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법과 위빳사나
선업(善業) 복을 지을 때가 가장 좋은 때이고, 선업 복을 짓는 날이 가장 좋은 날이며, 선업 복을 짓는 장소가 가장 좋은 장소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아주 좋은 때, 좋은 날, 좋은 장소에 와 계십니다.
앞에서 ‘부처님과 위빳사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법과 위빳사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기 전에 8선정을 얻으셨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이 아니었고, 그래서 다시 팔정도 수행을 하심으로써 사성제 진리를 성취하셨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부처님의 법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부처님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자(佛子)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믿는 법이 무엇이고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법(法)’을 빨리어로는 담마(dhamma)라고 합니다. ‘담마’라는 원어의 뜻을 풀어 보면 ‘법이 받쳐주다, 법이 데리고 가다’ 등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받쳐준다’는 것은 ‘떨어지지 않게 하다’라는 뜻이니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부처님이 실천하셨던 법은 부처님을 받쳐주고, 제가 법을 실천했다면 그 법이 저를 받쳐줍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실천한 법이 여러분을 받쳐주는 것입니다. 이때 어디로 떨어지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면, 지금 인간으로 태어나 바른 법을 실천하면 인간 이하 즉 지옥이나 아귀, 축생, 아수라 등의 사악처 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수행을 열심히 해서 수다원이 됐다면 자신이 성취한 수다원도와 과의 법이 자기를 받쳐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실천한 법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받쳐준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또 자신이 쌓은 선업이 자신을 더 좋은 곳, 즉 천상세계나 범천으로 데리고 간다, 모시고 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법이란 그런 의미입니다. 법이란 법칙이에요. 만약 불선업(不善業)을 했다면 그 불선업이 여러분을 지옥으로 데려가고 축생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데리고 간다’는 말은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미얀마의 황금사원. 그 위용이 놀랍다. 사진=타타가타 투어 제공
그러면 부처님의 법이란 무엇인가요. 부처님의 법에는 다음 열 가지, 즉 네 가지 도(수다원도, 사다함도, 아나함도, 아라한도), 네 가지 과(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닙바나(해탈), 그리고 경전(삼장법, 오부니까야, 팔만대장경 등으로 부르는)입니다. 이 열 가지 외에 다른 법은 없습니다. 경전에서 거듭 언급하는 부처님의 법인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 닙바나, 이 아홉 가지를 출세간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성제를 깨달아 아시는 분을 붓다라고 믿고, 붓다의 법이 사성제라고 믿으면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하는 법은 바로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입니다. 도는 성취해야 하는 깨달음이고, 과는 그 깨달음에 저절로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과를 성취하기 위해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깨달으면 도 다음에 바로 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다원도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곧바로 수다원과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럼 경전은 무엇인가? 위에서 열 가지 법이라고 했을 때는 경전이 포함되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경전은 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경전은 법에 대한 설명서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네 가지 도를 약이라고 한다면 경전은 그 약에 대한 설명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플 때 약을 먹어야 병이 낫는 것과 같은 이치로 네 가지 도라는 약을 먹어야 번뇌라는 병에서 나을 수가 있는데 그 약은 안 먹고 도가 무엇인지, 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에 관한 설명서만 계속 먹고 있으면 병이 낫지 않겠지요? 따라서 경전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경전은 내비게이션과 같은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은 목적지가 아니고 길도 아니며, 단지 길을 가리키는 지도 같은 것입니다. 내가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그 길을 스스로 직접 가야 합니다. 그러니 해탈이 목적지이고, 도는 길이며, 경전은 그 길을 가리키는 지도라고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수행은 하지 않고 경전만 계속 공부하고 있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열 가지 법을 엄밀하게 따져보면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 닙바나, 경전 이 세 가지가 서로 같지 않습니다. 닙바나, 해탈은 목적지입니다. 도를 깨치면 도의 결과를 얻는데 그 결과가 곧 과입니다. 그래서 과 선정에 들어간다고 하면 수다원은 수다원과 선정에 들어갈 수 있고, 사다함은 사다함과 선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 선정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기 들어가서 무얼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바로 해탈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해탈은 도와 과의 대상입니다. 해탈로 도 지혜도 알 수 있고 과 지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탈은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도착해야 하는 곳입니다. 성취해야 하는 것은 도이지요. 도를 깨치면 도의 대상이 바로 해탈입니다. 도를 깨달으면 과가 따라오고 해탈, 닙바나에 도착한다는 의미입니다. 결론적으로 부처님의 법은 바로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라고 알면 됩니다.
도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세기 때문에 번뇌를 뿌리까지 뽑아 없애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도는 딱 한 순간으로 완벽한 것이어서 두 번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다원만 되면 불·법·승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또 사견이 완전히 없어지고 바른 견해만 남습니다. 원인이 소멸되면 결과가 소멸되는 것, 물질과 정신의 소멸을 통해 자신이 분명히 해탈을 경험한 것입니다. 도 지혜 과 지혜를 봤고, 법을 직접 알았습니다. 스스로 분명하게 알아 깨우친 법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법을 보았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의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도라는 것, 도인이라는 것, 도를 깨쳤다는 것은 번뇌가 없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번뇌가 없습니다.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그래서 수다원도를 성취하면 사견과 의심이 사라져서 더 이상 사악처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수다원도가 받쳐주기 때문에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수다원이고, 욕계에 최대한 많이 태어날 경우라도 일곱 번까지만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일곱 생 동안 사람이나 신으로 태어나지 그보다 낮은 단계로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나함 도를 성취하면 성냄이 없어집니다. ‘성냄’의 원래 의미는 매우 다양합니다. 짜증나다, 싫다, 밉다, 무섭다, 마음에 안 든다 등등이 모두 포함되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성냄이나 진(瞋)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축소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나함이 되면 그런 성냄에 뿌리를 둔 마음이 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아라한 도까지 성취하면 모든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의 번뇌가 없습니다. 이것이 법에 대한 바른 정의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 이 법이고,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법도 바로 이 법입니다. 번뇌가 없는 사람은 업도 없습니다. 우리가 네 가지 도 중 어떤 법을 깨달았을 때 그 법이 나를 어떻게 받쳐주는지 그 의미도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깨달은 도의 수준만큼 자신이 보호를 받는다고 알면 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