幽人謝塵事  숨어 사는 그대 세상일 버리고서
高臥白雲中  흰 구름 속에 높이 누워 있구려.
雲來本無心  구름은 올 때도 본래 마음이 없듯이
雲去忽無蹤  갈 때도 홀연 자취를 남기지 않지.
日夕自怡悅  하루 내내 절로 기쁘고 즐거우니
氣味與之同  기미가 더불어 하나가 되네.
我來逢玉雪  내가 와서 하얀 눈을 만나니
得以挹高風  높은 풍모를 잡을 수 있었네.
可思不可見  생각할 수는 있어도 볼 수는 없나니
雲深山萬重  구름은 깊고 산은 첩첩 만 겹이로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와운산인의 시권에 쓰다(題臥雲山人詩卷)>

정도전은 여말선초(麗末鮮初)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살다 간 사람이다. 어머니가 노비 신분이었다는 한계 때문에 고려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뜻을 이루기 어렵게 되자 그는 과감하게 기존의 틀을 벗어던졌다.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정치적 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가 이루고자 한 새로운 나라가 신분 차별 없이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원칙과 윤리가 살아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었음은 분명하다. 친구와 스승, 후배 등 많은 귀중한 가치를 희생하면서까지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세운 나라의 면모가 정착되기도 전에 비명횡사했다. 정권의 분배란 그래서 여전히 아득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정도전은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국가 건설을 기치로 내걸면서 그 사업의 일환으로 󰡔불씨잡변(佛氏雜辨)󰡕이란 책을 저술했다. 불교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인 맹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한 이 책은, 물론 아전인수격의 방어 논리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상식에 의존한 반론 등이 한계이긴 하지만, 성리학 이념의 완성을 위해 그가 분투한 사실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 그의 이런 불교 비판은 함허득통(得通涵虛)이라는 걸출한 선승을 만나 <현정론(顯正論)>에 의해 극복되었다.

이런 삶을 보면 정도전은 마치 배불론자고 반불교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명분 때문에 불교에 대한 이론적 비판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역시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를 산 지식인이었고, 또 부처의 가르침이 담은 확고한 진실과 궁극적인 해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문집에 남아 있는 여러 편의 불교 관련 시문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5언고시는 와운산인이라는 한 스님의 시권(詩卷)을 읽고 그 감상을 적은 작품이다. 시권이란 아직 정식으로 판각되지 못하고 원고 상태로 보관중인 작품들을 일컫는 말이다. 시를 필사한 종이를 이어 두루마리처럼 만들어 지녔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 당시 시승들은 이렇게 자신이 쓴 작품을 정리한 시권을 가지고 다니다가 시명이 있는 사대부 문인을 만나면 보여 그 성과에 대해 자문했던 것이다. 이런 시권들의 대부분은 판각되지 못하고 스님의 바랑 속을 떠돌다가 사라졌지만, 시권의 작품을 노래한 시들은 지금도 많이 전하고 있다. 옛 스님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시로 표현하는 일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시권시의 특징은 물론 시의 풍격을 노래하는 것이지만 그 스님의 법명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도전도 부탁한 스님의 법명인 ‘와운(臥雲)’을 바탕으로 시세계의 규명을 풀어나가고 있다.

구름이 푸른 하늘에서 홀연히 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룩하겠다는 마음, 즉 욕망을 없는 모습이라고 그는 인식한다. 또 사라질 때도 자취를 남기지 않으니 대자연의 기미와 어우러져 전혀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무집착(無執着)의 진면모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보았다. 그런 구름의 생태를 따르려는 스님의 법명에서 정도전은 스님의 시가 어떤 경지에 올랐는가를 제대로 간파했다. 옥설(玉雪)이 이 스님의 또 다른 법명인지 아니면 옥처럼 푸른 기운을 머금으면서 은은하고 눈처럼 하얀 청정한 구름을 상징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에서 스님의 높은 풍모가 그대로 드러났다고 시인은 갈파한다. 상상할 수는 있어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세계, 그것이 바로 스님이 이룩한 시의 본색(本色)이라는 말이다. 그런 상상의 눈으로만 가시화되는 세계이기에 그는 이런 시세계를 묘파하면서 다시 한 번 구름은 깊고 산은 천 겹 만 겹 첩첩으로 쌓여 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걸어서 가기는 어렵지만 깨달음의 힘으로 간다면 백지 한 장 차이라는 정도전의 생각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