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찬불가를 만들며 20여 년 가시밭길을 걸어온 ‘좋은벗풍경소리’가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좋은벗풍경소리가 20년을 이어오는 동안 여러 뜻 있는 스님들의 원력이 있었고, 특히 이종만 대표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빛나는 분이 있다면 아마도 초대 회장을 맡았고, 현재 다시금 회장을 맡은 덕신 스님을 꼽아야 할 것이다.
덕신 스님은 총재 지현 스님, 이종만 대표와 함께 좋은벗풍경소리의 오늘이 있게 한 주축이라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오직 어린이 청소년 포교의 일선을 책임진다는 원력과 사명감으로 명예와는 거리가 먼, 오직 힘겹고 고통스러운 자리를 다시 맡았다. 좋은벗풍경소리가 어려움에 처하고, 마땅한 회장감을 찾지 못하는 등 큰 어려움에 놓이자 스님은 스스럼없이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이다.
덕신 스님은 조계사에서 십여 년을 넘게 살면서 총무원과 포교원의 요직을 두루 거쳤어도 사판 냄새가 나지 않는 스님이시다. 언제나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씀하시는 소극적 성격이면서도, 굳은 일을 마다 않는 성정, 한 순간도 법복의 매무새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철저함 등은 스님을 잘 아는 분들에게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덕신 스님은 남한산성 장경사 주지 직을 끝으로 10년 가까이 자취를 감춘 적이 있었다. 공찰의 주지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비정상적 움직임에 신물은 느낀 스님은 훌쩍 대구 동구 백안동 팔공산 자락이 아스라이 펼쳐진 마을 한 가운데에 위치한 대륜사(大輪寺)로 내려가 인연이 있던 노 비구니 스님을 보살피며 소리 소문 없이 살았다.
덕신 스님의 소식이 알려진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지역의 한 일간지에서 노 비구니스님을 어머니 모시듯 정성껏 봉양하는 덕신 스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도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스님을 만나기 위해 도반이나 인연 깊은 재가자들이 간헐적으로 대구를 방문하면서 덕신 스님은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숙명처럼 또 다시 좋은벗풍경소리의 회장 자리를 맡았으며, 조계종 포교원 산하 어린이청소년위원회 위원에 위촉됐다.
어린이청소년 포교와 찬불가 보급에 한 평생을 바쳐온 덕신스님. 스님의 걱정은 늘 불교의 미래다.
하루가 다르게 겨울이 깊어가는 날 대구 동구 백안에 소재한 작은 절 대륜사를 찾았다. 그래도 중앙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한 때는 불교방송의 진행자로서도 명성을 떨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스님이 사시는 절이기에 어느 정도 사격을 갖춘 절이겠지 하는 선입관은 절 앞에 당도하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졌다.
백 평 남짓한 터에 지어진 암자, 차라리 인법당 수준이라고 해야 좋을 법한 작은 절에서 스님은 마침 재를 올리고 있었다. 법당이 비좁아 여기저기 화주를 해서 막 확장공사를 마친 법당에서 스님은 오른 손으로는 요령을 흔들고, 왼손으로는 북을 치면서 열심히 염불을 하고 있었다. 특유의 청아한 목청에 이끌려 기자는 한동안 재를 지내는 법당 한켠에 앉았다.
덕신 스님이 장애인 포교단체 원심회(圓心會)를 설립해 활동할 때부터 인연을 맺은 터라 개인적으로도 비교적 친분이 두터운 스님이셨기에 여러 가지 감회가 밀려들었다.
대륜사 작은 법당에서 재의식을 정성껏 봉행하고 있는 덕신스님.
청량한 염불성을 들으며 가만히 앉아 좌선을 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 끝없이 이어지는 염불을 들어며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좋은벗풍경소리 창립 20주년 행사의 보도 안내문을 읽었다.
