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41〉
괴이한 글자
세종이 양주 묘적사로 강무를 떠난 사이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그믐날 컴컴한 한밤중에 누군가가 광화문을 향해 화살을 쏘고 달아난 흉악한 사건이었다. 화살에는 종이가 길게 접혀 있었다. 새벽에 보고를 받은 내금위장은 아연실색했다. 꿩 깃털이 꽂힌 조우관(鳥羽冠)을 쓴 궁문지기 수문장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손에 두 개의 화살을 쥐고 있었다.
“대장 나으리, 광화문 앞에서 수문 중에 화살을 발견했습니다.” “궁문지기가 발견했다는 것인가? 종이에 뭐라고 쓰여 있더냐?” “경황이 없어 펴보지 않았습니다.” “음.”
뚱뚱한 내금위장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져 있었다. 신음을 뱉어내자 턱을 감싼 긴 수염이 움찔거렸다. 광화문에 누군가가 화살을 쏘았다는 것은 임금의 심장을 겨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라의 지존을 협박하는 있을 수 없는 불경스런 패악질이었다. 수문장은 말할 것도 없었고 내금위장은 자신에게 덮쳐올 가혹한 문책을 걱정했다.
“화살을 본 사람이 또 있느냐?” “날이 밝기 전이라 궁문지기 두 군사와 저만 보았습니다.” “이 일은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 좋겠다. 상감마마께서 강무를 떠나신 것이 우리에겐 불행 중 다행이다.” “대장 나으리, 궁문지기 군사는 제가 책임을 지고 입단속을 하겠습니다.” “소문이 돌면 너와 나는 다 죽는다. 알겠느냐?” “절대로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내금위장은 수문장에게 입단속을 지시했고 수문장은 조우관이 벗겨질 만큼 머리를 조아렸다. 세종이 강무를 떠난 까닭은 군사훈련 목적만은 아니었다. 소갈증과 석림(石淋, 요도결석) 같은 지병으로 몇 해 동안 궁궐을 떠나지 못하고 시달리다가 작심하고 결정한 강무였다.
강무장소를 비구니절인 양주 묘적사로 정한 것은 두 가지의 목적 때문이었다. 하나는 세종이 지친 마음과 병든 몸을 궁궐 밖의 절에서 잠시라도 요양하고자 했고, 또 하나는 세종을 호위하는 내금위 군사만을 비밀리에 훈련시키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예전에도 묘적사에서 강무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신하들에게 알리지 않고 주로 비밀리에 훈련을 시키는 것이 특징이었다. 강무 책임자는 병조정랑에 오른 김수온이었다. 다른 강무 때도 대개는 병조정랑이 임금을 시종하는 군사들의 수장을 맡아 왔던 것이다.
세종이 김수온을 병조정랑으로 제수한 까닭은 어쩌면 이번의 묘적사 강무가 자신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기도 했다.

사진=한국문화재보호재단 홈피에서 캡쳐
“화살의 종이를 펴보아라.” “네.” “아니, 아무런 문장도 없지 않는가!”
한 종이에는 임금 군(君)자 한 자만 쓰여 있었다. 다른 종이도 마찬가지였다. 올챙이 두(蚪)자 한 자만 쓰여 있었다.
“수문장,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미친놈이 한밤중에 장난질을 했다는 말인가? 괴이한 일이야.” “겁박하려면 그 내용이 적혀 있어야 할 터인데 이건 아무 내용도 없으니 저도 망측할 뿐입니다.” “허나 가볍게 볼 일도 아니다. 궁문에 화살이, 그것도 두 개나 꽂혀 있었으니 적어도 수문(守門)을 소홀히 했음은 사실인 것이다.” “대장 나으리, 얼굴을 들지 못하겠습니다.” “군(君)자와 두(蚪)자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군.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지 않나. 비밀이 새니까 말이지.”
세종은 강무 중에 급통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왔다. 묘적사 큰방에서 아픈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굴렀던 것이다. 시종한 어의의 침술이 아니었더라면 위급할 뻔했던 사태였다. 세종을 따라 갔던 수양과 안평, 김수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강무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온 뒤에는 고생한 대군이나 군사 수장들이 뒤풀이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번에는 수양의 집에서 모였다. 수양은 내금위장도 불렀다. 아무 탈 없이 궁을 지킨 수고를 치하하기 위해서였다. 세자만 빠졌다. 그 시각에 세자는 세종에게 며칠 동안 섭정한 결과를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군마마, 어의를 시종하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바마마의 옥체가 해마다 다릅니다. 이제는 등창이 생기고 있습니다.” “정음을 창제하신 다음해에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초정약수를 찾아 청원 땅을 밟으신 적이 있습니다.” “허나 지금은 멀리 행차를 하기에는 무립니다.”
