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35〉
특명
세종23년(1441).
내불당 기둥에 내어걸린 등롱마다 불이 켜졌다. 작은 요사의 방들도 환했다. 큰 재가 있는 날의 밤이 아닌데도 그랬다. 불빛이 자객처럼 숲속까지 스며들었다. 숲 안팎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내금위 군사와 어영청 군사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펴고 있었다.
내불당 요사에는 세자가 와 있었다. 세자가 신미의 안내를 받아 내불당에 들어 참예하고 바로 요사로 왔던 것이다. 병약한 세자는 서늘한 밤기운에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어 했다.
“희우차를 한 사발 마시고 싶소.”
“세자 저하께서 희우차를 아시다니 놀랍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차 이름을 지으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희우는 요사 공양간에서 발효차를 준비했다. 그러나 찻주전자를 잡은 손이 떨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 심부름을 하는 사미승이 공양간 문턱을 넘어와서 재촉했다.
“보살님, 세자 저하께서 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네.”
희우는 정신을 가다듬고 차를 우렸다. 세자가 희우차를 찾는다는 전언에 가슴이 벅찼다. 양주시절 강무를 나온 세종이 희우차란 말을 했을 때도 몸 둘 바를 몰랐었는데, 지금도 똑같은 감정이 들었다. 손에 땀이 나고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런데 정작 세자는 덕담처럼 가볍게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희우차를 마시고자 내불당에 온 것은 아니었다. 세자가 내불당을 찾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신미에게 중요한 정보 하나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올봄에 치렀던 과거병과에 뛰어난 실력으로 급제한 신미의 셋째동생 김수온의 인사(人事) 정보를 가지고 왔다.
“대사님, 수온의 급제를 감축합니다.”
“황공하옵니다.”
“속가의 형제가 몇이나 됩니까?”
“4남 1녀 중 빈도가 장남이고 수온은 셋째동생입니다.”
“아바마마께서 과거 답안지를 직접 보시었는지 정자(正字) 수온의 문재(文才)를 높이 사고 있습니다.”
김수온은 과거급제 뒤 교서관(校書館)의 정자가 되어 관원생활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정자란 정 9품의 말단 관원 중 하나였다. 세자가 다시 말했다.
“아바마마께서는 김 정자의 재주를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재승박덕이라 했습니다. 동생에게 재주가 많은지는 모르나 덕이 있는지는 더 지켜봐야 합니다.”
신미는 동생 김수온에 대한 호평을 경계했다. 그러자 세자가 뜨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 정자의 입신양명이 싫습니까?”
“어찌 그러겠습니까. 다만 동생 이름이 높아질수록 시기하는 자가 많아질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아바마마께서 대사님을 총애하기 때문에 시기하는 자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시비를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동생이 전하를 보필하는 내직으로 들어온다면 빈도는 내불당을 반드시 떠나야 할 것입니다.”
“김 정자는 아바마마의 특명을 받을 것입니다. 이미 아바마마께 말씀드렸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왕실의 어가. 사진=고궁박물관 홈페이지.
신미는 더 이상 이견을 내지 못했다. 세종이 특명을 내린다함은 김수온의 관직과 품계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미는 묵묵히 차만 마셨다. 그러자 세자가 말했다.
“김 정자는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될 것입니다.”
“부수찬이라 함은 3품계나 건너뛰는 것입니다. 집현전 학사들 사이에 반발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집현전의 직제는 다음과 같았다. 명예직으로 영전사(領殿事 정1품), 대제학(정 2품), 제학(종 2품)이 각 2인이 있었고, 실제로 학문을 연구하는 전임학사로 부제학(정 3품), 직제학(종 3품), 직전(直殿 정 4품), 응교(종 4품), 교리(정 5품), 부교리(종 5품), 수찬(정 6품), 부수찬(종 6품), 박사(정 7품), 저작(著作 정 8품), 정자(正字 정 9품) 등이 있었다. 세종 21년에 확정한 집현전 정원은 20명이었다. 말 그대로 명예직은 이름만 걸어둔 것이었고, 실제로 집현전의 실무 책임자는 행수(行首)라 불렸던 부제학이었다.
