夕陽下幽岑 저무는 해 따라 높은 봉우리 내려오는데
黃昏僧掩門 붉은 노을 맞으며 스님은 문을 닫는구나.
俄然山吐月 잠시 후 산에서 노란 달이 떠오르자
宿鳥驚飛翻 졸던 새가 깜짝 놀라 후드득 날아간다.
微風時送音 살랑바람 때로 불어 자연의 소리를 보내오니
慰我春夢魂 봄꿈에 어지러운 내 넋을 달래주는구나.
聒聒喧竹幹 대나무 줄기는 부딪쳐 귀에 요란하고
冷冷動泉源 샘물은 퐁퐁 솟아 혀끝에 시원하구나.
自歌而自悅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기뻐하노니
知音何必論 뜻 맞는 친구를 어찌 굳이 찾겠는가.
-백곡처능의 <산사에 사는 즐거움 3(幽居雜興)>에서
사진=장명확
조선 초기부터 단계적으로 진행된 억불 정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의승병(義僧兵)들의 활약으로 극복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이후 다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현종(顯宗, 1659-1674 재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강화된다.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였던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을 철폐하여 니중(尼衆, 여승)을 환속시키고, 봉은사와 봉원사까지도 철폐하여 승중(僧衆, 비구스님)까지도 환속시키는 등 불교의 근거를 말살하려는 조정의 결의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조선 불교는 다시 한 번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말법의 시대를 맞아 분연히 붓을 들어 조정의 그릇된 시책에 이의를 제기하고 불교의 중요성을 경향 각지에 알린 상소문을 썼던 스님이 계셨으니, 바로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 선사가 그 분이다. 무려 8만여 자에 달하는 방대한 상소문인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는 스님의 호불(護佛)의 간절한 의지가 담긴 글이었다. 척불의 서슬이 시퍼런 세상에서 당당하게 임금을 향해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던 것은 스님의 결연했던 심정을 잘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스님이 남긴 시문을 읽어보면 그릇된 정책에 대한 분명한 의사 표현과는 달리 다정다감한 시인이자 문사적 기질도 타고난 시승(詩僧)이었음을 알게 된다. 누구보다 자연을 사랑했고, 함께 수행하던 동료이든 정계의 거물 정치인이든, 뛰어난 시인 묵객이었든 스님은 인간적인 유대 관계와 애정을 바탕에 깔고 그들과 어울렸다. 승속의 거리를 무너뜨리고 누구보다 친근하게 스님은 세간의 사람들과 교유했던 것이다.
스님의 시는 운치와 품격이 사대부 문인들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젊은 시절 유림의 시인들과 교유하면서 작시법을 익힌 데다 타고난 시인적 기질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하겠다. 엄격한 규정이나 격식보다는 마음을 활짝 열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눔으로써 세간의 척불 풍조를 잠재우려고 했던 스님의 노력도 담겨 있는 일일 것이다.
오늘 읽어볼 시는 산수 자연에서 지내는 즐거움과 운치를 노래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모두 4수로 된 연작시인데, 여기서 읽을 작품은 세 번째 시로, 한 편의 아름다운 자연 찬미시다.
해지는 저녁 무렵부터 달빛으로 물든 산사의 고즈넉한 경치가 한눈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새들의 지저귐 소리와 바람이 일으키는 솔바람 소리는 그대로 자연이 주는 화음(和音)이다. 거기에 대나무 숲에서 가지가 부딪혀 나는 소리와 샘물의 솟구쳐 흐르는 시냇물 소리까지 갖추어, 그야말로 대자연의 웅장한 교향악을 즐기게 만든다. 무엇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 없고, 서로 자신을 봐 달라고 부리는 자연의 응석에 흥은 절로 난다. 이런 산사의 생활이니 굳이 사람을 불러 함께 듣자고 부탁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자연과 내가 마음으로 교감하고 있는데 지음(知音)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일 뿐인 것이다.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마치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떠오르게 한다.
젊은 시절 한양 땅에 머물면서 저잣거리의 번잡하고 떠들썩한 소란을 겪었던 스님으로서는 산사의 생활이 얼마나 고귀하고 고마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디에도 도성의 화려한 삶에 염증을 느끼는 구절은 없지만, 이런 시를 읽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님은 조선시대 승단을 대변하여 호불간쟁(護佛諫諍)에 앞장섰던 고승이었다. 사대부들이 내세우는, 불교를 논박하는 근거가 타당성이 없음을 논파하였고, 특히 중국의 유학자들이 불교이론을 깊이 통달한 점을 열거하여 폐불(廢佛)의 부당성을 갈파했다. 저서로 백곡집(원제목은 大覺登階集) 2권이 전하고 있다.
스님의 유일한 저서인 백곡집은 1683년(숙종 9)에 간행되었다. 입적한 지 3년 만에 나온 셈이다. 책머리에 식암거사(息庵居士)와 절친한 시우(詩友)였던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이 쓴 서문이 실려 있다. 권1에는 시가, 권2에는 문(文)이 수록되어 있다. 권2에 그 유명한, 현종이 배불정책을 단행하여 비구니 사찰을 도성 밖으로 내쫓고 노비와 토지의 몰수를 명령했을 때 올린 상소문 ＜간폐석교소＞가 실려 있다. 배불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따져 주장한 글이다. 이처럼 스님은 당시의 배불정책에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