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나라를 건국하여 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니, 유학자가 배출되고 문화와 교육이 융성하였다. 이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도리가 해나 별처럼 분명해졌으며, 성인들이 서로 계승하여 어진 정치는 깊이가 있고 끼친 은택은 두터웠다. 이렇게 어진 정치와 두터운 은택으로 인심을 결집하게 된 것은 한반도를 유지시켜온 원동력이었다. 안으로는 정권을 장악한 권신이 없고 밖으로는 함부로 날뛰는 강한 번국(藩國)이 없었으니, 결코 기반이 흔들리지 않고 범하기 어려운 정신이 사회를 유지시키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었다. 허나 어찌하여 인심이 오랜 평안에 오만해져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없어지고, 선비의 버릇이 문장의 폐해에 빠져 혼후한 기풍이 적어졌단 말인가. 답지 않은 기질이 고질이 되어 구제할 수도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으니, 통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이 글은 권구(權榘, 1672~1749)의 『병곡집(屛谷集)』제6권,「당론(黨論)」을 번역한 글이다. 정치에 몸담지 않은 학자 병곡(屛谷) 권구(權榘)는 순수한 학자의 눈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 발생한 붕당정치가 망국의 원인이 된 핵심을 꿰뚫어 보고 이와 같은 글을 남겼다. 그 당시에도 지금도 모두가 당론이 나라를 그르쳤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권구는 이 글에서 견해를 달리하는 당론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일종의 독사 같은 무리와 경박하고 조급한 부류가 목전의 은원(恩怨)에 매달려 당론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결국 당론이 나라를 그르쳤다는 오명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고전의 가르침을 글머리에 앉힌 것은 최근 벌어진 차문화학회의 현상을 분석하는 입장에서 이만큼 날카롭게 지적할 만한 필력을 갖추지 못해서이다. 조선시대 붕당정치와 같은 폐해들이 현대사회에서, 더욱이 학자들이 본인의 연구를 객관화하고 일반화하기 위한 학회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까지 광주에서는 광주국제차문화전시회가 열렸고, 이 행사 중 차문화와 관련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두루 알다시피 학회는 학문적 성과를 목적으로 향후 연구 방향이나 과제를 제시하고 주어진 주제의 해결가능성을 모색하는 공의의 장이다. 학회는 모름지기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견해와 주장, 혹은 발견을 보여 줄 수 있는 참신한 주제를 선정해 발표하고, 이를 논평자들이 객관적인 견해로 비판하고 검토하는 자리여야 한다. 논자나 평자나 상호 학술적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은 필연이고 사명이다.
학술대회를 학술토론회의 형식으로 기획하는 이유는 상반된 연구의 가치 기준을 공정하고 바른 시각으로 검증하자는 취지에서 발현된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상호 야합하거나, 관련주제의 연구 업적에 대한 객관적 검토도 없이 발표자가 선정되거나, 토론자가 배정되는 일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발표자나 논평자나 현 시대에서 차와 차문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적확한 평가 잣대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이들의 예리한 시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겸손의 자세도 요구된다. 적어도 공정한 주의주장들이 주최 측이나 관련자들의 입맛에 의해 일축되어 버리는 학회라면, 그런 학회는 전체적인 스케치를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학술대회는 우선 논문 주제의 합리성과 결과의 효용성이 함께 드러나야 비로소 학회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연구자가 주제발표 과정에서 말한 용어를 빌자면, ‘틀과 얼이 바로 이어져야 정통한 전통의 계승’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 형식과 내용, 그 바탕인 정신이 균형을 잃고 헝클어진 물색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차문화 연구는 지난 1970년대 초부터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 제다와 차문화, 차산업의 발전 전략은 50년 넘게 늘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다하게 가닥이 정리되었거나 반세기 동안 이어지고 있는 의문들이 해결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연구방향에 혼선만 생기고 복잡다단한 의문들만 난무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논거의 제시나 논쟁을 통한 발전적 모색보다는 양적 증가에만 머물러 있는 상태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차문화가 학문으로서의 연구 역사가 장구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정통한 학자의 부재와 연구자의 윤리적 태도에도 그 책임이 있다.
