皺紙鱗鱗水起紋  종이를 만 듯 물고기 떼에 물무늬 일어나고
近汀河鷺遠山雲  가까운 물가엔 해오라기 날고 멀리 산엔 구름 걸렸네.
知師幻出淸凉境  스님께서 청량한 마음을 그려낸 것을 알겠으니
坐倚風欞到夕矄  바람 부는 난간에 기대 저녁 어스름을 맞노라. (1)

榻上淸風忽滿襟  자리 위의 맑은 바람이 문득 옷깃에 가득 차니
團團璧月照床琴  둥글둥글 고운 달빛이 책상 위 거문고를 비추네.
何時着我孤舟去  어느 때나 외로운 배에 나를 싣고 떠나가서
避暑僧窓坐夜深  승창에서 더위 피하며 밤늦도록 앉아볼 꺼나. (2)

心中熱惱欲燒天  마음 속 뜨거운 번뇌는 하늘을 태울 듯한데
況是沈痾久不痊  하물며 묵은 병이 오래토록 낫지 않음에랴.
且問珠師分我否  묻노니 스님께서 나에게도 좀 나눠주시면
庭前柏樹祖師禪  뜰 앞 잣나무는 조사의 깨달음일세. (3)

                               -이색의 <신륵사에서 주선사에게[神勒珠師] 3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고려말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며 시인이다. 그는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던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진력한 절의파(節義派) 지식인이다. 그는 아버지 이곡(李穀)과 함께 원나라에서 부자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당당한 벌열 가문 출신이면서, 6000편에 달하는 방대한 한시 작품과 20권에 이르는 문집을 남긴 문장가이기도 했다. 사실상 고려 말기의 모든 문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거나 학문을 이은 인물들로, 당시 학계와 정계, 사상계 모든 방면에서 사표(師表)의 위치에 있었다.

이색는 또한 불교와 유교의 관계를 대립의 관계로 보지 않고 상보적인 입장에서 공존해야 할 두 축으로 보았다. 다만 그는 투쟁보다는 타협과 대화를 중시하는 성격이어서 격변했던 여말선초의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못한 한계는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조선을 개국한 세력들도 차마 그를 해치지 못했지만, 아들 이종학(李種學)이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현실을 감내해야 하기도 했었다. 조선시대의 유림에서 조선 유학의 연원(淵源)으로 실질적으로 영도했던 그를 대신해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내세웠던 것도, 그가 친불교적이었고 적극적으로 개국을 반대한 데다 제자들이 조선조 이후에도 학통을 이어왔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하간 이색은 유불 융화를 주장하면서 다양한 불교문학을 남겼다. 그가 배운 성리학(性理學)은 여러 면에서 불교, 특히 선종(禪宗)의 울타리 안에서 발전한 학문이었다. 또한 그의 부드럽고 관조적인 성격이 불교의 교리와도 잘 맞았고, 이단(異端)에 대해 매몰찬 유가 지식인들보다는 대상을 조화롭게 수용하고 공존을 표방하는 불교는 흔들리는 그의 심성을 바로잡아 주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그는 불교와 승려들에 대해 동지는 아니더라도 동류의식(同類意識)은 느끼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읽을 이색의 작품은 경기도 신륵사에 계셨던 한 스님에게 준, 세 편의 7언절구로 된 연작시인데, 구도자로서 이색의 자세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신륵사는 이색의 세거지(世居地)인 경기도 여주(驪州)에 있는 유서 깊은 사찰로, 이색은 자주 이 절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강을 발아래 두고 길게 펼쳐진 신륵사의 풍광은 절로 시심(詩心)을 자아낼 만한데, 그래서인지 신륵사를 노래한 작품은 이색의 작품 외에도 상당수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 작품은 신륵사 일대의 아름다운 경관을 노래했는데, 청정한 모습이 스님의 마음을 그대로 그려낸 것 같다고 한 말에서 이색이 스님에 대해 느끼는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두 번째 작품은 역시 산수자연을 묘사하지만 신륵사가 갖고 있는 내면세계의 깊이를 은근히 비유하고 있다는 데 다른 묘미가 있다. 번뇌를 상징하는 무더위를 피해 어서 빨리 산사로 가서 심신의 피로를 씻고 싶다는 표현에는 시인의 열망이 잔잔하게 녹아 있다. 마지막 작품에서 이색은 구체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다. 번뇌의 열기도 하늘을 태울 듯 뜨거운데, 마음의 병은 쉽게 낫지도 않으니, 그가 얼마나 큰 중압감과 고뇌 속에 힘겨워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 세속의 번뇌를 모두 잊고 해탈의 경지에 든 스님에게 자신에게도 그런 마음의 평화를 나눠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 번뇌의 감옥을 나올 열쇠로 화두(話頭)를 말한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는 당나라 때의 선승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이 내놓은 유명한 화두다. 견고한 의단(疑團)을 참구(參究)해 완전히 깨쳐서 해탈의 길로 이끄는 화두의 효과를 이색은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색의 불교시에는 이런 화두에 관한 구절이 종종 나온다. 이미 그의 시대에 간화선(看話禪)이 일반화되어 일반 신도들까지도 이를 즐겨 수행의 방법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신륵사의 주선사는 이색에게 단순히 산사에 있는 스님의 역할에만 머물지 않는다. 스님은 구원과 해탈의 안내자로서 기능한다. 시인은 진지하게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면서 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스님에게 묻는다. 당대 최고의 유가 지식인이 불교의 선사에게 보여주는 이러한 태도를 통해 고려 말 지식인 계층에 끼쳤던 불교의 위상과 영향을 헤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