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 무엇인가? 길이다. 방법이다. 언행, 즉 말과 행동을 할 때 바른 길에 따라 하면 그게 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팔정도가 있나 보다. 내가 우선순위가 되어 나를 먼저 앞세우면서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도가 아니다. 그냥 그 길에 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두가 함께 가야할 곳에 나만 서 있다. 남들은 기어가도 길로 못가도 상관이 없다. 멸사봉공이나 선공후사가 아니다. 결국 나뿐인 사람이다. 나뿐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왜 도까지 들먹이는지 모르겠다. 종정이든 방장이든 조실이든 선원장이든 나를 앞세우는 인간은 다만 권승일 따름이다. 부처님의 제자도 아니다. 부처님 팔아먹는 즉 부모와 같은 부처님을 살해한 ‘존속살인죄’를 저지른 죄인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멋모르고 도인이니 선지식이니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렇게 바라볼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스스로 왜 그런지 살펴야 한다. 조고각하이다. 대체 뭘 바라고 그렇게 칭찬하고 있는지?
사실 말과 행동은 혼자 수행할 때 필요한 도구가 아니다. 묵언수행하면서 용맹정진하면 된다. 그런 나 혼자 외로운 수행의 길을 걷는다면 말과 행동 가운데 뭔가 더해야 하는 게 정말 있단 말인가? 단호하게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말과 행동은 내가 아닌 남과 관계 짓는 것이다. 세상과 인연을 맺는 나의 창이다. 그리고 그건 남들의 창이기도 하다. 까닭에 언행에 앞서서 상대방과 주변인에 대한 깊은 배려, 즉 숙려가 필요하다.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즉 내 창 아니 우리의 창을 작게 만들 건지 크게 만들 건지 열기 좋게 만들 건지 닫아버릴 것인지 유리창을 끼울 건지 아니면 창틀만 만들 건지 등등. 이런 배려를 뿌리로 삼아 상대방을 더 맑고 밝은 곳으로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방법을 찾고 또 찾은 후에 그런 길에 대한 자기 확신도 가져야 한다. 그렇게 바르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게 중도이기도 하다. 그렇게 가운데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말과 행동은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 나와 너를 하나로 묶어 우리가 나온다.
100%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자기 확신이라고 해도 51%만 넘으면 된다. 나는 49%로 하고 남을, 아니 나와 남을 포함한 우리를 51% 그것만 해도 충분히 성공한 것이다. 그 길에는 나보다 남이 많게 된다.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고 또 이끌어가고 함께 가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나도 남도 조금씩 더 맑고 밝게 되면 어떻게 될까? 고치고 바꾸고 나아가면 어떻게 될까? 사실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점점 관심이 사라진다. 다만, 가보지 못한 그 길을 흥미진진하게 환희심을 가지고 나아갈 뿐이다. 한걸음 또 한걸음. 가끔 뒤를 돌아보면 내 뒤를 걷는 사람도 있다. 길이 생긴 것이다. 남들을 위한 아니 나를 위해 길을 닦는 이로 난 만족한다. 아니 만족할 수 있으면 된다.
일일이 구체적으로 방법을 전하는 것은 스승이 아니다. 그냥 바보일 따름이다. 영화에서 관객모독이라는 말이 있다. 사제지간에도 ‘제자모독’이 존재한다. ‘스승에 대한 능멸’도 있다. 공부는 혼자서 하는 것이다. 가지치기 정도만 하는 것이 스승이고 스스로 할 공부를 묻지 않고 스스로 하는 것이 제자의 도리이다. 그렇게 스스로 학습하고 일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면 된다. 자기학습이 가능하게 가르치면 좋은 스승이다. 좋은 가르침이다. 좋은 제자고 그런 사람이 좋은 스승이 된다.
육조는 내가 가르친 내용이 아니라 내가 가르친 방법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했다. 내 언행이 상대를 맑고 밝게 해주는 데 관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자리리타행이 시작된다. 그런 수행을 거듭한다면 보살행도 언젠가 가능할 것이다. 바로 그 길에 도가 있나 보다. 아니 길이나 도는 따로 없다. 내가 걷는 그 길이 바로 도이기 때문이다.
