀해질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고대 인도의 두 학자들인 디나가(Dinnaga)와 다르마키르티(Dharmakirti)의 견해를 충실히 따르면서 불교 유명론과 그 장점들을 논해 왔다. 이제 나는 현대 분석형이상학과 심리철학에 주의를 돌려 불교 유명론을 재해석하고 지원해 줄 현대판 유명론을 찾아보겠다. 나는 김재권 교수가 제안은 했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해 유용한 방식으로 발전시키지는 않았던 속성유형(보편자)에 대한 이차 개념적 접근방식을 시도해 보겠다. 그래서 모든 속성유형(보편자)이 실은 단지 개념 또는 편리한 지시어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렇게 이해되고 취급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이겠다. 보편자인 이차 속성들에 대한 김재권 교수의 분석은 우리가 종(種 kind)을 구성하고 보편자에 대한 환상을 형성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보편자라는 환상을 해체시켜 준다. 이제 불교 유명론은 이러한 현대적 방법론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는 단지 개별자들이 모인 그룹들일 뿐이고 각각의 개별자들은 주어진 그룹의 다른 구성요소들과 아무런 공통된 본질적 속성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 이런 점들을 차례로 논의하겠다.
 
김재권 교수의 속성유형(보편자)에 대한 이차적 접근방식을 소개하고 그것을 불교유명론을 위한 논증으로 전환시켜 보겠다. D를 일차 속성들의 도메인(영역)이라고 하자. 우리는 이차 속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F는 D에 대해 이차 속성이다 = (정의) F는 D안에 있는 어떤 속성 P를 가지는 속성이다. 이때 S(P)여야 하는데, S는 D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세부명시사항이다.

화가들에게 있어서 원색이라는 속성은 {빨강, 노랑, 파랑}이라는 일차 속성들의 집합에 대한 이차 속성이다. 이 주어진 도메인(영역)에 있는 세 색깔들 가운데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 원색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원색들이란 그것들을 섞어서 다른 어떤 색깔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다른 어떤 색깔들을 섞어서도 이 원색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명시된다.
 
열(熱 heat), 의자임, 엔진임 등과 같은 기능적(functional) 속성들은 세부설명사항인 S가 인과적/법칙적 역할을 기술하는 경우로 기능적 속성들은 이차 속성들의 부분집합을 이룬다:

F는 D에 대한 기능적 속성이다 = (정의) F는 D의 구성요소들과 관련된 인과적/법칙적 관계를 명시하는 세부명시사항 S에 의해 정의된 D에 대한 이차 속성이다.

열은 {분자 운동, 방사능, 칼로릭, ...} 등과 같은 일차 속성들의 도메인에 대해 정의된 기능적 속성이다. 어떤 것, 어떤 현상, 또는 어떤 사건이 열의 기능을 수행하는 한, 즉 그것이 얼음을 녹이고 몸을 따뜻하게 하며 아프리카에 가뭄을 가져 오는 등의 일을 하면 그것은 열이라고 명시된다.
 
김재권 교수는 이차 (기능적) 속성의 본성에 대해 불교유명론을 위해서 무척 유용하지만 서양철학자들에게는 생소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김재권 교수는 이차 (기능적) 속성 같은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차 기능적 속성이란 실제로는 우리가 주어진 일차 속성들의 집합에서 어떤 물리적 속성을 골라내기 위해 사용하는 이차 기능적 개념, 단어, 또는 지시어라는 것이다. 김재권 교수의 기능적 ‘개념’에 대한 견해는 다름과 같은 논증에 기반하고 있다. 어떤 것이 이차 기능적 속성 M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주어진 도메인 안에서 M의 인과적 역할을 수행하는 어떤 일차적 속성을 갖는다는 것을, 즉 M을 정의하는 어떤 인과적 세부명시사항을 충족시키는 어떤 속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떤 새로운 속성(보편자!)을 존재세계에 불러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어진 속성들의 도메인에 대해 어떤 단순한 논리적 작업을 가함으로써 우리의 존재세계를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M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M을 예화 또는 실현시키는 M의 일차 속성들 가운데 하나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M을 실현시키는 속성들 가운데 하나가 있다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사실은 없다. 그래서 M 자체를 그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자로서의 속성(property)으로서 생각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차 속성을 말하기보다는 (일차) 속성들에 대한 이차 지시어 또는 이차 개념으로 바꾸어 논해야 한다.    
 