등창이란 등에 난 종기를 말했다. 초정약수로 등창을 치료할 수 있다면 굳이 행차하지 않더라도 충청도 관찰사에게 진상하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때 10살 난 영흥 동생이 아바마마를 따라갔지요.” “늦둥이라 아바마마께서 지금도 우리들 중에 가장 사랑하는 동생입니다.”
소헌왕후가 나이 40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영흥이었다. 세종은 왕자들 중에 어린 영흥을 유독 귀여워했다. 9살 때 벌써 영흥을 사냥터에 데리고 다닐 정도였고, 강원도 관찰사에게 날다람쥐와 독수리 두 마리를 영흥의 장난감으로 바치게 하였는데 막내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난 뒤였다. 내금위장이 몸을 좌우로 뒤뚱거리며 입을 비쭉거렸다. 김수온이 눈치를 채고 말했다.
“대감,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김 정랑, 뒤풀이하는 좋은 날에 이런 얘기를 하기가 난감하오.”
성미가 급한 수양이 나섰다.
“대감, 말해 보시오. 궁을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사실은 덮고자 했으나 숨길 일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내금위장이 소매 속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냈다. 그런 뒤 수양에게 내밀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게 어찌 되었다는 것이오?” “궁문에 꽂힌 화살에 접혀 있었습니다.” “어느 궁문이고 어느 시각이었습니까?” “야심한 밤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새벽에 광화문 궁문지기가 궁문 앞을 지나다가 발견했습니다.” “헌데 이게 무슨 뜻이오?” “신은 도대체 왜 이런 종이를 날렸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수양이 안평과 김수온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김수온이 임금 군(君)자와 올챙이 두(蚪)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수양대군마마, 이것은 괴상한 괴자(愧字)입니다.” “어째서 괴자라고 하는 것이오?” “군(君)은 윤(尹)자와 구(口)자가 합해진 글자입니다. 윤(尹)자에서 세로로 내려간 획은 붓을, 가로 획들은 손 모양입니다. 모양이 붓을 잡은 손이므로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구(口)자는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명령하여 다스리므로 결국 한 나라의 임금님이라는 뜻입니다.” “물론이지요. 군자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헌데 이 요망한 종이에 쓰인 군(君)자를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손 모양의 획이 하나 없습니다. 일부러 없앤 듯합니다. 우리 전하께 위해를 가한 것입니다.”
그제야 수양과 안평, 내금위장이 사색이 됐다. 수양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 아바마마를 능멸하는 놈들이 있다니!”
수양의 차가운 살기 같은 기운에 김수온은 머리끝이 쭈뼛했다. 내금위장이 진땀을 흘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대군마마, 놈들을 잡지 못해 천추의 한이 되옵니다.” “그렇다면 이 올챙이 두(蚪)자는 무엇이오?”
수양의 물음에 김수온은 대답을 망설였다.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하옵니다.” “얘기해 보시오. 어서.”
김수온은 마지못해 말했다.
“임금의 아들을 뜻하는 규룡 규(虯)자를 일부러 올챙이 두(蚪)자로 써서 비아냥거린 것 같습니다.” “아바마마를 능멸하고 우리 형제를 조롱하다니 내 반드시 놈들을 잡아내고 말겠소.”
수양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충격을 받은 안평이 겨우 모기만한 소리로 김수온에게 물었다.
“김 정랑, 어떤 자의 소행인 것 같소?” “전하를 능멸하고 대군마마를 조롱한 것을 보면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에 불만을 품은 무리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방금 나도 그런 생각을 했소. 이 일은 결코 그냥 덮고 지나갈 사건이 아니니 아바마마께 말씀드려야겠소.”
내금위장이 고목둥치가 쓰러지듯 엎드려 말했다.
“궁문을 지키지 못한 신을 벌하소서.” “대감, 아바마마의 명을 기다리시오. 이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결정하겠소.”
결국 수양과 안평은 세종을 만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금위장은 격려를 받기는커녕 진땀을 흘리며 돌아갔다. 그리고 김수온은 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내불당으로 신미를 찾아 갔다. 김수온은 경복궁 뒤편에 있는 내불당으로 가는 길목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탄식하는 수양의 살기어린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도대체 사건이 어디로 번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김수온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
*이 원고의 저작권은 정찬주 작가에게, 게재권은 미디어붓다에 있습니다. 원고를 무단 게재하거나 퍼나르기를 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위반되오니, 독자 여러분께서는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기사에 만족하셨습니까? 자발적 유료 독자에 동참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