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차를 마시는 데 한 유명 사찰의 신도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주지는 나름 유명한 승려다. 이전에 불교계 신문에 남의 글을 자신의 글처럼 표절을 해서 썼다가 혼쭐이 났던 승려였다. 지금은 인가를 받았다는 확인 안 된 설도 있고 인가증(認可證) 장사도 한다는 제보도 있다. 새로 낸 책을 보니 안목이 좁고 그릇도 작고 틈도 넓다. 안타까워서 한번 만나보자고 했는데 신도들의 벽에 겹겹이 둘러싸여 도무지 얼굴조차 볼 수가 없다. 한번 법거량이라도 나눠보려고 했더니, 눈치는 참 빠르다. 한 소식한 게 맞나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아무리 도망 다녀도 언젠가 시절인연이 닿을 것이다.
16권승이 아무리 나쁜 일을 했다고 해도 다 이 세상에 다 쓸모가 있는 승려다. 그들로 인해서 재가불자들이 각성하게 되고 더 이상 도박승 따위를 보러 절에 가지는 않을 것이다. 선지식 조차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따름이다. 하물며 깨치지도 못한 승려들은 말해서 뭘하겠는가? 반면교사라도 다 역할과 쓸모가 있다. 냇가에 작은 돌, 큰 돌, 바윗돌 모두 다 모여 나름의 역할을 한다. 모가 좀 났다고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골라서 버리는 일은 세상사를 흑백논리식으로 보는 바보나 하는 짓이다. 애 낳고 기르기 싫다고 아예 안 낳는 이들도 늘었다. 이들이 애를 낳고 기르는 고통은 없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애를 기르면서 느끼는 수많은 행복도 없다. 요즘은 아예 결혼조차 안한다. 문제가 생기면 조직이나 부서나 기관이나 회사 자체를 없애거나 팔아버리는 곳도 있다.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예 삶이 고통이니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싫은가 보다. 아니 더 살기도 싫은가 보다. 그래서 자살자들이 많아지니 이런 황망한 선택은 왜 이리 많아지는 걸까? 종교가 제 역할을 못해서는 아닐까?
글을 쓸려고 했던 한 주지의 신도들과 차를 마시게 된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연이다. 세상의 모든 만남은 그 이유나 내막 또는 흐름을 몰라서 우연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나 모든 만남이 필연이거나 그럴만한 깊은 인연이 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한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는 것이다. 이유가 있기에 그에 합당한 일이 나타나는 것이다. 나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내가 몰라서 아니 어쩌면 모른척해서 우연으로 여길 따름이다. 깨우침이 있다면 그때 나타난 ‘참 나’는 ‘왜’ 만났으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만났다면 그 이유를 살피고 또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면 된다.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은 깨우침이 항상 중생의 삶속에 있음을 말한다. 위와 아래는 그냥 첫째, 둘째라는 순서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하나’ 그리고 ‘또 하나’에 불과한 수식어일 수도 있다. 왜 만났는지 이유에 대해 궁구해서 그 뜻을 알았다면 이 역시 작은 깨침이 있다. 아무리 작은 깨침이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앎’은 호기심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지적 호기심은 3류 철학가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 앎에는 삶 전체를 압박하는 ‘무게감’이 있다. 알았다면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가 있다. ‘앎의 무게’를 감당하고 싶지 않다면 알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수행은 그런 것이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가 아니다. 안 되는 일은 없다. 몇 생을 걸쳐서라도 의지만 있다면 반드시 이뤄진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첫술에 배부르지 못한다.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면 된다. 다만 그게 끝이 아니다. 알게 되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문밖에서 소리가 나는데 알고 싶은가? 창문을 열어보니 집안에 도둑이 들어 왔음을 알게 된다. 알게 되어도 가만히 있을 건가? 현관문을 비롯해서 문단속이 잘 되어 있다면 굳이 알 필요조차도 없다. 서성이다가 다시 나간다면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아니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오히려 불안하거나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도 도둑이 그냥 체념하고 나갔다면 다 헛된 수고가 되고 헛된 고통이 된다. 대체 왜 알아야 하는가?