아쉽게도 김재권 교수는 스스로의 견해를 유명론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암시만하고 원래 자신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보편자 실재론의 입장으로 돌아간다. 김재권 교수는 위의 논의를 전개할 때 유명론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김재권 교수의 흥미로운 견해를 유명론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유명론이 이차 지시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속성들의 집합뿐 아니라) 개별적 대상들의 집합 사이에 관한 관계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의자’라는 이차 지시어 또는 개념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의자들을 골라내어 준다. 이 지시어는 내 강의실의 평범한 의자 하나하나 모두를, 서양 궁전 안에 있는 호화스러운 가죽 의자들을, 커피전문점 안의 천으로 된 둥근 의자들을, 그리고 북극 지방의 얼음으로 된 의자들 등을 골라내어 지시하는데 사용된다. 이차 개념 또는 지시어는 대단히 이질적인 대상들을 적절한 경우에 적절히 골라내는 편리한 도구로 사용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되는 대상들은 그것들이 같은 지시어로 선택되는데 실패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실재적(實在的 real)인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 동일한 철학적 관점이 책상, 엔진, 학생, 펜, 날개 등등과 같은 다른 모든 이차 개념 또는 지시어들에도 해당된다. 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이차 (기능적) 속성을 개념으로 이해하려 했던 김재권 교수의 논증을 거부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특칭양화(existential quantification)라는 단순한 논리적 작업으로 새로운 속성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한다면 보편자가 될 이차 속성은 실제로는 우리 일상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단지 편리한 도구인 이차 개념, 이차 지시어, 또는 어떤 언어적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개념이나 지시어는 그 자체로 인과적 효력이 없기 때문에 존재세계에는 그것들이 있을 자리가 없다.
 
몇 가지 예를 들며 내가 발전시킨 김재권 교수의 견해가 불교유명론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며 나아가 더 강화시켜 줄 수 있음을 보이겠다.
 
1. 어떤 사람이 스코틀랜드인 하나를 안다고는 말하지만 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아는 스코틀랜드인은 윌리암 월리스, 로버트 브루스, 또는 숀 코너리일 수 있겠다. “스코틀랜드인”이라는 표현은 말하는 이가 그 스코틀랜드인이 이 셋 가운데 누구인지 모르거나 또는 그의 이름을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을 때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단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스코틀랜드인이 위의 세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그룹과는 떨어져 따로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스코틀랜드인”은 그 세 사람 가운데 하나를 골라주는 이차 단어 또는 편리한 이차 지시어다.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지시어는 이 세상에 새로운 대상을 가져오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관심과 인지적 한계에 따라 경험을 구성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필요를 충족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차 단어들을 만들어 쓰게 된다.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이차 단어는 우리 일상의 목적을 위해 주어진 범위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을 편리하게 골라내어 준다. 이 단어는 우리의 실용적 요구를 수행함으로써 그 유용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종류(kind)를 나타내는 단어들의 존재가 보편자들도 어떻게든 존재해야만 한다는 증거라며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불교유명론자들의 논증을 살펴보았고 따라서 이제 이런 흔한 오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윌리암 월리스, 로버트 브루스, 그리고 숀 코너리 세 사람이 모두 비(非)스코틀랜드인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그룹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
 
2. 이제 우리의 현재 유명론 논의에 더 적합한 다른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화가들에게는 빨강, 파랑, 그리고 노랑이 원색들(primary colors)이다. 이 세 색깔의 그룹과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원색이 존재하는가? 그럴 수 없다. 원색은 어떤 주어진 경우에 이 세 색깔의 하나를 지시해 주는 이차 단어 또는 편리한 지칭어다. 우리의 존재론은 이 세 색깔과 떨어져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보편자로서의 ‘원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이 결론이 논증의 마지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또 이 세 원색들 각각도, 예를 들어 빨강도 각각의 주어진 경우에 빨강의 일차 속성들인 핑크, 자주, 진홍, 주황 등과 같은 빨강의 여러 다른 색채들(shades)을 골라주는 이차 단어들로 이해되어야 함을 주목해야 한다. 빨강을 갖는다는 것은 이런 빨강의 색채들 가운데 하나를 갖는다는 것이고, “빨강”이라는 단어는 각 경우에 빨강의 여러 다른 색채들 가운데 하나를 편리하게 골라준다. 간단히 말해, “빨강” 또한 이차 지시어 또는 사용하기에 편리한 도구이다. 빨강은 그 스스로 존재하는 보편자가 아니다. 이제 나는 이 결론 또한 논증의 마지막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핑크, 자주, 진홍, 주황 등의 각각도 그 스스로의 일차 토대 속성들을 고려해 보면 이번에는 그 단어들도 또한 모두 이차 단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상위와 하위 차원의 속성유형들(보편자들) 사이에서 계속 하위로 내려가게 되는 과정이 지속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보편자가 실제로는 단순히 이차 단어 또는 이름일 뿐임을 명확히 말해 준다; 보편자는 세계에 존재하면서 인과적 변화를 만들어 내는 실재하는 대상들(real entities)이 아니다. 결국 우리의 존재론(존재세계)에는 단지 개별자들만이 남게 된다.
 
