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산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 86 호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연 대 : 서기 847 년 (통일신라 문성왕 9년)
솔향 그윽한 도시! 강원도 강릉은 짙푸른 동해바다를 끼고 사철 맑은 기운을 머금고 있다. 강릉에서 반대편 내륙으로 내달으면 넓은 들녘을 지나 신라 구산선문의 사굴산파 본산이었던 굴산사터가 있고, 그 초입에 굴산사지 당간지주가 천년세월을 훌쩍 넘어 버티고 서있다.
나라 전체에 현존 85개의 당간지주가 전래되고 있는데 그중에서 이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가장 큰 규모인 높이 5.4 미터의 높이와 그에 걸 맞는 우람한 풍채로 자못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고, 늘 배워왔고 느꼈듯 우리나라 문화재는 다른 민족의 문화재에 비해 스케일이 작고 세밀하다는 그간의 인식은 당간지주의 위용 앞에서 일순 머쓱해지게 된다.
굴산사터는 1936년에 온 나라를 쓸고간 대홍수로 인해 여섯 개의 주춧돌이 드러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2002년에 있었던 태풍 루사 때는 지반의 침괴현상이 일어남에 따라 차일피일 미루어졌던 굴산사터에 대해 긴급발굴이라는 의외의 결과를 불렀다. 수년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짐에 따라, 지금은 당시의 사격과 당우의 배치를 파악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굴산사의 조성의미가 새로이 조명 받고 있다.
차제에 굴산사에 대한 전면 복원까지 거론되고 있으니,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주는 불청객 태풍과 홍수가 엉뚱한 곳에서 순기능을 발휘함은 오묘할 따름이다. 어쩌면 굴산사의 법향이 스스로의 모습을 나툴만한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일어난, 일련의 준비과정들 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같은 발굴조사로부터 굴산사는 당시에 반경 300미터에 이르는 거찰이었음이 드러났다. 통일신라기 중앙의 왕권에 필적하는 강릉(명주)지역 호족세력은 넓은 평야지역을 기반으로 이처럼 웅대한 사찰을 조성하고 또 지배역량을 강화해 나갈 만큼, 그 기백만치나 굴산사의 당간지주는 규모와 위용에서 장엄한 품격을 보인다.
이제 오랜 세월 앞에 굴산사는 땅을 파헤쳐야만 겨우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으되 유독 당간지주만큼은 투박하고도 거대한 기운 때문일까? 함부로 당대 명문가의 마루댓돌이나 동네아낙들의 빨래터 밑돌로 감히 전용되지 않고 이처럼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한 거개의 당간지주가 외형이 말끔하게 다져지고 몸체는 상쾌한 위솟음이 특징인 반면, 굴산사에서는 조성당시 석공이 깎던 정자국이 그대로 있고, 둔중한 외관에는 전체적인 크기에 비해 자칫 간지러울 듯한 문양을 생략하였으니 지주의 모습은 투박스런 자연미가 돋보인 채 막돌을 세워놓은 것과 흡사하다.
처음 들판을 지나 만났던 굴산사의 당간지주는 어디선가 만난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위아래로 훑어보며 기억속의 인연을 찾으려 애쓰는 가운데, 쌍으로 이루어진 지주가 겹쳐져서 한쪽 면만을 보였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 광개토태왕비’ 압록강너머 북녘의 거대한 자태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덜컥 반가움에 우왁스런 돌을 꽉 껴안아보았다. 울퉁불퉁한 표피에 냉기는커녕 따스함으로 마주 얼싸안는다. 큼직한 스케일과 대충대충 툭툭 털어서 세운 것 같은, 그러면서도 당당한 서기로 충만하던 광개토태왕비의 기상이 여기에 있었고 그를 둘로 쪼개 나누어 세운 비석과 진배없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듯 `당간지주는 결코 불교의 문화가 아니다`는 학설이 떠올려지는 순간이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고구려는 나라 곳곳에 국운을 비는 대상으로 거석을 조성하여 기원하는 문화가 있었으며, 굴산사지의 당간지주 또한 그 전래 유물이라는 의견이 더 타당하게 와 닿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당간지주란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상징물로 통념화되어있을 뿐이다.
당간지주는 한반도를 비롯하여 중국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도 조성하였는데 다른 지역은 주로 경내에 세웠던 반면, 우리지역에서는 사찰로 들어가는 초입에 배치하는 것이 통례였으니,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조성 당시의 용도가 혹여 달랐었더라도 굴산사가 융성하였던 시기에는 사찰에서 부처님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당간지주는 전국적으로 분포되고 있고 그중에는 철당간과 석당간 몇몇이 현존하면서, 그 원형의 명맥을 이어주고는 있지만 지주만 남아있다해도 사라진 당간을 상상하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유물이다.
당간의 높이는 일반적으로 지주의 서너 배가 되기 때문에 굴산사의 경우에는 약 10층높이는 되었을 것이다. 전국의 당간지주를 만나다보면, 관람객들은 앞의 안내문을 읽고는 지주의 키보다 훨씬 높이 솟아있었을 당간을 상상하면서 자연스레 고개를 쳐드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다.
드물게도 경북 영주에서 당간의 상단을 장식했던 용두가 발견되었는데, 용의 턱엔 도르레가 있어 사찰의 표식을 게양했던 흔적이 남아있고, 한편 삼성박물관에 소재한 축소판 당간의 완형이 있어 이를 근거로 국립대구박물관에는 야외에 온전한 형태의 당간지주와 복원당간이 조성되어있다.
굴산사가 있던 터전은 그 옛날 왕성했던 목탁소리와 그윽했던 향내를 동해바람에 날리고 이제는 드넓은 논 자락이 되어있다.
꼬마가 학교를 다녀온다. 지척지척 걷는 짧고 무거운 걸음에 시골길은 멀기도 멀다. 황금빛 들판 저편에 밀짚모자 쓰고 허리 숙여 일하던 시꺼먼 얼굴의 우리아버지! 허리 곧추세우고 ‘우리 자슥 공부잘하고 왔나?’ 하면서 환하게 웃는 얼굴…. 우리 아버지 모습처럼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거기에 늘 같은 미소로 한 결 같이 서있다.
거대하고 웅장했을 굴산사의 전각들은 화마에 스러지고, 탑을 비롯한 장엄물은 도굴범의 표적이 되거나 수장가의 욕심에 파헤쳐졌지만 평평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이 거석은 발밑에 번듯한 보물덩이를 간직하지도 않아서 별로 관심도 끌지 않으니 못된 삽질을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모두 다 떠난 그 자리에서 당간지주는 ‘여기가 옛날 그 절이 있던 곳이요~’ 라고 넌지시 알려준다. 황량한 들판의 바람을 견뎌가며 두고두고 긴 긴 세월을.
굴산사지의 당간지주 역시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을 끼우느라 구멍이 뚫려있는데 체구만치나 크다. 거친 외형에 비해서 매끄럽게 뚫린 구멍에 눈을 가져가본다. 그 옛날 먹쇠와 아랑낭자도, 댕기머리 갑돌이와 갑순이도, 그 유명한 철수와 영희도 이 구멍을 통해 마주보았을 것이다.
솔향 강릉은 이제 커피의 메카라 불리며 짙은 커피향의 도시가 되어있다. 한손에 커피를 쥔 준혁과 혜리가 보인다. 구멍너머 서로의 미소 띤 눈망울을 찾고 있다. 옛날의 그들처럼….
인근에 소재한 범일국사 부도. 범일국사는 강릉단오제의 주인공이다.
인근 마을 숲속에 소재해 있는 불상의 모습. 처참하게 훼손된 부처님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해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