해외봉사활동을 특집으로 다룬 TV프로그램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을 만들고 길을 닦으며 땀 흘리는 모습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잘사는 나라의 연예인이 못사는 나라의 수없이 많은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땀을 뻘뻘 흘린다. 그 나라 동네 사람들은 뒷짐 지고 웃으며 보고 있을 따름이다. 봉사 다큐멘터리가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으로 변질된다. 가끔 안타까워하다가 결국 완성되면 고마워하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정말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손을 놓고 노는 곳에서 굳이 우리가 직접 육체적 노동을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고마워한 건 단지 결과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중간 중간 허둥지둥 실수하는 것을 본다는 즐거움을 준 것 때문은 아닐까? 노동력이 넘치는 그곳에서 우리가 할 일이 정말 그것뿐인가? 혹시 보이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닌가? TV에 땀 흘리는 모습을 비추기 위해? 정말 그렇게 일하는 게 맞나?
‘그것도 맞다’가 답일 것이다. 맞다. 그게 틀린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하는 게 더 맞을 수 있다. 같이 만들고 같이 닦는 게 집이고 길이면 더욱 좋다. 혼자만 가면 그건 나쁜 사람이다. 우리는 최소한의 인원만 참가하는 게 맞다. 나보다 남을 많이 해야 한다. 그 시간에 그들이 못하는, 아니 나만 할 수 있는 의료봉사, 문화 봉사를 하는 게 효율성이 크다. 내가 더 잘하는 일을 남에게 나누며 우리가 되는 게 봉사다. 더 잘하는 그들 앞에서 아니 거의 프로 수준의 일을 하는 마을 사람들을 놔두고 굳이 왜 우리나라에서도 못해본 일을 내가 꼭 해야 하는지…….
오히려 그들에게 일당을 주면서 같이 하면서 함께 고민하고 즐거워하고 위로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수십 명이 수억 원을 들어서 굳이 그곳에 가서 공사만 할 필요가 있는가? 어쩌면 참가자 1명만 줄여도 그 항공료에 체재비면 동네 사람들 모아서 마을 큰 잔치를 할 수가 있다. 영양보충 뿐만 아니라 그렇게 서로의 문화도 교류할 수 있다. 아니면 의료기기를 하나 사줄 수 있고. 정수시설도 만들어 줄 수 있다. 학교 선생님 1년 연봉도 줄 수 있다. 그렇게 정말 다양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실제로 한 연예인한테 해외봉사를 같이 가자고 했다. 그렇더니 집 만드는 일은 없냐고 되묻는다. 그런 일을 잘하냐고 물으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그걸 묻냐고 하니, 대답이 예전에 그런 봉사를 간적이 있다고 한다. TV를 의식한 것이다. 나눔의 봉사가 아니라 과시욕이다. 보이기 위한 일은 나눔이 아니다. 나뿐만 생각한 것이다. 정말 그들을 위한다면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국 그런 일을 하는 봉사를 가기로 했다며 미안하다는 문자가 온다. 정말 그런 길을 걷고 싶은가? 대체 무엇을 위해? 그 길에 나만 있으면 되는가? 같이 갈 남이 있고 그 길에서 우리가 되지 않아도 되는 건가?
같은 애기를 했더니 한 고등학생은 친구까지 데리고 가겠다고 한다. 뭘까? 이 받아들임의 차이는. 말랑말랑한 머리. 고정관념이 없기에 벽이 없는 것인가? 남 보이기 위한 봉사 이젠 그만했으면 좋겠다. 봉사에도 길이 있다. 도가 있다. 집을 만들어주고 돈을 주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게 있다. 그들을 모독하지 말고 배려하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면 된다. 그들에게 잘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맞다. 물질적인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맑고 밝게 살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자. 아니 스스로도 찾을 수 있게 보여주면 된다. 아니 그렇게 조금씩 함께 하면 된다. 그렇게 맑고 밝은 우리가 되는 것이 진정한 봉사가 아닐까? 남에게 보이기 위한 봉사는 없다. 오직 나와 남을 포함한 우리의 행복을 위한 나눔이 봉사이다. 봉사에도 도가 있다. 봉사에도 팔정도가 있다.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