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木絢紅葉  나무마다 붉은 잎을 둘렀는데
祇園淨素秋  가람은 밝고 깨끗한 가을일세.
入門淸磬發  산문을 들어서니 맑은 풍경소리 들리고
移席白雲留  자리를 옮기니 흰 구름이 머무는구나.
塔聳天應逼  탑은 우뚝하여 하늘은 응당 가까워졌고
泉鳴境轉幽  샘물소리 울려 지경은 더욱 그윽해졌네.
醉來從落帽  취한 뒤에 비록 모자를 떨어뜨리더라도
風急莫深愁  바람이 빠른 것이니 어찌 깊이 근심하겠는가.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의 <9월 9일에 중흥사에서 짓노라(九月九日 重興寺作)>

手栽叢菊繞階斜  손수 심은 국화 떨기가 섬돌을 비껴 둘렀는데
花欲開時不在家  꽃이 피려는 할 때에는 집에 있지를 못하네.
贏得游人歸思切  떠도는 사람이 되어 고향 갈 생각 간절한데
禪房霜後數枝花  선방에서는 이슬 내린 뒤 몇 송이가 피었구나.

-<각화사에서 국화를 보고는(覺華寺見菊花)>

曠野草如積  너른 들판에 풀은 우거졌는데
禪宮有廢基  선사(禪寺)는 무너져 터전만 남았네.
時看行路客  때로 지나가던 나그네가 보고는
下馬讀殘碑  말에서 내려 쓰러진 비문을 읽어보네.(1)

水雲澹落日  물과 구름은 노을 속에 담담하고
秋草埋殘碑  가늘 풀 아래 쓰러진 비는 묻혀 있네.
至今弘慶寺  지금까지 홍경사에는
唯有白家詩  오직 백가의 시만 남았구려.(2)

-<홍경사 비석을 보고(弘慶寺碑)>

한글 장편 소설인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쓴 조선 중기 때의 소설가 김만중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글소설도 썼지만, 꽤 많은 양의 한시 작품도 남겼고, 󰡔서포만필(西浦漫筆)󰡕이라는 비평집을 통해 우리 한글 문학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김만중은 태어나던 해에 터진 정축호란 때 아버지 김익겸(金益謙)이 순절했기 때문에 유복자로 성장했다. 어머니는 궁색한 살림을 살면서도 두 자식의 교육을 위해 필요한 서책이라면 값을 아끼지 않고 구해 주었고, 이웃에 사는 관리를 통해 책을 빌려 손수 필사해 교본을 만들어 학문에 힘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탓에 김만중은 어머니의 감화를 받아 어릴 때부터 불교와 친숙했다. 여기서는 그의 한시 가운데 사찰과 관련된 세 편의 작품을 읽어본다.

첫 번째 작품은 중양절(重陽節) 날 중흥사에 가서 지은 것이다. 중양절은 음력 9월 9일로, 지금으로 따지면 추석(秋夕)에 해당하는 명절이다. 가을 날 산사의 아름다운 경치와 흥치가 잘 담긴 작품이다. 무엇보다 대구(對句)가 적절해서 그의 남다른 한시 소양도 알게 해준다. 산사에 들어서자 풍경소리가 맑게 울리고, 자리를 옮기니 구름이 따라 온다는 비유는 산사의 유유자적한 정취가 생동감있게 그려져 있다. 마지막 미련(尾聯)에는 중양절을 대표하는 고사가 나와 흥미를 끈다.

중국 진(晉)나라 때 환온(桓溫)이 음력 9월 9일에 용산(龍山)에 올라 연회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맹가(孟嘉)도 참석했는데, 술에 취해 바람에 모자가 날려 떨어지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자 환온이 손성(孫盛)에게 그를 놀리는 시를 짓게 했는데 그 시에 답한 맹가의 시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 고사를 살짝 비틀어 바람이 거세 모자가 떨어진 것인데 때문에 무엇 때문에 걱정하느냐면서 탈속을 지향하고픈 심경을 담고 있다.

두 번째 시에 나오는 각화사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태백산에 있는 사찰이다. 물론 이 시에 나오는 각화사가 그곳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김만중의 생애를 더듬어 확인해 볼 일인데, 그가 1671년(현종 12)에 암행어사가 되어 삼남지방을 순시한 적이 있었으니, 혹시 이때 경상도 봉화를 다녀갔을 가능성은 있다.

이 시에서 그는 타향살이의 쓸쓸함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 김만중은 일생이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다. 정쟁에 휘말려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치렀고, 결국 머나먼 해도(海島) 남해 섬에서 유배의 삶을 살다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 시는 그런 고단한 그의 삶의 한 편린이 잘 드러나 있다. 직접 심은 국화꽃이 꽃망울을 터뜨렸는데도 그는 여전히 타향 땅에 살고 있다. 중양절이 되면 타향에 있던 사람도 귀향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 가지 못하고 대신 산사를 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심은 국화를 보면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두 수로 된 세 번째 시에는 조선시대 불교가 배척을 당하면서 벌어진 사태가 은연중에 드러나 있다. 홍경사는 충남 천안시 성환면 대흥리에 있는 사찰인데, 국보 28호로 지정된 봉선홍경사갈(奉先弘慶寺碣)이 있다. 김만중 당시에는 절도 폐사되고 비석만 땅에 반쯤 묻혀 버려져 있었다. 김만중은 그 무너진 절터와 비석을 보면서 흥망성쇠의 현실과 불교의 쓸쓸한 현주소를 그려내고 있다.

두 번째 작품 끝에 나오는 ‘백가의 시’란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이 남긴 5언절구를 말한다. 그 역시 홍경사를 지나가다가 비슷한 주제의 시를 남겼다. 이 시를 읽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秋草前朝寺  지난 왕조 때 절이 가을 풀에 남았는데
殘碑學士文  무너진 비는 학사의 글이로다.
千年有流水  천 년 세월에 흐르는 물만 남았는데
落日見歸雲  노을 속에서 떠도는 구름을 보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