문단속이 잘되어 있어야 한다는 전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틈이 있기 마련이다. ‘모순’(矛盾)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수위 10명이 있어도 ‘괴도 루팡’같은 이는 이들을 농락하듯 가져갈 것은 다 훔쳐간다. 문밖에서 난 소리가 인기척이었고 나아가 도둑이 침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그냥 가만히 있을 것인가? 정말 가만히 있다면 ‘도둑’을 본 것이 아니라 그가 뭘 할지도 모르고 도둑이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진짜 도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황급히 문단속도 하고, 신고도 해야 한다. 가족과 재산을 지키는데 애써야 한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냄새가 나서 부엌에 가보니 가스렌즈에 불이 붙기 시작했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인명과 재산과 관련된 실생활에서는 바로 바로 소방을 하고 방범을 잘도 한다. 그러나 마음공부라는 수행에서는 내 맘을 온통 뺏기거나 욕망이라는 손님이 와서 주인행세를 해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알아도 스스로를 바꾸거나 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간절하지도 않고 다만 생각만으로 알았다고만 한다. 이걸 불교에서는 ‘알음알이’라고 하나보다. 아는 게 병이 되는 것이다. 머리로 알아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몸으로 체득해서 그게 얼마나 커다란 문제인지 ‘온몸으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은 알음알이만 가득하면서도 종정이나 유명한 누구에게 인가를 받았다는 ‘도인(道人)’이 너무 많아졌다. 다 똑같은 인가증을 사고파는 이들의 장사(비지니스)일 따름이다. 인가를 들먹이는 것 자체가 ‘자심감’이 없는 이들이나 하는 일이다. 내가 장관이면 왜 굳이 장관이라고 떠들고 다녀야겠는가! 장관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해서 그런건가? 그렇다. 깨친 사람이 도인이 아니라 ‘부처님’같은 삶을 사는 이가 도인인 것이다.
잠시 견성했을 때 얻은 지혜로 자성이 공한 것을 알았다면, 중심을 잡고 중도에 우뚝 서야 한다. 계속해서 ‘상구보리’도 하지만, ‘하화중생’이라는 보림을 잘해야 한다. 그것이 지행합일(知行合一)이고 실천궁행(實踐躬行)이다. 도(道)에 불교가 따로 있고 유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진정한 도인이라면 내가 왕년에 깨쳤다고 떠들면 안 된다. 오히려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부처님의 삶과 닮아 있는지를 보여주면 된다. 그렇게 조용히 깨친 것도 없는 듯이 사는 것이 진정한 하심이고 묵언 수행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랑하고 싶은가? 당신은 과시하기 위해서 깨쳤는가?
진정 도인이라면 깨쳐서 그래서 뭐가 달라졌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면 된다. 보는 이들에게 ‘자랑질’을 하지 말고 가만히 ‘환희심’을 내게 하면 된다. 초지보살을 환희지보살이라고 한다. 견성을 했다면서 주변 사람들 아니 스스로도 환희심을 못 낸다면 ‘가짜’가 맞다. 그런 이는 인가를 수천 번 받았어도, 한번 참다운 중생구제를 하는 이만 못하다.
지금 함께 차를 나누는 이들을 보며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바라볼 뿐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가 그런 뜻인가 보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안전한지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비록 사상누각(沙上樓閣)처럼 수렁 위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당당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을 수 있으면 된다. 그러기에 앞으로 발을 내딛어 어디로 가야할지를 정하면 된다. 오직 중생구제라는 보리행만이 나아가야 할 바라고 부처님은 “모두가 부처”라는 말로 대신 선언했다. ‘나만을 위해 살지 않겠다’, ‘이 삶을 또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 ‘이번이야말로 후회 없는 삶을 살겠다’는 각오야 말로 견성의 반증일 따름이다. 당신은 정말 견성성불(見性成佛)했는가? 아니 난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가?
차 한 잔의 인연이 내게 준 교훈은 참으로 많다. 차도 사람도 모두 스승이다. 천지만물이 모두 스승이라는 뜻이 이런 것인가 보다. 언제 시간 내서 누구라도 좋으니 따스한 보이차를 함께 했으면 좋겠다. 나와 차를 마시는 모든 이가 바로 내 스승이다. 내가 그를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면 말이다.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하도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