“품계를 건너뛰거나 내려가는 것은 종종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품계만을 가지고 반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신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신미 자신이 세종의 총애를 이용하여 특명을 받아냈다고 오해할 수도 충분히 있기 때문이었다.
“세자 저하, 빈도는 정음청 학사, 동생은 집현전 학사이니 우리 형제에게는 더 없는 영광입니다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라에 인재가 많은데 부담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대사님, 걱정 마십시오. 정음청은 임시관청일 뿐입니다. 우리 글자 28자가 완성됐으니 내일이라도 없애버릴 수 있는 관청입니다.”
“차라리 그래 주시면 부담이 덜어질 것 같습니다.”
“아바마마께 여쭈어보겠습니다. 다만 제 생각은 우리 글자인 정음(正音)을 만드는 기능이 끝났으니 정음청을 없애는 대신 언문청을 내불당에 설치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언문청이라니 처음 듣는 말입니다. 빈도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까?”
신미는 정음청이건 언문청이건 말만 다를 뿐 결국 같은 기능을 하는 임시관청이 아니겠는가 싶어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자는 생각을 깊이 해온 듯 물러서지 않았다.
“중국문자 말고는 모두 언문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집현전 유신들은 천축의 범자와 티베트 밀자(密字), 우리 글자인 정음마저도 모두 언문이라 할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내불당에서 그런 책들을 연구하고 발간하는 언문청이니 설치하는데 반대하는 신하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맡을 분은 대사님 밖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신미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 세자가 말했다.
“대사님, 사실은 오늘밤에 온 까닭은 다른 데 있습니다. 긴히 드릴 얘기입니다.”
그러자 신미가 차심부름을 하던 사미승을 내보냈다.
“차는 됐다. 너는 부를 때까지 밖에 나가 있거라.”
사미승이 나간 뒤 세자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대사님, 아바마마께 특명을 건의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사님의 동생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자 저하, 무엇이옵니까?”
“사헌부의 정효강과 같은 역할을 생각했습니다. 불심이 깊은 정 지평이 사헌부에 있기에 그나마 관원들의 동향이라도 살필 수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법화경〉, 〈화엄경〉에 능한 김 정자가 집현전에 들어 고집 센 학사들의 태도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려 보자는 것입니다.”
“정 지평과 달리 천학비재한 동생이 해낼지 의문입니다.”
“김 정자는 병법에도 능하고 유서는 물론이고 불서에도 달통한 선비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빈도 생각으로는 동생은 집현전보다 병조의 훈련원 같은 곳이 어울릴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미의 형제들이 무예에 능한 것은 옥구군병마사를 지냈으며 대마도 정벌 때 이종무 장군을 보좌했던 아버지 김훈의 피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신미 자신도 출가 전에는 완력이 좋았고 무예를 닦아 또래들을 이끌고 맹수사냥을 다녔던 것이다.
“병조에는 언제든지 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글자를 집현전 학사들에게 이해를 시켜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문재(文才)와 무재(武才) 그리고 추진력이 뛰어난 김 정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바마마와 대사님이 창제한 우리 글자 정음이 아닙니까? 이때 김 정자야말로 학사들의 반발을 최소화시킬 적임자로 본 것입니다.”
세자가 내불당에 온 이유는 분명했다. 김수온을 집현전 학사로 제수하여 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학사들을 회유시켜보자는 계산이었다. 훈민정음 창제 공개를 앞둔 세종과 세자 간의 빈틈없는 포석의 일환이었다. 병약한 세자는 모처럼 이야기를 길게 했는지 갑자기 피곤해 했다. 두어 사발의 희우차를 마시고 나서야 가까스로 기운을 차렸다. 그러나 요사 토방의 계단을 내디딜 때 휘청했다. 할 수 없이 내불당에 걸어서 올 때와 달리 갈 적에는 어영청 군사가 매는 가마를 타고 갔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