‘한국 전통차의 제다와 고증’이라는 큰 타이틀이 무색하게 ‘중국차의 분류와 명차’가 1부 발표 중심을 차지했다. 중국 전통차의 제다법 고증이나 차문화 산업의 발전방향을 분석하여 한국 차문화발전의 발전방향을 설정해간다는 내용이라면 얼마든지 이해하겠지만 그 내용은 고사하고 중국의 명차 소개에 급급했으니 갑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다분야 문화유산과 전승인 관리라는 차원에서 제다분야는 전통기예에 속하고 녹차를 비롯하여 6대 다류의 전승기예자들이 29명 등록되어 있다는 것의 논지가 1장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기조강연은 ‘중국차 마시지 말자’, ‘차꾼들이라도 차를 사 먹자’라는 식의 주장과 캐치프레이즈로 일관하고 있다.
기조강연은 그 특정 강연 분야의 흐름과 방향성을 나타내고, '기본적인 경향 또는 정책의 기본 방향을 주제로 하는 강연'을 뜻한다. 그러나 종교지도자이기도 한 당사자는 학술대회의 주제와는 크게 상관없는 강연으로 주어진 시간의 두 배를 아무런 제재 없이 사용하였고, 자신의 세를 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게 이날 참석한 관련 학자들 다수의 시각이다. 타 학술대회의 성과를 폄하하고, 차계의 묵은 연구자를 안하에 두고 평가 절하하는 학회, 이것은 매우 고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학술회의의 장은 개인의 잣대를 휘두르는 자리가 아니다. 선진화된 학회의 전형을 보여주지 못하고 학회를 학회답지 않게 만들어버린 것에 대해 책임의식을 통감해야 할 이유다. 차문화 연구자들을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최소한의 예의도 차리지 않고, 본인이 통제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며 하대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종교인의 언행은 적어도 수행으로 인한 인내와 지혜, 그리고 덕과 행이 갖춰진 모습을 보여주는 수준이어야 한다.
타 연구자나 타 학회의 기획자를 지적하면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오고, 이론적 관련성을 무시한 발언으로 주제의 혼선을 가져오고, 전달력을 방해했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자료집을 읽고 있는 청중을 불러 세워 사적 감정을 드러내는 반인권적인 처사의 난무! 이런 수준 낮은 학술대회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불가피하다는 차계 원로들의 시선도 따갑다. 발표자의 태도와 윤리문제조차도 흔들리고 있는 차 관련학회의 이러한 현상을 차문화사는 어떻게 기록할지 의문이다. 자의적인 분석을 강요하고, 청중을 모두 안하무인으로 대하는 기본 인식을 가지고 출발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이 가을 떨어지는 낙엽처럼 씁쓸함을 남겨 주고 있다.
문화 현상의 탐구 태도, 자료 분석에 대한 오류는 없는지, 적법한 절차가 적용되었는지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검증되지 않은 본인의 논거를 강하게 피력하는 성숙되지 못한 면모는 학회의 수준이나 가치 기준을 의심하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연구 방향과 흐름의 미비점이나 결점들을 드러내고 평가하며,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재고되어야 할 현안들이 개인의 과도한 주장으로 인하여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자초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존칭과 예우가 배제된 학회, 이것은 비극이다. 이러한 비극이 연극 무대도 아닌 학술대회의 장에서 연출되었다는 것은 21세기 지식인들의 모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부끄러운 우리 차계의 자화상이다.
