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里長天斷鴈秋 만 리 긴 하늘에 기러기 행렬도 끊긴 가을날
閑尋古刹碧波頭 한가롭게 옛 절을 푸른 물가에서 찾노라.
喧喧門外千帆集 문 밖에는 수천 척 배가 모여 떠들썩해도
寂寂岩陬丈室幽 바위 구석의 선방은 고즈넉이 그윽하네.
滿院松篁僧富貴 절에 가득한 소나무 대나무는 스님의 부귀요
一江煙月寺風流 강에 가득한 안개와 달빛은 절의 풍류로세.
莫言林下何曾見 숲에서 일찍이 무엇을 보았는지 묻지 말라
擺却浮名欲退休 뜬 이름 던져버리고 물러가 쉬려고 하네.
-이규보의 원흥사에서[元興寺]
山僧貪月色 스님이 달빛이 너무나 어여뻐서
幷汲一甁中 우물물 긷다 함께 달빛도 떠 왔네.
到寺方應覺 절에 닿으면 분명 깨달으시겠지
甁傾月亦空 병 기울여 물 따르면 달도 또한 비는 것을.
-산사의 저녁 때 우물 속 달을 노래함[山夕詠井中月]
사진= 장명확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살던 시대는 무신의 난이 터져(1170년) 문신들이 핍박을 받는 시대였다. 그리고 이후 몽고와의 기나긴 항쟁이 시작되면서 본토를 떠나 강화도로 천도를 해서 항몽(抗蒙)의 국면이 고착되는 때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민족에게는 고난의 시기였다. 이규보 역시 난세를 산 지식인으로서 많은 고민과 번뇌를 안고 살았다.
문신들이 무신들에 의해 참살을 당하는 와중에서 그는 비교적 정치적으로 성공의 길을 걸었다. 무신집권기에 그는 최씨 정권의 비호를 받아 상국(相國), 조선조의 영의정에 해당하는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으로서는 영광이었지만, 핍박받는 동료 지식인들을 생각하면 변절 또는 훼절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완전히 무신정권에 흡수되지도 못하고, 철저하게 항거하지도 못했던 이규보는 또 다른 고통의 소용돌이 속을 헤매야 했다. 이런 그에게 큰 위로와 안식을 준 것이 바로 불교였다.
그가 남긴 많은 불교시 가운데 사찰을 노래한 작품과 그의 오도(悟道)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 각 한 편을 읽어보도록 한다.
지금은 어느 곳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절이지만, 원흥사는 분명 저자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 밖 강물을 따라 수많은 배들이 지나다닌다는 것은, 시적인 과장이라고 해도 완전히 속세와 떨어진 곳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렇게 헌사로운 곳에 자리 잡았지만, 사찰은 수행 공간, 기도처로서 사격(寺格)을 잘 유지하고 있다. 시끄러운 포구가 곁에 있어도 선방은 고요 속에 잠겨 있다. 귀로 들리는 소음이 이곳에서는 마음에까지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소(聖所)로서 절이 주는 도도한 무게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절은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그 자연의 넉넉한 품안에 깃들여 있다. 5⋅6구의 대구는 사찰의 풍성한 여유와 아름다운 풍경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절을 둘러 자란 소나무며 대나무는 스님들의 부귀이고, 강을 둘러 피어나는 안개며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은 절의 풍류라고 시인은 지적한다.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의 눈에는 자연이 주는 부귀를 누릴 여유가 없다. 쓰고 써도 다함이 없는 자연의 재화인 소나무와 대나무를 마음껏 즐길 수 있으니, 스님은 속세의 누구보다 더 큰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시인은 너스레를 떤다.
게다가 날마다 피어나는 안개와 밤이면 사찰을 적시는 달빛은 절집에 딱 어울리는 풍류를 제공한다. 그야말로 안개와 달빛은 부르지 않은 귀한 손님인 셈이다. 속세의 북적거림도 다 떨치고 고요한 선방에 앉아 깊은 내면세계와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이 주는 온갖 사치와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곳에 들어선다면 아무리 속세의 때에 전래 사람이라도 절로 수행승의 마음가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산사에서 일찍이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묻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인 것이다. 그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는, 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입으로 설명해서 전할 수 없는 보배를 어떻게 알려주겠는가, 자네도 이곳에 와서 며칠 지내보도록 하게. 그러면 절로 내가 뭘 보고 들었는지 알게 될 것이야.” 이렇게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다. 그리하여 시인의 간절한 소망은 세상의 헛된 부귀공명을 다 털어 버리고 이곳으로 귀의해서 지친 심신을 푹 쉬고 싶은 곳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 작품은 5언절구지만, 색(色)과 공(空)에 대한 시인의 진지 성찰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달밤에 우물물을 길으러 온 스님이, 문득 우물 속에 비친 고운 달빛에 매료되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이놈을 따 가야겠다고, 샘물과 함께 달빛도 길어 가지고 산사로 돌아왔다. 내심 달빛을 길었다고 스님은 흐뭇해 할지 모르지만, 병 속에 든 물을 다 붓고 나면 달빛도 비게 될 것임을 깨달을 것이라고 시인은 조금 빈정거린다.
달빛이 색의 세계라면 텅 빈 병 속은 공의 세계다. 그러나 다시 물이 차면 달빛은 떠오르게 된다. 그야말로 공과 색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담긴 가르침을 시를 통해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스님이 색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달빛이 고와 물동이에 담고 오려는 마음은 천진난만한 동심(童心)이 없다면 불가능한 상상이다. 고운 달빛을 안고 오면서 흥겨워 하는 스님과, 그런 스님을 보면서 “아직 생과 공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군.” 하며 분별심에 사로잡힌 시인을 대조한다면 누가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 역시 그런 대조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를 역설적으로 잘 갈무리해 놓았다는 점에서 대문호로서의 경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