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0일 동국대 정각원으로 향했다. 토요법회가 봉행되고 있었다. 1부 기도법회가 끝나자 정각원장 법타 스님이 2부를 이끌 한 신도를 호명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를 쪽진 이가 대중들 앞에 마이크를 잡았다.
스스로를 “권영순(법명 日古聲, 사진)”이라고 소개했다. 동국대 평생교육원에서 한지 공예를 가르치고 있으며 입고 있는 한복도 한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스님은 합창단원이라는 그의 이력을 소개했다. 서울 아셈(아시아유럽정상회의)․인천국제공항 개항축하전시회(대한항공)․세계박물관대회 등의 초대작가, 동국대․경희대․인천인하대 평생교육원 등의 교수 등등. 성공적 삶을 회고하거나 자신의 지식을 펼치기에도 충분한 이력이었다.
그런데 발표의 주제는 뜻밖에 ‘엄마로 산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엄마로서의 삶을 얘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여러분에게 저희 엄마 얘기를 할까 합니다. 어머니는 청량사와 영주 부석사에서 1095일 동안 기도해 저를 낳으셨습니다. 제가 100일 됐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항상 당당하셨습니다. 솜씨, 맵씨, 말씨, 글씨, 마음씨 등 여자의 다섯 가지 예절을 강조하셨습니다.”
권 교수는 어머니와의 추억을 회고할 때만큼은 71세가 아닌 어린 소녀가 돼 있었다. 18세 때 처음 만든 엉터리 죽밥이 어머니의 마지막 식사였다고 말할 때까지는 말이다.
“어머니가 떠나고 그리움과 후회의 시간들이 찾아왔습니다. 맹장 수술 후 맨발로 피투성이가 돼 엄마 무덤을 찾기도 했어요. 저는 한 아이를 눈물로 떠나보낸 후 어머니를 닮아 용감하게 일어나 세 아이의 엄마가 됐습니다. 그리고 제 딸도 저를 닮아가는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엄마 얘기에 모든 시간을 할애한 권 교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그의 아들과 딸, 외손녀가 대중 앞으로 나왔다. 셋은 서로를 의지한 채 ‘엄마로 산다는 것’을 불렀다.
“그 모든 걸 다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 엄마, 엄마로 산다는 것은/ 아프지 말거라, 그거면 됐다”는 가사에 권영순 씨와 아들딸이 눈물지었다. 문득 성공적인 삶을 산 권 씨의 엄마로서의 삶이 궁금했다. 그래서 법회 후 다시 만나기로 했다. 적어도 권 씨라면 엄마 얘기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권 교수와 두 번째 만남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궁금증을 풀어냈다. 프로필 상이 아닌, 그의 삶이 궁금했다. 그는 먼저 자신을 “45년생 행운아”라고 소개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저는 며느리 둘, 사위 하나가 있어요. 손주 8명이 모두 자연분만으로 태어나 모유 먹고 자랐어요. 그것만 해도 남부럽지 않아요.”
그의 기쁨은 소박한 데 있었다. 평범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불자였던 자신의 엄마로부터 비롯됐다고 강조했다.
“어머니의 유언은 ‘무엇을 바라면 다른 하나를 가져간다. 서 있고 말하는 게 기적이다. 부처님 앞에서 절하고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였어요.”
그는 어머니 유언대로 ‘최고의 성공은 가정의 행복’이라고 여겼다고 회고했다. 아이들의 도시락을 쌀 땐 반찬 12가지를 올릴 만큼 정성을 다했다. 전날 밥에 검은콩으로 하트를 그리면 다음날엔 빨간콩, 이튿날은 파란콩을 올렸단다. 남편과 자녀들이 집을 나서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고 했다. ‘부디 오늘 하루 잘 보내고 안녕히 돌아오라’는 손짓이었다고 했다.
10일 권영순 씨가 동국대 정각원에서 봉행된 법회에서 대중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추억하며 강연하고 있다.
“110평 되는 집에서 혼자 손님 70명을 치르기도 했어요. 빵과 수제비, 칼국수 내 놓느라 어떤 날은 밀가루 8포대를 쓴 날도 있죠. 집수리 때도 인부들과 벽돌․모래를 같이 날랐어요. 나이 많은 사람은 오빠, 아버지고, 어린 사람은 동생으로 여기라는 어머니 가르침 때문이에요. 인부들이 오빠, 동생인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요.”