3. 여러 다른 종류의 약초들이 체온을 떨어뜨릴 수 있고 이들 모두가 해열제라고 불린다. 이 약초들 모두가 열을 내리려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이 다양한 약초들에 모두 해열제라는 같은 이름(이차 단어)을 쓰는 것이 편리하다. 타일레놀과 애드빌은 다른 종류의 화학물질로 만들어져 있지만 둘 다 진통제로 사용된다. 다양한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여러 수면제가 사람들을 졸음에 빠지게 하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수면제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점을 보여주는 많은 다른 예를 들 수 있다. 우리의 관심사에 따라 사물들을 그룹 짓고, 각 그룹에 이름을 붙이며, 그리고는 그 이름에 상응하는 보편자가 세상에 존재해야만 한다고 잘못 믿게 되는 것은 우리가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오래된 습관의 하나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논의로부터 분명하겠지만, 해열제, 진통제, 그리고 수면제라는 말들은 모두 존재세계에 그것들에 상응하는 보편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단지 이차 단어 또는 편리한 지시어로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예를 들어 모든 다양한 해열제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단지 그것들이 체온을 떨어뜨리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점뿐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한다. 체온 내림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부다. 그것들을 모두 해열제이게끔 해 주는 어떤 보편자 – 어떤 더 이상의 공통된 특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편리한 지시어이지 보편자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위에서 불교 유명론의 정신을 그것 원래의 고대적 형태로서 뿐만 아니라 현대적 버전)으로도 살피고 경험해 보았다. 이제 불교 유명론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철학적 교훈과 지혜로 우리 논의를 마무리하자. 첫째, 불교 유명론이 주는 통찰을 이용하면 열반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불교도들은 열반을 추구한다. 열반은 불자들의 모든 연구, 도덕 행위, 그리고 선정 수행의 궁극적 목표다. 그런데 열반이란 무엇인가? 널리 받아들여진 정의(定義)에 따르자면, 열반은 모든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이다. 이 열반의 개념은 바로 불교 유명론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열반은 모든 고뇌가 제거된 상태이다; 그것은 부정적(否定的 negative) 속성을 가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열반은 열락(悅樂 blissful joy) 같은 긍정적(肯定的 positive) 속성이 우세하게 존재하는 어떤 상태가 아니다. 혹자들이 열반을 성취함으로써 열락을 경험하고 또 그 열락의 상태에 계속 머무르는 것에 유혹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열반 획득을 위해 가지기도 하는 잘못된 동기이다. 경전들은 이렇게 심리적인 열락의 상태에 대한 오도된 욕구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욕구가 열반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열락의 상태들에 대한) 집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열반은 그 안에 존재한다는 어떤 긍정적인 속성으로도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 왜냐하면 열반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열반을 영원하고 불변한 어떤 상태 또는 실체로 표현하는 문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는 열반이 붓다의 무상(無常)의 가르침에 예외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단지 기술적으로만 옳다(only technically correct). 왜냐하면 열반은 영원한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불교에는 그런 것이 없다) 아무런 고뇌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반은 기술적으로는, 그러나 단지 기술적으로만,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반에 대한 이런 긍정적인 표현은 독자들을 오도해서 열반이 영원불변한 본질적 속성(자성)을 가진 어떤 것 또는 어떤 상태라고 잘못 믿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열반에 대한 근본적으로 비(非)불교적인 견해이다. 열반이 열반인 이유는 그것이 열락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것으로부터 모든 고뇌를 배제하기(exclude) 때문이다. 불교 유명론에 있어서의 타자의 배제라는 아포하론의 요점이 열반의 개념을 가장 선명히 설명해 준다. 그러나 물론 고뇌가 없다고 해서 다른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내 주장은 단지 고뇌가 배제된 다른 것들의 존재가 열반 개념의 요점이 아니라는 것일 뿐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서양인들의 행복에 대한 이해로 돌려서 그것을 불교 유명론의 관점 아래서 검토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철학적 근거 위에서 우리 삶의 궁극적 목표가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가능성의 실현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가능성이란 대체 어떤 가능성이고 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사람에 따라 또 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 따라 달리 주어져야 한다. 각각의 사람들이 가진 모두 다른 가능성을 실현하는 방법들은 지극히 다양할 텐데, 이 모든 방법들을 하나의 일반적인 법칙으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의 정의는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별로 없다. 또한 좋은 삶에 대한 불교적 관점으로부터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이라는 불분명한 목적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만들 수도 있어서 사람들에게 고뇌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주목되어야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열반을 이루려는 이상(理想)을 가진 불자들은 사람들에게 행복 얻기를 직접적 목적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불교적 삶의 목적은, 말하자면, 타는 욕망과 고뇌의 불길을 꺼트림으로써 불행해지지 않는 것이다(not to become unhappy). 이 목표는 어떤 긍정적인 것을 소유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탐(craving) 진(hatred) 치(ignorance)와 같은 부정적인 특성들을 제거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우리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면 이제 좋은 삶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시도해 볼 만하겠다: 좋은 삶이란 불행하지 않은 삶이다. 고뇌를 겪고 있지 않다면 불행하지 않다; 그러면, 행복하거나 또는 최소한 그냥 괜찮다. 이것이 좋은 삶을 위한 더 적합한 목표이고,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곧 행복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불교 유명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삶을 더 현명하게 사는 방법일 것이다.

*필자 홍창성 교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역자 유선경 교수는?
서울대학교 분자생물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듀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맨케이토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