“1995년 싱그러운 속삭임에 모두의 열정이 녹아내렸던 꼬마풍경 아이들의 노래가 합창이 되어 울려 퍼진지 어느덧 20년,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는 말들이 뿌듯함으로 다가옵니다. 알콩달콩 사연도 많았고, 이야기도 즐거웠던 풍경의 행진이 자랑스럽습니다. 40집의 작품이 쌓이기까지 노력해준 작사, 작곡, 편곡, 연주자, 작품자 선생님들, 녹음실의 스텝들과 진행,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노래해준 꼬마풍경의 싱그런 노래 소리가 사랑가득 메아리칩니다. 이번에 발표되는 풍경소리 41집은 풍경소리 초창기의 노래 (1집~5집) 가운데 많은 친구들이 좋아했던 노래들과 오늘의 이야기를 새롭게 편곡하여 다시금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20년 전 열심히 노래하고 춤추었던 그 추억들을 담아 지금, 우리의 아이들과도 함께 하고픈 그 마음, 그 열정으로 풍경의 합창이 아름답습니다. 불기 2559년 겨울 좋은 벗 풍경소리 회장 덕신 합장”
3시간 넘게 열심히 재를 올리는 스님의 모습은 늘 그래왔듯이 단정하고 가지런했다. 부드럽고 연민이 가득한 음성으로,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표정으로 중생을 대하는 스님의 모습, 그 위의 자체로 이미 넉넉한 귀의처였던 모습은 조금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구시 동구 백안동에 위치한 대륜사 전경. 멀리 팔공산 자락이 보인다.
예전 서울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때의 덕신 스님은 다양하고 열정적인 활동으로 그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분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언제나 수수하고 소탈한 모습을 여읜 적이 없었다. 어떤 일을 하던 꼼꼼하게 챙기고 최선을 다해 마침내 그 일을 완수하고야 마는 추진력은 그 척박하다는 불교음악계에서도 빛을 발했다. 좋은벗풍경소리의 회장을 맡은 것, ‘연꽃피어 오르리’ 등 수없이 많은 주옥같은 찬불가 가사를 지은 일 등은 재삼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10여년 이상 대중들과 떨어져 있던 스님을 불러낸 대구 지역 일간지의 보도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할 순 없지만 대개 이런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덕신 스님의 물 스미듯 잔잔하게 가슴을 적시는 청아한 염불성은 많은 불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고, 대륜사의 노비구니 스님을 어머니 모시듯 극진하게 봉양하는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고 불교계의 미담이 됐다.”
10년의 칩거 후 대중들에게 다시 모습을 보일 때, 덕신 스님은 빈손이 아닌 ‘독경 음반’을 들고 계셨다. 독경음반을 낸 스님들이 한 두 분이 아니기는 하지만, 스님의 독경 음반은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늘 이 음반을 통해 독경법을 배울 불자들을 생각합니다. 멋이 잔뜩 든 감상용 염불 음반이 아니라 일정한 호흡과 끊어짐이 없는 독경의 숨결이 모든 불자들의 염불독송은 물론 신행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습니다.”
덕신 스님의 이 독경 음반을 듣고는 당시 불교음악계의 원로 반영규 선생님은 한 편의 찬시를 남겼으니 이렇다.
돌돌돌돌 물소리 따라 기쁜 숨 몰아쉬며 오른 산사
절 마당에 널찍하게 그늘을 펼친 후박나무 아래서 한 숨 돌리다
문득 들려오는 염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여화분고초~
천 년 세월 한 자리에서 조석 염불 소리에 서슬이 닳고 닳은 돌탑은
여전히 묵묵적적 뒷산 봉우리의 흰 구름은 어디로 가나
덕신 스님의 천수경, 예불 음반을 보니 문득 산이 그리워진다
절에 가고 싶다. 고요한 절에 가서 귀에 대고 혼자 듣고 싶다
돌탑도 구름도 말고 나 혼자서만
여기서 스님의 주요 이력을 살펴보자. 총무원과 포교원에서 교역직 종무원으로 일한 것은 빼고.
1988년 최초로 장앵인 포교단체 원심회 창립
2001년 좋은벗풍경소리 초대 회장
2002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스님의 아름답고 잔잔한 미소는 '전매특허' 감이다.
덕신 스님의 법문은 맛깔난 찬불가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 간명하고 감동적이다. 최근 전라도 어느 절의 초청법문에서 말씀하신 법문 내용 한 대목을 살펴보자.
