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영주지역 불교문화유산 답사기’] 1. 연재를 시작하며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기 불교문화 이해의 폭 넓히는 이정표 기대”
미디어붓다는 4월 마지막 주부터 김태형 부석사박물관 학예사의 새 연재 [김태형 학예사의 ‘영주지역 불교 문화유산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김태형 학예사는 이미 미디어붓다를 통해 29회에 걸쳐 [김태형의 부석사 이야기] 연재를 통해 문화유산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통찰을 입증한 바 있습니다. 이번의 연재는 김태형 학예사가 부석사에서 그 외연을 넓혀 김태형의 눈으로 영주지역의 불교 문화유산 읽기에 나섭니다. 독자제현의 큰 관심과 열정적인 답사 동행을 기대합니다. 편집자
1.연재를 시작하며
부석사 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경북 영주에서 그것도 부석사에서 산중생활을 한지 어느덧 만 3년을 넘어서고 있다. 살아보면서 여러 도시에서 터전을 마련하고 살아보았지만 영주처럼 다양한 나의 지식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 좋은 곳은 없는 것 같다. 통일이 된 후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남한 땅의 동부와 동남부를 사통팔달도 오갈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利點)은 무척이나 큰 매력 포인트다.
동으로는 울진, 서로는 문경, 북으로는 단양·영월, 남으로는 안동, 의성 등등을 짧은 시간에 오갈 수 있다는 점은 지리적인 이점 중 하나요, 그 두 번째는 다양한 불교문화유산이 인근에 산재해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있는 부석사만 하더라도 이 주변에는 상당히 중요한 불교문화유산이 산재해 있어, 이 분야 연구자로서는 여러모로 중요한 지역이다.
이번에 새롭게 연재를 시작할 영주지역 불교문화유산 답사는 필자가 이미 1차 답사를 마치고, 그간의 자료들을 다시 점검하고 검토하면서 보다 세밀한 조사를 위한 그 결과물들이 연재될 계획이다.
우선 답사의 대상과 지역은 1차 영주지역과 안동, 봉화, 예천을 그 기반으로 시작할 것이다. 이 지역은 경북 북부지역으로 과거 삼국시대 신라의 육상 교통의 요충지로 문경새재(조령)와 죽령 등이 있는 곳이다. 문경새재나 죽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영남과 한강 이북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 한 사찰에 파불(破佛)로 남아 있는 석불. 앞으로의 연재를 통해 파불이 되어 버린 저 석불처럼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 영주지역의 잊혀지고 흩어진 불교역사와 문화의 퍼즐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나갈 것이다.
이러한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한 영주지역의 과거 문화는 어떠했을까.
그리 오래전의 역사를 끄집어내기보다는 3,40년 전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 보면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례로 ‘가라오케’, ‘노래방’ 문화가 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어디일까. 그것은 당연히 ‘부산’이다. 카라오케나 노래방 문화는 일본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그런 문화가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 부산이라는 사실은 지리적 여건이 문화의 전파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삼국시대 불교가 신라 땅에서 공인된 이후 신라 땅에서 가장 먼저 석불(石佛)이 조성된 곳은 어디일까.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한 답은 아직 미지수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 진평왕 9년(587, 삼국유사에는 진평왕 9년 갑인(甲寅)년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 갑인년은 594년에 해당하고 이때는 진평왕 16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의 대승사가 있는 사불산 정상에 새겨진 사방불(四方佛)이 사실상 기록에 등장하는 첫 번째 석불일 것이다.
사방불이 신라의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사례로 비슷한 시기(6세기)에 충남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보물 제794호)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도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 아닌 변경, 국경지대인 지금의 문경지역 그것도 죽령과 조령의 중간지점인 소백산맥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의 일들을 상고해보면 조령과 죽령에 인접한 지역에서의 불교 혹은 그 문화는 이미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보는 건 크게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신라의 불교공인이 법흥왕 15년(528)의 일이며, 사불산에 사방불이 조성된 것은 587년의 일이다.
삼국시대에 작은 금동불이나 경전 등은 손쉽게 이동이 가능하지만 석불의 경우 그 무게로 보나 규모로 보아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산정상의 석불이나 마애불의 경우는 사실상 이동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바로 문화의 정착이라는 점이다.
석불은 바로 불교문화의 정착을 의미한다. 단순한 이동과정에서 이루어진 일회성 결과물이 아닌 그 지역에서 문화적으로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연재될 ‘영주지역 불교문화 유산 답사기’를 통해 삼국시대의 혹은 통일기 신라의 불교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폭을 넓혀 가는 이정표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