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차를 마시다보면 계속 우려나긴 하지만 맛이 묽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생차거나 전통방식에 의해 잘 만들어진 숙차의 경우는 주전자에 넣고 끓여서 우려낸다. 팔팔 끓기 시작하고 나서 얼마안가 자홍색 비취와 같은 색깔을 내기도 하는데 이즈음에서 불을 끄고 조금 식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한잔을 마시면 참으로 행복하다. 그동안 생생하게 달렸던 생차 안에 이렇게 달달한 맛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연유차’를 마시는 기분이다. 사람도 이와 같다. 무척이나 강한 듯한 사람 속에도 보이차와 같은 부드러움을 마음깊이 품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진국’이라고 표현되는 이런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잘 안보이게 된 듯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정작 ‘진국’은 ‘진국’끼리 모인다. 스스로를 점검해봐야 할 일인 듯하다.
몸이 열린다. 모공이 열리고 땀구멍도 열린다. 땀이 나오는 그 피부 주변에 공기가 들어온다. 아니 나간다. 그렇게 피부가 호흡을 한다.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평온함과 환희심이 부드럽게 천천히 내면에서 솟아난다. 온유해진 마음에 덩달아 몸도 즐겁기만 하다. 이런 현상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 마음을 잘 다스렸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냥 차를 마신게 아니라 차와 대화를 한 것이다. 혼자만의 망상이나 생각이 아니라 혼잣말 같은 독백도 아니다. 대화를 한 것이다. 오직 마음만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다. 자칫 물건으로만 볼 수 있는 차를 마셔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희생하는 차를 사람으로 애인으로 도반으로 섬기면서 ‘차’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대화를 나누며 그렇게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아쉬운 작별을 한다.
재세시 칠보사 조실로 불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석주 큰스님의 글. 오유지족, 즉 족한 줄 알라는 가르침이 담긴 글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모든 물건도 나의 몸과 마음을 일치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인 듯하다. 이게 참으로 깨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중도를 이해하고 공을 체득한 후에야 가능한 범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명상을 삶에서 시도하거나 연습해야 할 경우 가장 쉬운 대상이 차가 아닌가 싶다. 차는 물건으로 보이는 식물이면서도 우리 사람과 같은 수명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이 살아야 할 그런 삶을 대신 살아주며 보여주는 듯하다. ‘나만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한국인의 품격의 준거가 되는 ‘홍익인간’의 뜻을 보이차는 항상 살신성인하는 몸으로 보여준다.
보이차는 땅의 젖인 지유(地乳)가 맞다. 보이차를 마시면서 차의 마음을 알게 된다. 차와 대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되고 ‘너’가 아닌 ‘내’가 우려낸 우리들과 대화를 하게 된다. 보이차는 땅의 젖인 만큼 땅의 마음도 알게 해준다. 그러면서 땅의 수증기가 올라가 비가 되듯이, 고마운 비를 내려주는 하늘도 땅의 일부이다. 그 비가 다시 차나무의 일부가 되고, 보이차의 맛과 향이 된다. 나도 너도 우리도 모두가 그렇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된다. 사람이 하늘이고 땅인 이유를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나만을 위해서 살 수가 없다. 지금 다시 보이차를 도반으로 삼아 이렇게 계속 신문지면을 채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래 부쩍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깨뜨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부주의하거나 불성실하게 된 것 같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이때쯤이면 날씨 탓을 하고 싶도록 건망증도 무척 심해진다. 아침부터 물건을 깼을 때는 '아 고맙다. 내 대신 액땜을 해줬구나!'라고 즐겁게 받아들인다. 예전에 불길하게 생각했던 때와 대조적이다. 지갑이나 여권 등 귀중하고 소중한 물건을 잊어버렸을 때는 '아 정말 고맙다. 내 대신 네가 희생을 해줬구나!'라고 하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잊어버린 물건을 주신 분들, 그 속에 담긴 다른 물건들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분들과의 일들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되새긴다. 경찰서에 신고를 하기 전에 먼저 그 분들께 오랜만에 감사의 전화를 하게 된다. 내게 물건은 그런 것이라고 보이차는 일깨워준다.
우리가 일상에서 잊고 있었던 사람들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고 감사하는 마음을 되찾게 해준다. 생활 속에서 물아일체는 다른 것이 아닐 수 있다. 내 주변의 사람과 물건은 모두 말없이 나를 위해서 희생하고 고생해주고 있다. 잊어버리고 나서 그 소중함을 아는 것은 ‘하수’가 하는 일이다. 모두들을 ‘나’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다만,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 잊어버림을 받아들이고 감사해 한다면 집착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렇게 그동안의 노고와 깊고 큰 '은혜'에 감사해 하는 것은 물욕이 없어서가 아니다. 욕심이나 집착보다도 감사함이 더 크기 때문이다. 맑고 밝은 사람은 이래야 한다. 보이차를 매일 마시면서 점점 물건의 고마움에 눈을 떠간다. 보이차에게 참으로 감사하다.
‘진국’인 보이차를 마시다보면 갑작스럽게 4번째 우릴 때 맛과 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악퇴라고 해서 인공적으로 급하게 발효를 시킨 숙차의 경우 이런 경우가 더러 있다. 이런 경우 ‘주전자’에 넣어 끓이는 ‘재탕’을 한다. 대부분의 보이차는 끓여보면 재탕시 더 맑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몇몇 숙차는 끓여 먹는 것은 그다지다. 좋은 한약재도 계속 끓인다고 다 좋은 게 아닌 것과 같다. 왜냐하면 나와서는 안 될 것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생차를 제대로 마시려면 15년 정도의 세월을 기다리면 된다. 이렇게 오랫동안 애인을 만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기간을 사람들은 참지 못한다. 그래서 1973년에 하관차창이 악퇴조수공법을 개발하게 된다. 모차에 적당한 온도의 물을 뿌려서 발효를 촉진시키는 이 방법을 최대 규모의 차창인 맹해차창이 상용화하여 바로 먹을 수도 있게 한다. 잘 숙성시키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적당히 우려먹는 것은 좋지만 완전히 재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생차와 숙차 가운데 간운숙병같이 전통적인 숙차제법으로 만든 것은 재탕해도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고 좋다. 하지만, 98홍대녹인숙병같이 새로운 숙차제법으로 만든 숙차는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충분히 우려먹고 적당히 그만 포기할 것을 권한다. 이렇게 우리는 차로부터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배운다. 더 이상 집착하지 말고 포기할건 얼른 포기하자.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것이 일신우일신이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처음처럼 만드는 것이 바로 보이차고 우리 마음이다. 오직 내 마음이다.
지유명차의 수많은 보이차를 맛보기 위해서 일부러 ‘종로점’에 간다. 5층건물 가운데 3개층이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시음비도 받지 않는 곳인데도 오히려 부담이 없게 만드는 특이한 넉넉함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처음가면 ‘3대미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세 명의 맑은 여성이 ‘원미소타(原味小陀)’라고 하는 반생반숙의 2000년대 초반의 가장 싼 차를 내준다. 비싼 차를 구입하려는 손님들에게 종로점 김태경 대표는 한 달간 ‘원미소타’만을 마시라고 조언한다. 몇 달간 좋은 차에 푹 빠져있던 내게도 똑같은 조언을 한다. 벌써 2주째 원미소타만 마시는 내게 보이차는 김태경 대표의 메시지와 같은 ‘땅’과 ‘하늘’의 말씀을 전한다. ‘처음처럼!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