“파리를 좇아다니면 더러운 것을 만나고, 벌을 좇아다니면 꽃을 만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부처님을 좇아다니면 부처님 법을 만나서 결국 부처를 찾게 됩니다.”
스님은 2년 전인 2014년, 조계종이 제정해 최고의 불교음악인에게 수여하는 불교음악상 대상을 수상했다.. 찬불가 보급을 통한 어린이 포교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하고, 오랜 기간 동안 찬불가 노랫말 작사가로 활동한 것을 종단에서 알아본 것이다.
당시 했던 스님의 수상소감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캐럴은 어디서나 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파일에도 찬불가를 듣기는 어렵습니다. 분발해야 합니다. 불교음악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을 짧은 시간에 이해하고 따라 부를 수 있게 하는 최고의 포교방편이니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스님은 생활 속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노래하며 기쁨을 느끼고 기쁨을 전달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원하며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불교음악을 하는 불교음악인들이 얼마나 외롭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오직 신심 하나로 찬불음악에 몸을 담아 불교음악의 맥을 힘겹게 이어오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에 이들의 손길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늘 단정하고 가지런한 모습답게 덕신 스님의 절하는 모습 또한 아름답다. 스님이 절하는 모습은 늘 나비 같다. 일어서는가 하면 앉은 모습이고, 앉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일어서는데, 무게감이 전혀 없이 사뿐사뿐 늘 신기하다.

덕신 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성구(聖句)는 ‘조고각하(照顧脚下)’이다. "자신의 발 아래를 잘 살펴라"라는 가르침을 담은 이 성구는 스님을 출가 직후에 만났다. 사미시절에는 그 깊은 의미를 잘 모르다가 절집 나이가 늘어나면서 그 의미를 알게 되었고, 지금은 늘 스님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가르침이 되었다.
덕신 스님은 동진출가로 일찍이 불문(佛門)에 들었다. 철이 들면서 무엇인가 거창한 깨달음을 얻어 보겠다는 포부가 생겼고, 난해한 경구나, 참선수행에 매달리기도 했다. 구도심이 불타오르던 어린 시절, 스님은 어린 마음에 도를 이루는 것은 엄청나고 대단한 일이며 마음속으로 그런 일을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 자신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노스님의 시자로 시골의 암자에 따라갔다가 이 조고각하란 성구를 우연히 만났다. 절집에서 흔히 만나는 글귀이지만, 이 글귀가 문득 수행자입네 거만함으로 가득 찼던 자신을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었지 모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깨달음이라는 도가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누구나 고개를 숙이는 겸손한 마음, 하심을 가져야 도를 이룰 수 있다는 깊은 가르침이 이 네 글자에 담겨 있음이 피부로 와 닿더라는 것이다.
대륜사는 아주 작은 절이다. 신도라고 해봐야 법회참석 인원이 20명 남짓이다. 초파일 등도 채 500개에 미치지 못한다. 가난한 절 살림에 무엇을 해보려 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동안은 노 비구니 스님을 시봉하느라 못했고, 노비구니 스님이 입적한 후 3년 동안은 절을 보수하고 확장하는 데 시간을 다 할애했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조건이 스님의 포교 원력을 언제까지나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스님은 백안 마을 인근에 있는 절들의 스님들과 함께 승가회를 조직하고 어린이와 청소년 법회를 창립할 원력을 세워놓고 있다. 얼마 전에는 첫 회의도 했다. 대부분 군소종단 스님들이지만 원력을 가지고 있어서 희망을 보고 있다.
“해봐야죠. 어렵지만 해야 합니다.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 청년에 대한 포교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큰절 동화사에도 청년회가 없을 정도니까 말해 무엇 하겠어요. 그래도 해 봐야죠.”
작은 체구, 가녀린 손,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를 가진 덕신 스님이 한 때는 ‘불교 도시’로 일컬어졌지만 지금은 불교의 형편이 척박해진 대구에서 미래불교의 동량을 키우는 일에 어떤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까, 염려도 되고 기대도 된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처럼 스님의 원력에 뜻 있는 불자들의 동참을 권하고 싶다. 그 어떤 불사의 공덕보다도 더 큰 공덕을 지을 것이 분명하니…. 대륜사 053) 985-5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