학회장은 인사말에서 물신풍조와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현대사회의 병폐로 말미암아 인심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신심은 극도로 쇠약해져서 급기야 대다수 국민들이 치유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이른바 힐링시대에 처하고 말았다고 시대진단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인사와는 정 반대로 이번 학회는 시대진단의 처방도, 학술적 성과도 거둬들이지 못했다. 여기서 차문화와 유행하는 기호음료 술문화의 이야기를 잠깐 빌려 보자. 술집에서는 술병을 잡은 사람이 병권을 쥐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술 한 잔 못하는 사람에게 술병을 들이대는 자의적 우월의식 때문에 곤란을 겪을 때가 많다. 술집의 병권처럼 마이크권을 휘두르는 것이 학회의 장은 아니다. 그 마이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감히 학자들의 잔치인 학회가 21세기 지식인의 장이라 할 수 있을까.
큰 타이틀에 맞게 그 주제의 가닥을 잡아가고 또 주제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는 성과가 있어야 할 학회에서 더 큰 혼란만 가져왔다. 차문화 연구가 이대로 진행되어도 좋을 것인가? 하는 문제, 학회의 수준이나 격은 차치해 두더라도 공식적인 학회 석상에서의 발표수준이 이 시대의 종교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함량미달은 아닌지 가치기준의 잣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학회는 학문적인 정당한 입장에서 객관화와 일반화이다. 거기서부터 신뢰를 갖고 그 객관성을 기준하는 자료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 그래서 오류를 염려하고 본인의 견해를 조심스럽게 발표하는 자리에서 다수의 설득을 통해 연구의 시간과 업적을 인정받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최소한 학자로서의 양심인 것이고, 입장인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권구(權榘)의 글에서는 독사 같은 무리니 경박하고 조급한 부류니 하는 치들은 모두가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의 결점을 끄집어내고 조작하고 결국 물고 뜯는 지경으로 몰아가다 보니 정작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은 온데간데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 자리를 지키는 미덕은 거대하거나 창대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무엇을 크게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조선이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문화와 교육이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어른들이 어른답게, 유학자들이 유학자들답게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따랐던 질서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안정되게 유지되는 것은 바로 이 질서 때문이다.
이 글은 이제부터라도 권구가 강조했던 그 질서를 우리 차문화사에도 오롯이 세우자는 것이다. 젊은 연구자들을 격려하고 응원하고 지원해 주면서 잘못이나 그름을 지적하고 바로 개선할 수 있는 따끔한 지적을 할 수 있는 풍토, 즉 어른이 어른다워야 하고, 학자가 학자다워야 하는 것을 바랄 뿐이다. 그런 연구 사회 풍토를 깔아주었으면 한다는 간절한 희망을 담은 것이다. [君君臣臣 父父子子]’는 대단하고 고매한 이론이 아니라 그저 사람 하나하나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억만년 탄탄한 기반을 이루는 유학의 초심인 것이라는 고전의 가르침을 겸허히 받들자는 것이다. 사람이 이 초심으로 돌아갔을 때 치열한 당론도 나라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형식이 틀어지고 얼이 결여된 학회의 현상을 지켜본 한 젊은 연구자로서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변명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개인의 안전과 미래 제시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이러한 사태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선비정신은 연구자의 본(本)이고 얼(정신의 줏대)이다.『맹자』에 창업수통(創業垂統)이라는 말이 나온다. 수통이란 좋은 전통을 후세에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지금 당장 혼란스럽고 어려워도 먼 훗날의 탄탄한 반석을 위해 선을 행하고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권구가 말하는 유학의 초심인 ‘군군신신 부부자자’의 의미이며, 지금 기성세대가 흔들리는 젊은이들을 위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 견월재다신을 전하기 위한 목적은 화신(花信)처럼 훈훈하고 아름답고 정감 있는 차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으나 연구자의 안목에서 이렇게 자극적인 소식을 불가피하게 전하게 됨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정서경 박사는 고전민속학을 전공했다. 차고전과 차시(茶詩)를 통하여 우리 차문화사의 미결의 문제를 고민하고 전승의 주체와 기능에 주목하고 있다. 차문화를 향유해 온 주체 연구는 집단이든 개인이든 그들에 의해 생산되고, 공유하고 향유와 확산을 통한 문화 전반의 패러다임이고 밑그림이다. 기록을 훑고 기억을 찾아가고, 차문화의 현장이 그녀의 연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