釋門何蕭索  우리 불가의 문턱이 어찌 이리 쓸쓸한지
今我獨悲傷  지금 내 홀로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노라.
大鵬潛不起  붕새(큰 스님)는 가라앉아 일어나지 못하고
鷦鷯竟翶翔  뱁새며 굴뚝새들이 기가 살아 날아다니는구나.
巧言引檀越  교묘한 말로 사부대중을 유혹하면서
終日事祈禳  제사 때 독경 소리로 하루해를 보내네.
設利何太盛  이익을 벌여놓은 꼴이 어찌 이리 풍성한지
窣堵滿道傍  사리탑만 길가를 가득 메우고 있네.
資斧爲衣鉢  여행 때 쓸 도끼가 의발인 양 전해지고
傳法儘多方  법을 전한다는 말은 가는 곳마다 그득하네.
禪林遂寂寞  마침내 선림은 적막강산이 되었으니
宗風久凄凉  종풍에 찬바람 분 지도 벌써 오래라네.
顧余斗筲器  돌아보면 나 또한 종지밖에 안 되는 근기니
奚殊拒轍螳  전차 바퀴를 이기려 했던 사마귀와 뭐가 다르랴.
徒消十方施  한갓 시방세계에서 주는 보시를 허비하면서
名寺徧徜徉  이름난 명찰을 두루 밟아보았지.
叨濫集上流  외람되게도 훌륭한 인재들을 모아 가르쳤고
結交皆老蒼  인연을 맺은 분들은 모두 노스님들이었지.
虛名滿一隅  헛된 이름이 한 구석에 가득해서
如今出處妨  이제는 들고 나가는 일조차 방해하는구나.
事業未淸秀  하는 일은 맑고 빼어나지도 않았는데
身世反蒼黃  처지는 어느새 늙어가는 몸이 되었네.
雜華常爛漫  잡스럽고 번화한 일 항상 많았으니
苦海正汪洋  고해에 빠져 물결 속에서 허덕거렸네.
津梁久已阻  진리의 나루터는 끊긴 지 오래려니
誰能泛慈航  누가 능히 자애로운 배를 몰고 가겠는가.
何當得圓機  어떻게 하면 원만한 선기(禪機)를 얻어
殘年與頡頏  남은 생애나마 잘 타고 넘어갈까.

-아암혜장(兒菴惠藏, 1772-1811)의 <색성과 자홍 두 상좌승에게(示賾性慈弘兩比丘)>

아암혜장 스님은 조선 후기 정조 치세 후반에 태어나 세도정치 시대 초기를 살다갔다. 스님은 고작 40년의 짧은 세수(世壽)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지만, 대흥사에 주석하면서 동시대 고승인 백파긍선(白坡亘璇)과 초의의순(草衣意詢) 사이에서 정신사적 맥락을 잇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너무나 이른 죽음으로 많은 저서나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어도, 현전하는 시문만으로도 우리는 스님의 가치를 충분히 논할 수 있다.

스님의 한시에 보이는 자연풍광에 대한 청아한 관조 자세와 꾸밈없는 진솔한 묘사는 사경시(寫景詩)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성과로 판단된다. 또한 많지 않은 글 속에 불가의 입장에서는 외전(外典)이라 할 수 있는 󰡔주역󰡕과 󰡔논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문답체의 글도 있어 유불선(儒佛仙)을 함께 아우른, 지식인으로서의 위상도 살펴볼 수 있다.

스님은 1772년에 태어나 18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젊어서 일군 학문적 울력을 꽃피우기 시작해야 할 나이에 갑자기 열반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워낙 짧은 생애를 살다보니 실제로 이루어놓은 교학상 입론이나 세속적 업적도 적을 수밖에 없고, 생애를 조감할 수 있는 자료 역시 많지 않다.

스님의 속성은 김씨고, 소자(小字)는 팔득(八得)이며, 혜장은 그의 법명이다. 자는 무진(無盡)이고, 본호는 연파(蓮頗)로, 새금현(塞琴縣) 화산방(花山坊, 지금의 해남군 화산면)인데, 옛날 백제의 남쪽 변방에 있던 고을이다.

스님이 태어난 곳은 외딴 마을인 데다 집안 또한 가난해서 어렸을 때 출가하여 대둔사에서 삭발을 하고 춘계천묵(春溪天黙) 스님 밑에서 배웠다. 천문스님은 외전을 널리 통달한 분으로, 아암은 무리를 뛰어넘는 출중한 지혜로써 배운 지 몇 년 만에 명성이 총림(叢林)을 울리게 되었다.

스님은 여러 스승을 좇아 경전을 배웠는데, 항상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경청했지만 문밖을 나서면 문득 입 속으로 ‘흥!’하고 비웃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오직 연담(蓮潭) 스님의 수차(手箚)와 구수(口授)를 대할 때만은 그러지 않았다. 나이 서른에 두륜산의 대회에서 주맹(州盟)이 되었는데 이 때 모인 사람이 백여 명을 넘었다.

스님은 외전 가운데에서도 특히 <주역>과 <논어>를 좋아해서 책 속에 담긴 뜻을 낱낱이 살펴 한 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했고, 기윤(奇閏)의 수나 율려(律呂)의 도, 성리학 관련 여러 서적에 이르러서도 정밀하고 정확하게 익히고 이해해서 변변찮은 선비라면 도저히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점을 당시 강진에 유배와 있던 다산 정약용도 높이 평가했다.

스님은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아 평소 쓴 작품이 거의 없었다. 또 그런 일을 달갑게 여기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시를 써주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좇아 화답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했다. 병려문에 더욱 능통하여 율격이 엄정했고, 불교 경전 가운데에는 󰡔능엄경󰡕과 󰡔기신론󰡕은 좋아했지만 조경(竈經)이나 측주(厠呪) 따위는 입에 올리지 않아 스님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스님에게는 의발을 전한 제자가 넷 있었다. 수룡색성(袖龍賾性)과 기어자홍(騎魚慈弘), 철경응언(掣鯨應彦), 침교법훈(枕蛟法訓)이 그들이다. 오늘 읽는 작품은 그들 가운데 색성과 자홍이란 두 제자에게 준 시다. 스님이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마음에 품어둔 회한과 자탄, 그리고 자성의 목소리가 한 몫에 터져 나오고 있다. 다소 긴 고시이긴 하지만, 아암 스님의 마음을 읽기에 더없이 좋은 자료라 생각된다.

의발을 전한다는 것은 곧 그 깨달음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이 시는 스님 자신의 여러 가지 소감과 함께 현하 불교계의 병폐, 올바른 길을 걸어가라는 경책(警責) 등 여러 가르침이 실려 있다.

스님이 살던 시대는 노골적으로 유림이 불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부당성을 토로하기에는 위험이 상존했다. 엄연히 유불 사이에는 신분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유가 사대부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함께 어울리는 것은 인정해도 권리를 찾겠다고 나서면 눈에 불을 켜는 사람들이 유가였다. 그런 세태 속에서 살아야 했던 스님의 심경은 속으로만 곪아 들어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