紺碧巖前紫竹扃  검고 푸른 바위 앞에 자줏빛 대나무 빗장 걸렸는데
至今吟屧憶曾經  오늘 시 읊으며 걷노라니 지난 일들 떠오르네.
西來妙法從何起  조사 오신 오묘한 이치는 어디에서 찾을까
萬二千峰海上靑  일만 이천 봉우리가 바다 위에서 푸르구나.
且置天龍八萬藏  또 천룡의 팔만 경전을 두었지만
秋翁半偈與周章  추사 늙은이는 짧은 게송을 지어 조심스레 주었지.
深深此意從誰會  깊고 깊은 이 뜻을 누구를 좇아 깨우칠까
遙禮雲間妙吉祥  멀리 구름 사이 묘길상 보며 머리를 숙이노라.

-<일지암에서 풍악산 운공의 편지를 받고 바로 쓰노라(一枝庵得楓嶽雲公信却寄)>
강위(姜瑋, 1820-1884) <고환당수초시고(古歡堂收艸詩稿)> 권6 <삼동수승초(三洞搜勝艸)>에서

추금 강위는 조선 말기 때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시인이었다. 몰락한 무반 출신이었던 그는 신분상 문관이 될 수 없는 처지를 깨닫고 일찌감치 과거 급제는 포기했다. 대신 시에 전념하여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보통 그는 김택영(金澤榮, 1850-1927)과 이건창(李建昌, 1852-1898), 황현(黃玹, 1855-1910)과 함께 한말사대가(韓末四大家)로 불린다.

시에 전념하는 한편 그는 주류를 이루었던 정주학(程朱學) 대신 청나라 고증학의 학풍을 자신의 이념으로 선택했다. 당시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고 있던 민노행(閔魯行)을 찾아가 4년 동안 공부했다. 민노행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김정희(金正喜)를 만나고 5년 남짓 학문의 날을 벼렸다. 최고의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스승의 영향을 받아 그 또한 실학을 자신의 학문 지표로 삼았다. 김정희가 유배에서 풀린 뒤부터 그는 방외인(方外人)의 삶으로 돌아서 전국을 떠돌며 시를 짓는 일로 세상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런 그에게 현실의 모순이 뼈저리게 다가온 사건이 발생했다. 1862년 삼남지방에서 도화선에 불이 붙어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민란(民亂)을 목격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그는 난군들에게 붙잡혀 감금되었고, 격문을 쓸 것을 요구받았는데, 요행으로 탈출해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일로 그는 시국의 징후가 심상치 않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오랜 친구였던 정건조(鄭健朝, 1823-?)의 권유로 3만 어에 달하는 <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幣策)>를 썼는데, 워낙 과격한 주장이라 정건조가 올리기를 꺼리자 주저 없이 불태우고 말았다. 이런 일로 그의 심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다 1874년과 1874년 두 차례의 중국 여행이 또 한 번 삶의 방향을 바꾸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 여행에서 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현실을 인식했고, 세계사의 변화에 머뭇거리다가는 나라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을 예감했다. 빨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변신을 꾀하지 않는다면 조선의 미래도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스럽게 개화사상가로 자신의 행보를 굳혔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 그는 동지들과 함께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마음을 살찌우고 위안을 준 것은 불교였다. 스승인 김정희가 불교에 깊이 심취되었던 데다 전국을 떠돌 때 사찰에 머물면서 불가의 승려들과의 교유도 빈번해졌다. 그는 질풍노도로 밀려오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대안을 외부에서 찾지 않고 내부에서 찾았고, 그 대안의 일단을 불교의 자비와 도세(度世) 정신에서 읽어냈던 것이다.

오늘 읽은 위의 시도 그런 강위의 마음의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끝에는 “운공이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이라곤 ‘법기봉은 푸르고 묘길상은 우뚝하다’는 여덟 글자뿐이었다. 이 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전에 율봉선사의 초상화에 붙인 찬사다.(雲公書來 只是法起峰靑 妙吉祥屹八字 是秋史金先生舊題栗峯師像贊)”는 주석이 붙어 있다. 운공이 누구인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김정희가 청고율봉(靑杲栗峰, 1738-1823)의 초상화에 쓴 글을 인용할 정도라면, 분명 가까운 친분의 인사였을 것이다.

청고율봉은 조선 후기의 스님으로, 성은 백씨(白氏)고, 자는 염화(拈花)며, 호가 율봉이다. 19살 때 출가하여 대준(大俊)의 제자가 되고, 이듬해 숙민(淑敏)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스님은 교리에만 집착하지 않고 별전선지(別傳禪旨)를 깨달아 스승 거안(巨岸)이 “나는 사구(死句)에만 집착했는데 그대는 활구(活句)를 터득했구나.”하며 심법을 전수했다. 사람들이 활불(活佛)이라 불렀을 만큼 법력이 깊은 선승이었다.

시에서 강위는 ‘법기봉청 묘길상흘’의 여덟 자가 담고 있는 뜻을 능란하게 활용하고 있다. 스승이 존경하여 찬사로 붙인 글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불교가 가진 원만하고 광활한 대지에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시를 쓴 장소가 일지암이다.

일지암은 해남 대흥사 뒷산에 있는 암자다. 조선 후기의 다승(茶僧)으로 김정희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초의의순(艸衣意恂, 1786-1886) 스님이 세우고 거처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팔만법문이 서려 있는 푸른 봉우리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지혜를 맡아 석가모니불의 왼편에서 시위하는 묘길상 문수사리(文殊師利)의 화현을 보며 귀의의 뜻을 밝힌다.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까닭을 누구에게 물어 깨우칠까 하고 시인은 자문하고 있다. 강위는 불교에서 단지 위안과 신앙이라는 차원을 넘어 어지러운 세상을 극복할 지혜와 실천의 힘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무너졌을 때 조선 불교의 맥이 끊어지려는 순간 분연히 일어나 이를 막았던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이 자신의 시는 초의와 강위에게서 온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던 것도 이런 강위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난세에 힘이 되는 부처님 말씀의 감화력을 강위를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