그는 바삐 살다보니 앞날을 계획할 틈조차 없었다고 회고했다. 오직 당시 주어진 일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게 전부였다고 털어놨다. 갱년기도 몰랐을 만큼 바빴다는데 짐작이 쉽지 않았다.
“20여 일간을 잠을 안 잘 수 있을까요? 되더라구요. 2000년 서울 아셈(아시아유럽정상회의) 초대작가로 초청돼 전시 준비로 22일 잠을 못 잤어요. 그때 남편이 암에 걸려 오늘내일 할 때예요. 남편이 ‘아셈행사는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다’면서 자식들을 설득해줘 전시 준비를 했어요. 그것도 3,800만원의 사비를 들여서요. 오직 여러 나라 대통령 앞에 우리나라 문화를 알리는 데 일조하겠다는 생각에서죠.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거 같아요. 무엇보다 남편과 아이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오늘의 저는 없어요.”
계획 없이 그때그때 열심히 살았다지만 계획한 것처럼 미술가로, 교수로 성공을 거두지 않았나. 권영순 씨는 앞서 밝힌 이력 외에도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안동 유천한지미술관장을 역임하는 등 경력이 화려했다. 이에 권 교수는 “사회의 성공을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강조했다. “단 한 번도 이력서를 낸 적이 없었다”지만 길이 자연스럽게 열렸다는 것이다.
“교수는 꿈도 꾸지 않았어요. 세속의 성공을 따라가려면 매우 힘들었을 거예요. 안 되면 좌절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경희대, 동국대, 서울대 등의 평생교육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는 이런 ‘호운’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도, 부처님의 가피력 때문이라고 믿었다. 또 미리 계획하지 않았고, 주어진 일을 즐겁게 받아들였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래도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법이 궁금했다.
“가장 중요한 건강에 투자하세요. 자기 이름에 책임지세요. 자식 학원 보내지 마세요. 스스로 느낄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에요. 조급하면 빗나가요. 그 돈과 마음과 시간을 자신을 위해 재투자하세요. 무료강좌가 많은 시대이지만, 여러 공부 하지 마세요. 행복한 공부 한 가지만 선택해 10년 공부하세요. 다른 사람이 부를 때 바로 뛰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요.”
‘여자’로서가 아닌 ‘엄마’는 끝없는 사랑과 헌신을 강요당하지만 권 교수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시간과 돈을 기꺼이 투자하라고 조언했다. 학업 정보와 학원 보내기는 ‘완벽한 엄마’의 필수 항목이 된 시대지만 오히려 이를 거부하라고 외쳤다.
자신은 ‘늘 행운이 따랐다’고 표현했지만 실상 권 교수는 탄탄대로의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18세 때 이미 두 부모를 여의었고, 결혼 후 한 자식을 떠나보냈다. 큰아주버님 부도로 다락방으로 이사를 가기도 했고, 고인이 된 남편은 10년 간 8번에 걸친 대수술을 받으며 병수발을 들었다.
“누구나 고통을 겪죠. 하지만 고통은 사람에 더 가까워지기 위한 단계예요. 그 순간을 지혜롭게 처리하는 건 자기 몫이죠. 저는 이제 겨우 사람이 되는 길목에 서 있을 뿐이에요.”
‘나는 좋은 엄마인가’란 회의와 불안으로,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엄마들, 장애인, 싱글맘, 다문화가정, 새터민 등의 처지로 삶이 어려운 이들에게 조언을 요청했다. 이에 권 교수는 마음을 바꾸라고 답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겨’가 아니라 ‘내가 더 큰 사람이 되라고 이런 일이 생겼구나’라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분들은 조건이 좋다”면서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들보다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할 것인가 그것만 생각하면 이미 미래는 보장됐다”고 부연했다. 이어 “어떤 어려움도 다 당하라”라면서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 발전을 이끌면 내 나이 때 자기가 ‘명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영순 씨가 10일 동국대 정각원에서 자신의 강연이 끝나고 막내 아들과 외손녀, 둘째 딸의 '엄마로 산다는 것' 노래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평소 엄마로서 자녀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점은 ‘검소’라고 단언한 그는 “논현동 110평에 살았지만 그 동네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연탄보일러를 썼고, 물 아끼기를 강조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노트를 쓰면 표지 뒷면부터 쓰게 하는 게 철칙이었다. 강남의 그 큰집에서 풍족하게 살았을 법한데 왜 그랬을까. 그는 이야기를 꺼내며 또 어머니를 추억했다.
