閱盡千灰㤼  천 번의 회겁을 모두 겪고서
瀟然絶世間  맑고 고요하게 세상과는 떨어져 있네.
蒼蒼天外樹  푸르고 푸르기는 하늘 너머 나무들이고
點點望中山  점점이 펼쳐진 것은 눈앞에 보이는 산들일세.
雲氣晴猶濕  구름 기운은 맑았다 다시 물기에 젖고
苔花老欲斑  이끼 꽃은 오래 되어 얼룩이 졌구나.
登臨魂骨爽  올라 바라보니 넋과 뼛속까지 시원하니
偸得暫時閒  잠시 머물면서 한가로움을 얻으려네.

-<부석사에서(浮石寺)>
몽암(蒙庵) 이채(李埰, 1616-1684) 몽암집 권2

이채는 임진왜란 직후에 태어나 영남 지방에서 주로 활동했던 문인이다. 본관은 여주(驪州)고, 자는 석오(錫吾)며, 호는 몽암으로, 경주 양좌리(良佐里)에 살았다. 고조부는 백세의 스승으로 칭송되는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니, 가학의 깊이를 알 만하다. 집안은 조선조에 들어 이번(李蕃)이란 분이 영일(迎日)에서 경주로 옮겨와 살면서 경주에 터전을 잡게 되었다.

이채는 특히 경전과 역사에 능통했고, 시문도 잘 지었다. 그때 고을에서 하과(夏課)를 내어 인재를 뽑았는데, 누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글을 내라고 하자 “하과 또한 나라의 시험인데, 어찌 남의 손을 빌려 관원을 속이겠냐.”면서 직접 쓴 글을 내 선자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선생의 성품의 일단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응했지만 번번이 낙방하다가 1665년 비로소 상사(上舍)에 뽑혔다. 1666년 병오식년사마시에 진사 2등으로 합격했다. 1676년에는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번 관직이 내려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유일이란 은거하면서 뜻을 구하지 문달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어찌 과거시험에 매달려 성과도 얻지 못하고 병들어 머뭇거리다가 늙어 물러나 주저앉은 이를 일컸겠는가? 내실도 없이 명성만 얻는다면 이는 크게 부끄러운 일이다.(所謂遺逸者  乃是隱居求志 不要聞達者之稱 豈從事科場 勤苦而無成 疾病淹滯衰退屛伏者之謂 無其實而得其名 可羞之甚也)”라고 하면서 사양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저서로 1669년에 경주부윤 민주면(閔周冕) 등과 함께 편찬한 <동경잡기(東京雜記)>가 있다. 이 책에는 17세기 경주지역의 사정과 신라시대 이래의 전설과 역사, 풍속, 문물 등이 매우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문집에는 <몽암선생집>이 있는데, 1832년 6권 3책으로 간행되었다.

이채의 학문적 성향을 보면, 그가 산 시대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을 겪은 뒤 유가(儒家)가 존립하는 의미에 대해 회의가 도는 시기였던 만큼 유림의 본분을 지키면서 이단에 흔들리지 말자는 강고한 의지가 서려 있다. 그래서 불교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채의 벽이단론(辟異端論)이 반영된 작품부터 먼저 읽기로 하자. <없어진 적멸암에서(寂滅廢庵)>란 제목의 시다.

寂滅何年廢  적멸암은 언제 없어졌는가?
庵名廢固宜  암자 이름을 보니 없어진 것도 당연하네.
吾儒眞一幸  우리 유가에게는 참으로 한 다행이니
禪道可占衰  선종의 도가 쇠약해져 가는 것이지.

이 시가 무너진 암자를 보면서 기뻐하는 속내를 드러낸 것으로 보아서는 곤란할 것이다. 기구와 승구에서 한때 흥성했던 적멸암이 없어진 것을 두고 ‘언어유희(Pun 또는 Paronomasia)’를 펼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름이 ‘적멸’이니 없어진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반농담조의 표현이 비장감보다는 웃음을 자아낸다. 삼라만상은 때가 되면 없어지는 것이다. 없어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인데 그 자체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뜻이 숨어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라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단이 너무 흥성해 유교의 가르침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채의 생각에는 큰 변함이 없다. 감정보다는 원칙을 중시하는 그의 생각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와 실천에서는 엄격한 잣대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사찰을 대하는 그의 정서는 유연하면서 자연인으로서의 정취가 곳곳에 묻어난다. 이채에게 아름다운 산천 경관 안에 자리한 산사는 선경(仙境)의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두덕암에서 노닐면서(遊斗德庵)>란 제목의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山作芙蓉石作臺  산에는 부용꽃이 피었고 돌로는 누대를 세웠는데
紫霞深處隔紅埃  보랏빛 안개 자욱한 곳이 속세와는 떨어져 있네.
蓬萊仙子吾何羨  봉래산의 신선을 내 어찌 부러워하리오
吾亦今朝羽化來  나 또한 오늘 아침에 우화등선한 것을.

두덕암은 도덕산(道德山, 경주 인근에 있는 산)을 오르면 초입에 있는 암자다. 계곡 사이 연못에는 부용꽃이 피어 있고, 돌을 쌓아 누대의 기초를 다졌다. 게다가 아침 안개가 자욱해 코앞에 있는 티끌세상도 아득하게 멀어져 보인다. 이런 두덕암의 산사 풍경에서 이채는 신선 세계를 떠올리게 된다. 신선 세계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산천, 그윽한 안개가 감도는 산사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토로는 단지 이채가 별세계에 대한 취향이 있어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는 경험을 중시했고, 산사를 접한 경험과 불교를 이해한 깊이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의 벽이단론이 단순한 자기 합리화나 일방적인 적대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이 시는 잘 보여준다.

또 산사는 이채에게 한때의 투한(偸閒)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의미가 있다. 번잡한 세사에서 벗어나 물아일체가 되어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산사는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시가 바로 그런 정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천 년의 전화를 겪고 생존한 것은 사찰만이 아니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은일의 삶을 살지만 조선의 백성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 근심과 번뇌를 가슴에 안고 사찰을 찾았다. 이채는 푸른 숲과 빗살처럼 이어진 산사의 자연을 보면서 전화에 시달린 나라의 미래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조선의 역사보다 더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도 부석사는 돌처럼 굳건하게 그 모습을 잃지 않았다. 맑았다가 물기를 잔득 머금은 구름이 오락가락해도 연륜을 보여주듯이 이끼 꽃은 바위에 얼룩을 남긴 채 장구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이런 산사의 유서 깊은 풍경을 보면서 그는 한 가닥을 위안을 얻고 있다. 전란의 후유증으로 신음하는 현실과 그런 신산한 현실을 이기고 제 모습을 지키는 산사에서 그는 조선과 자신의 미래를 엿보았던 것이다.

때문에 산사에 오니 넋과 뼈까지 상쾌한 기분으로 떨려오는 것이다.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이채는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 휴식과 한가로움은 망중한(忙中閑)이면서 정중동(靜中動)의 역동성을 띤다. 궁극적으로 그는 불교와 산사의 존재 의미를 긍정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