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필요한 사람
어떤 이는 일단 전제를 하는 것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대부분이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죠? 저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등등
일단 ‘규정’을 합니다.
그 말의 소리의 높음과 얼굴의 굳은 표정을 보면 동의를 안 하면 안 되는 말입니다.
강요이고 강제입니다.
그런데도 여하튼 지르고 봅니다.
대부분의 알음알이로 공부했다는 자칭 ‘수행자’들은 대부분 이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미 첫 단추가 잘못되었지만 오랜 친구와 같은 ‘도반’으로 받아들이고
《입보리행론》 인욕 편의 가르침 대로
그냥 ‘배려’로 ‘인내의 시간’을 보내며 그 말을 봅니다.
바쁜 와중에 왜 그러냐구요?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 이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굳이 ‘조언’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반드시 모멸적인 ‘폭언’으로 받아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차를 드립니다.
끽다거(喫茶去)입니다.
마음 가라앉히면서 그냥 차한잔하세요.
차를 마시면서도 언성을 높이고 흥분하는 이는 어떻게 하냐구요?
그래도 차를 계속 권하시면서
그의 말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인욕 수행이고 그게 보리심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수행하는 도반? 도인!
도인은 다름이 아닙니다.
어제는 안 되지만, 오늘은 되고 오늘은 되지만 내일 안 되는 걸 알면 됩니다.
이건 저 사람은 되고 이 사람은 안 되지만
저건 저 사람은 안 되지만 이 사람은 되는 걸 알면 됩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되고
그는 해도 되지만 나는 하면 안 되는 일을 알면 됩니다.
그렇게 멀쩡해 보이는 콘크리트 다리라도 사실은 매우 위험한 징검다리와 같다고 보셔야 합니다.
정해진 것은 없고 모든 것이 모래성과 같아서 언제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여리박빙인가요?
살얼음판 걷듯이 한발 한발 매우 신중하게 돌다리도 두들기며 건너는 것이 바로 수행의 길입니다.
혼자라도 잘 건너면 소승이고 한 사람이라도 함께 건너면 대승이며
그 둘을 다이아몬드처럼 합친 게 금강승인 듯도 싶습니다.
그 길을 그렇게 하심하며 겸손하게 배려하며 걷는 사람이 진정한 도인일 듯싶습니다.
말은 누구나 잘합니다.
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만나서 대화하고 그의 말과 행동을 잘 보세요.
바로 금새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게 즐겁나 봅니다.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그래도 남 탓하는 사람들
사실 모든 이야기의 구조는 비슷비슷한 듯합니다.
나와 너라는 주인공,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여기와 저기라는 공간
그리고 공기라는 분위기의 흐름 같은 인연과 연기 등이 이합집산하거나
잠시 자리를 바꿨을 따름입니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합니다.
가급적 대화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제를 계속 엉뚱한 데로 가져갑니다.
‘자기자랑’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아니 모르고 하는 듯합니다.
‘수처작주’ 즉 어디를 가든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이미 자기가 뭘 하는 지도 모릅니다.
이런 분일수록 ‘성성적적’하다느니 ‘여여’하다느니 말은 청산유수입니다.
푸른 하늘에 구름이 가득한데 혼자서 ‘분탕질’마저 치고 있는 격입니다.
그런데 말을 잘 들어보면, 결국 잘난 사람은 자기도 아니고 ‘자기 가족이나 친구’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아는 사람’까지 인용합니다.
아무리 내 주변의 인연이 중요하다지만
중요한 것은 주변인들이 ‘인연’에 포함된 ‘수행’과 ‘품성’이지
‘돈’ ‘명예’ ‘권력’ ‘지위’가 아닙니다.
적어도 수행자들에게는요.
하지만 결국 자칭 ‘도인’들의 말에 대부분은
남의 ‘돈’ ‘명예’ ‘권력’ ‘지위’가 주요 검색어입니다.
말은 관심 없다고 하면서 온통 말은 그것뿐입니다.
관심이 거기에 쏠려 있는데 어찌 수행이 되겠습니까?
그럼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오직 나입니다.
나만 반추하고 반조하면 됩니다.
방법을 모른다구요? 그럴 리가요? 이미 다 알고 있는 거 압니다.
다만 ‘앎’의 질이 좀 ‘거시기’할 따름입니다.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의 ‘앎’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앎을 실천 즉 ‘지행합일’ 그것을 하는 이가 최상근기입니다.
가끔 상근기, 하근기 아는 척하는 이들을 봅니다.
안타깝게도 그걸 떠드는 사람들은 모두 상근기입니다.
상근기가 아닌 사람이 어찌 불법을 만나겠는지요?
다만 최상근기는 하나입니다.
하근기라고 중근기라도 ‘앎’을 ‘실천’하는 이가 바로 ‘최상근기’입니다.
육도윤회에도 이렇게 ‘파격’이 하나 있기에
우리는 ‘지혜’를 닦는 것입니다.
선정바라밀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선정에 관심을 갖고 지혜를 닦으면 됩니다.
그런 가라앉히고 지혜로운 대화를 스스로 하세요.
아니라면 ‘도인’ 흉내는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