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엔 매화가 한창이라 했다. 서울의 매화를 보기엔 아직 이른 3월, 희고 붉은 매화 만발했다는 소식에 평창동 언덕가에 자리 잡은 갤러리를 찾았다. 실로 매화였다. 연분홍 다섯 꽃잎 옹기종기 모이고 노오란 꽃술 복슬복슬한, 윤회매라 했다.

“불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생설을 말하잖아요. 벌이 꿀을 따서 벌집을 만들고 다시 정제해 덩어리진 것만 남으면 녹여서 다시 꽃을 만드니, 우리 삶처럼 돌고 돈다 해서 윤회매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조선 실학자 이덕무의 ‘윤회매’ 복원
“풍류는 자연을 닮아가는 나름대로의 연출”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 선생이 창제했다는 윤회매의 역사를 고조곤히 들려주는 남자는 까까머리였다. 찻물 든 다포 위에서 손때 묻은 찻잔에 티베트에서 왔다는 장차를 따라 건넸다. 이덕무 선생이 집필한 <윤회매십전>을 탐독한 끝에 윤회매를 복원하는 데 성공한, 그리하여 이른 봄 매화를 피워낸, 김창덕 씨다.

윤회매는 본디 찻자리에 놓고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했다. 차가 단순히 음료라면, 녹차 잎을 넣고 그 물을 우려내 마시는 일일뿐이라면 이처럼 많은 공을 들인 장식품이 반드시 필요하진 않은 것 아닐까. 그는 차(茶)라는 한자를 풀어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풀(艹)과 사람(人)과 나무(木)로 이뤄진 차를 마시는 건 생각을 빈 동시로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윤회매는 또한 그가 스스로 풍류로 접어들기 위해 연출한 최소한의 장치이기도 하다.

“풍류라는 게 꼭 2~300년 전 옛 분들만 즐기는 게 아니고 현재에도 자기 나름대로 연출을 하는 거죠. 풍류를 해석하면 ‘바람결’이거든요. 문화의 중심은 삶일 건데 어떤 삶을 가져가느냐는 거죠. 그런데 내 스스로 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시간은 나보다 먼저 가버려요. 그러니 지금 당장부터 최소한의 하고 싶은 것들이 같이 주어져야 되는 거예요.”

다음(茶愔), 음악과 차를 만나면 평화가 올 것
“차의 근본정신은 나의 근본정신을 반추하는 일”

그는 중요무형문화제 제50호 정지광 스님으로부터 불교 음악인 범패와 범무를 전수받았다. 사랑하는 여인과 인생의 새 막을 열기 위해 1999년 하산하기 전까지의 일이다. 어린 시절 차 시봉을 하며 선배 스님들의 어깨 너머로 익힌 차 생활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런 일련의 삶의 경험들이 윤회매를 만들고 테크노 바라춤을 추는 예술인 김창덕을 만들었다.

그의 호는 다음(茶愔)이다. 마음을 다해서 음악과 차를 만나면 평화가 올 것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지었다. 그에게 있어 차를 만나는 것은 ‘자기만의 한가한 섬’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나의 근본을 반추해볼 수 있는 것이 차의 근본정신일 수 있다는 겁니다. 차를 만나는 건 근본 마음의 고향이랄까, 차를 통해서 나 자신, 자기만의 여유, 자기만의 섬에 가는 것일 수 있어요. 수행이라는 건 자기 자신과의 조화일 거라고 봅니다. 내 안에 있는 가장 깊이 있는 내면의 모습, 본심이라고 할까.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 집중하고, 탕 색이든 향이든 분위기든 굉장히 몰입이 될 수 있겠죠. 그게 거듭되다보면 내면이 깊어지겠죠.”

“꽃비와 천상음악은 비유가 아니다”
천상음악 듣기 위해 사이클을 맞춰나간다

그는 3천 장 이상의 음반을 보유하고 있다 했다. 어릴 적부터 아이스케키 사먹을 돈을 아껴 모은 것이 그리 됐단다.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한편 아직 듣지 못한 천상음악이 있다고 믿는다. 윤회매, 범패, 범무 등 그가 행하는 예술 활동은 천상음악을 듣기 위해 사이클을 맞춰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영산회상 당시에 천상음악이 들리고 꽃비가 내린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저는 아직 듣지는 못했지만 천상음악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비유가 아니라는 거죠. FM, AM이라는 음파가 우리에게 달려와서 들리는 건 아니잖아요. 세상은 음파로 가득 차있고, 사이클을 맞출 때 순간 들리는 거지 따로 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정신적, 내면적 수행이 되면 자연스럽게 보고 들리게 되는 거겠죠. 천상음악과 꽃비 내리는 광경도. 아직 귀 어두운 내게는 연습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준비단계에서 차나 음악이 벗이 되면서 완성으로 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불법에 귀의했던 그는 여전히 ‘종교인’일까. 그에게 종교란 절과 교회를 떠나 있다. 의지하고 싶은 대상물에 속해있지 않더라도 근본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종교인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다선일미’의 차와 선 역시 단어의 개념에서 벗어나 있다.

“선은 수행의 기본을 담고 삼매로 갈 수 있는 여행이죠. 차도 맛으로만 대하는 것을 떠나 있어요. 차를 통해서 자기 내면의 자기 자신의 근본적 몸과 마음이 온전할 때 나라고 하거든요. 자기만의 한가한 섬으로 가는 데 꼭 무엇 하나를 고집할 필요는 없겠지만 근본적인 자연관에 입각해 자기 내면의 여행으로 가지 않는 사람은 차인일 수 없습니다. 차와 선이 다르지 않다고 한 말의 단어적인 것은 다선이지만, 어떤 행위나 맛을 떠나서 근본적 모습으로 얘기가 돼야겠죠. 차를 마시는 것과 선 수행을 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것이라는 거겠죠.”

3월 28일이면 평창동 가인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다음의 개인전 ‘윤회매, 차를 피우다’는 막을 내린다. 개인전이 끝나면 무얼 하겠느냐고 묻자 “놀라구요” 라는 간단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매화꽃 보러 가 매화주 한 잔도 기울이고, 그 어느 노는 중에는 이덕무 선생의 전서를 보관하고 있는 미국 UC버클리 대학에서 공연도 하고, 그 자료를 한국에 가져올 수 있으면 더 없이 좋을, 그런 노님을 하겠다 했다.

다가오는 4월의 서울엔 살아있는 매화가 만개하고, 붙들고 싶은 맘에도 아랑곳없이 질 것이지만, 한 잔 차와 함께 나만의 섬으로 여행 떠날 벗은 70℃ 열기가 아닌 이상 그 자리 그대로 피어있을 것이니, 다음 김창덕의 윤회매로 ‘화무십일홍’이 가져오는 진한 아쉬움을 달래볼 성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