“어머니는 배부르면 음식이 고맙지 않지만 소식을 하다 밥을 먹으면 감사함을 느끼기에 항상 소식을 강조했어요. 절약하고 소식하면 마음도 비워져 다른 이의 좋은 말도 다 담기게 마련이죠.”
또 아이들에게 “풀잎 하나도 어떤 사람의 기도로 태어났을 것”이라면서 “풀도 사람의 생명처럼 소중하고 필요한 존재이니 함부로 꺾지 말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대해 “내 남편을 믿고 따르려면 시부모도 최고로 대우하라”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7남매 중 막내며느리로서 시어머니를 모셨다는 그는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낳아준 어머니는 당연히 감사한 존재”라면서 “어머니가 어떻게 나를 대하든 똑같은 마음으로 진심을 다하니 결국 제 편이 되더라”고 회고했다.
권 교수는 “이제야 엄마라고 말할 수 있는 선에 들어온 거 같다”며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말했다. 엄마들은 무엇보다 건강하고 변신에 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자들은 아내, 엄마, 딸, 며느리, 회사직원 등 수많은 역할을 감당해야 하잖아요. 무엇보다 정신과 육체가 건강해야 해요. 또 여자가 할 일에 변신을 잘해야 해요. 자식에게는 아이처럼 소통하고, 남편에게는 미스 때처럼 행동하는 거죠.”
그는 여성들이 남편들을 믿고 사랑하는 만큼, ‘돈만 벌면 된다’는 마인드를 버리고 아내의 고민이 뭔지 함께 고민하라고 충고했다. “두 부부가 함께 오래 사는 것이 가장 명예롭게 사는 것”이라면서 “보물 1호가 서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내의 공로를 인정해야 하고 자식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권 교수는 이제 제3의 인생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전시회 준비로 한창이었던 지난해 8월 지인에게서 받은 버섯을 먹고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깨어났기 때문이다. 이후 시간들은 그에게 ‘새로운 삶’으로 펼쳐졌고, 여생을 ‘사람 되는 일 서서히 해 보려고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21세기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른들이 건강해져 자기 재능을 자식들이 앞으로 살아갈 이 아름다운 나라에 펼치고 가야죠.”
권 교수는 건강한 사회가 되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2006년부터 아이들과 어른들의 건강을 위해 중랑구 봉화산공원과 개인 연구실 근처 태권도장에서 태극권 강좌를 무료로 운영해오고 있다고 했다. 현재 동국대 교수합창단과 중림복지관에서 100세 건강태극권 교실을 이끌고 있는 그는 2005년 중국 태극권 직계 6대 전수자 안덕해 선생으로부터 사사 받은 바 있다.
권 교수는 태극권 강좌를 펼치면서 하루 200번 이상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도울게요’ 말한다고 했다. 그것이 그의 엄마의 가르침이었고, 자신이 대를 이어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가르침이란다.
권 교수는 “제게 불교는 엄마”라면서 “엄마처럼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불자들에게 “자부심을 갖고 어떤 절이든 정성을 다하라”면서 “다른 이들을 위해 방석을 펼치고 정리하겠다는 마음가짐 하나면 된다. 배려와 사랑을 나누라”고 조언했다.
그는 최근 전통한지로 수의를 만드는 일에도 몰두하기 시작했다. 또 그동안의 작품을 정리해 기록에 남기려는 포부도 전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한 권 교수는 ‘희생’과 ‘포기’ 대신 자기 삶을 행복하게 가꿔냈다. 똑똑한 엄마보다 따뜻한 엄마로서 삶을 뒤로 미루지 않고 더 큰 성장을 이뤘다.
세상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하지만 가장 위대한 사람, ‘엄마’. 고단함을 뒤로 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무한히 주는 세상의 모든 엄마는 빛이 난다. 이번 이야기가 일과 육아로 바쁘게 사는 대한민국의 아줌마 대표, 엄마들에게 도약의 발판이 되길 기대한다.
권영순 씨가 한지로 만든 수의가 10일 정각원에 전시되자 불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모습. 이 수의는 권영순 씨가 법타 스님에게 기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