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서 ‘1인 1종교 갖기 운동’을 할 때는 법당에 장병들이 가득했지만, 법당에 오자마자 졸거나 잡담을 하는 병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여기라도 와서 쉬고싶어하는 것이 고맙고, 또 한편 안쓰럽기도 해서 설법을 들으라고 깨울 수가 없었지요. 아마도 연예인이나 여학생을 초청한 공연법회가 아니면 이들의 잠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緣起)를 이해시키려고 미국 MIT 공대의 에드워드 로렌츠교수의 ‘나비효과 이론’을 예로 설명하였더니 많은 병사들이 신기했는지 법사와 눈을 맞추고 있지 않겠습니까. 마침 이공계 출신이 많은 공병부대라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그들이 듣고 배웠던 설법과는 다른 설명에 흥미를 보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불교교리에 놀라는 표정들이 역력했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얘기지만, 법당을 찾는 대부분의 장병들의 종교관은 이렇다 할 것이 없습니다. 부모의 종교가 불교이거나, 그저 불교가 우리 문화와 전통에 익숙하고 이질감이 적은 탓에 마음이 편해서 법당을 찾는 것입니다. 삶의 궁극의 진리가 궁금하다든가, 그 궁금함을 깨달아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찾으려 한다든가, 부처님을 존경하여 그 가르침을 배워보겠다는 장병의 존재는 정말 희유합니다. 실로 사람은 많아도 참다운 불자가 적습니다.
군장병 및 대학생 등 청년층 포교는 양보다 질로 승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된 포교원 연찬회 장면.
이런 그들에게 불교가 무엇이고 절이 어떤 곳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이 뻔해요.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는 대답에서 한 발짝도 더 내딛지 못합니다. 그러다 더 다그치면 나오는 대답들이 사찰은 죽은 사람 천도해주는 곳, 이삿날 받는 곳, 아들 점지해 주는 곳, 대학입시 합격기도 하는 곳 등등. 사실 지금 우리 불교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그렇게 절엘 다니고 있고, 대분의 사찰에 내걸린 현수막이 천도재고 입시기도다 보니 젊은이들이 불교를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요즈음엔 젊은이를 모아놓고 법회를 하는 곳도 별로 없지만, 아직도 음력 초하루와 보름을 고수하는 법회에 가보면 아주머니 할머니들 모아놓고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의 영험담이 주류 이고, 그나마 일요법회를 하는 큰 사찰에서도 중국 당송(唐宋)시대의 선승(禪僧)들의 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요즈음 젊은이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질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 아마존 밀림에서 나비의 날갯짓으로 일어난 아주 작은 바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미국 텍사스에 도착해서는 강력한 토네이도 바람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풀어낸 로렌츠 교수의 나비효과를 예를 들어 부처님의 연기법을 설명하니 젊은이들에게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리고 거기에 관심이 더해지니 젊은 장병들은 그 어렵다는 연기법을 금세 이해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머리를 끄덕이면서 놀랍니다.
‘정말 불교가 이런 거였어, 대박!’
요즈음은 대부분 병사들이 고등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라서 성인의 말씀이라고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상식과 과학, 그리고 논리가 없으면 외면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병사들에게 무상(無常)을 설명할 때면 물리학의 단위이론을, 무아(無我)를 설명할 땐 원자물리학과 생물의 세포분열을, 공(空)과 연기와 중도(中道)를 설명할 때는 열역학의 에너지보존의 법칙과 생물의 진화론, 그리고 물리학의 상호작용이론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수학이나 인간공학 등의 짧은 지식도 총 동원합니다.
사실 불교만이 상식과 과학, 그리고 논리와 충돌하지 않고 어긋나지 않는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와서 보고 증험하라고 하셨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면 스스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상식·과학·논리와 충돌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맹목적으로 믿고 매달리는 신앙의 종교가 아니라, 이해했기 때문에 믿고 확신하여 실천하는 신행(信行)의 종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자연과학도인 필자는 보편성·타당성·추증성을 갖추고 있는 불교가 너무나 좋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주신 부처님의 제자인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최근에는 법당을 찾는 장병들이 눈에 띄게 줄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그동안 ‘1인 1종교 갖기’에서 ‘종교를 가지지 않는 것도 종교의 자유’라는 자유종교활동으로 바뀌고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러다보니 전처럼 간식에 따라 휘둘리던 다종교 신자들이 자취를 감추고 정말로 불교가 좋아서 법당을 찾는 진성불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군 불교가 과거 물량 중심으로 포교하던 틀에서 벗어나 질(質)로 접근해야 할 때가 온 것이지요. 더구나 질로 치자면 불교만큼 형식이나 내용에서 풍부한 종교는 없을 테니 우리가 한껏 실력을 뽐내야 할 때입니다. 상응하는 대책 마련이 시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