陌間傴僂種移娥  두렁 사이로 허리 굽히고 씨 뿌리는 아낙이 보이는데
蠏步靑裳動白波  게걸음 걷는 푸른 치마에서는 흰 물결이 일어나네.
一宇齊分江北鴈  넓은 하늘을 가지런히 나누는 것은 강북 가는 기러기요
千頃雜織劒西羅  천 이랑 밭에 촘촘히 짠 것은 검각산(劍閣山) 서쪽 비단이로다.
秋前楓色靑紅雜 가을날 단풍 빛깔은 푸르고 붉게 어우러졌고
雨後山容錦繡多  비온 뒤 산 모습은 더욱 수놓은 듯하네.
鷺下夕陽農皷泄 해오라기 나는데 날은 저물어 농고(農鼓) 소리 퍼져가고
老翁縱酒放狂歌  늙은 농부님네 술이 거나해 목청껏 노래 부르는구나.

-심여(心如)의 <비갠 뒤 산에 올라 모 심는 농부를 보면서(霽後登山遙觀秧農)>

심여(心如, 1828-1875)는 조선 후기 때의 스님이다. 호는 보제(普濟)고, 당호는 포의(蒲衣)며, 속성은 마씨(馬氏)로,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주로 해남 대흥사(大興寺)에서 활동했는데, 저술로 󰡔금강산유산록(金剛山遊山錄)󰡕과 시집 󰡔산지록(山志錄)󰡕 1권이 있다.

스님은 20여 년 동안 강석을 열면서도 여가를 이용하여 풍악(楓岳, 金剛山)과 삼각산, 태백산, 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을 유람하고 한양과 강릉, 경주, 공주, 전주 등 큰 고을을 편력하면서 철선(鐵船)과 초의(草衣)의 게송을 읊조렸고, 열수(冽水, 丁若鏞)와 추사(秋史, 金正喜)의 자서(字書)들을 자세히 연구하였다. 회심(灰心)을 더럽히지 않은 채 화광동진(和光同塵)하였고, 염정(染淨)에 구애받지 않았고 호오(好惡)를 구분하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스님의 시에는 당시 농촌의 풍경을 담은 작품이 여럿 눈에 띠어 흥미롭다. 사찰과 농촌은 사실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민초들은 스님에게 제도(濟度)의 대상이자 자연 속에 함께 공존하는 도반(道伴)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들의 삶과 애환을 심상하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농민들과 함께 생활했던 스님의 모습은 유독 스님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훨씬 친근하고 격의가 없어 따뜻하다.

그 가운데 한 편이 <비갠 뒤 산에 올라 모 심는 농부를 보면서>란 제목의 작품이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본 농촌의 생활상이 대형 화면 속에 펼쳐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낙은 허리 굽혀 씨를 뿌리고 논에서 몸을 움직이니 가볍게 물결이 일어 하얗게 부서진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기러기 떼가 날아가고, 이랑마다 심은 곡식이며 푸성귀가 달라 색색으로 비단 수를 놓은 듯이 보인다. 완연히 입체적인 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산은 어느 새 가을로 접어들어 제법 단풍 빛이 감도는데, 시원하게 빗줄기가 지나간 언덕은 물기에 젖어 더욱 선명하다. 스님의 시선은 삶의 현장에서 대자연의 넓은 품으로 향하는 것이다. 풍년을 노래하는 장구 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지고, 한 잔 술에 취한 농부의 거나한 노래 가락은 멀리서도 들릴 듯하다. 거리로 볼 때 그런 소리를 스님이 직접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마음의 귀를 열어 그 소리를 가슴에 담고 있다. 나[僧侶]와 남[農夫]라는 차별심이 아니라 우리[衆生]라는 따뜻한 공동체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농촌에 항상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 더 많았을 것이다. 더구나 스님이 살던 조선 말기는 농민이 학정(虐政)에 신음하던 시기였다. 이런 농민의 고통을 직접 노래하지는 않았지만, 스님에게는 자연 재해인 가뭄이 주는 피해를 목도하면서 쓴 두 편의 작품이 있다. 가뭄을 걱정하며 비를 기다리는 심정과 단비가 내려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이 실린 작품이다. <가뭄이 심하여(旱甚)>란 작품부터 읽자.

滿坪香稻幾成灰   들판 가득한 좋았던 벼들은 거의 재가 되었고
看去看來肺臟焦   살펴보러 오갈 때마다 애간장이 까맣게 탔네.
不救子飢慈母意   아이의 굶주림 채우지 못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祈天降雨濟民哀   하늘이여 비를 내려 백성들 슬픔을 덜어주소서.

말라 죽은 벼를 살려보고자 농민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동분서주 움직인다. 재처럼 비틀어진 벼를 보는 농부의 마음도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하늘이 만물을 낳았을 때는 잘 길러야 할 책임이 있다고 스님은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젖을 보채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지 않은가. 아기를 아끼는 어미의 심정으로 이 난국에 처한 백성들을 돌봐달라고 간곡하게 스님은 기도하는 것이다. 동병상련하는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다가 마침내 감로수보다 단 비가 내렸고, 가뭄에 타들어가던 논밭은 해갈(解渴)의 기쁨에 젖게 되었다. 그 기쁨을 스님은 <비가 내리기에(雨來)>란 제목으로 읊었다.

昨日悲心今日喜   어제는 슬픈 마음이더니 오늘은 너무나 기쁘니
幸蒙天帝眷輿情   다행히 하느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살피셨네.
麻衣坐濕靑山雨   삼베 옷 입고 청산에 내리는 비에 앉아 젖으니
野色油油唱太平   들판은 물에 젖어 태평(太平)을 노래하네.

하루 사이에 슬픔이 기쁨으로 변했다. 밤새 내린 비에 농부나 스님이나 모두 뛰쳐나와 빗속을 뛰어다닌다. 중생들의 애타는 심정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다. 어머니 같은 자연은 역시 긍휼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입을 허 벌리고 비에 젖은 삼베옷 차림으로 처마 밑에 앉은 스님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하얗게 내리는 빗줄기의 향연을 보면서 스님은 새삼 태평성대의 기운을 읽는다. 비록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마음속에 그린 낙원이라고 해도 꿈이 있어야 현실도 있음을 스님은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