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28〉

계책

정효강 집은 청계천 옆에 있었다. 삼간초가로 사헌부 지평이 사는 집치고는 볼품이 없었다. 말구종의 안내를 받아 온 신미는 정효강 집 앞에서 합장을 했다. 말구종은 정효강이 보내준 노비였다. 삿갓을 쓴 신미의 행색이 신기한 듯 코흘리개 아이들이 말 엉덩이에 붙은 쇠파리처럼 따라와 서성거렸다. 큰 삿갓이 아니라도 승려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은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아이들은 방금 물에서 나왔는지 더부룩한 머리숱이 젖어 있었다. 삼각산에서 발원한 청계천의 물은 한강과 달리 겨우 바닥을 적시며 흐르고 있었다. 얕은 물에서 한두 명의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었고, 한쪽 반석에서는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고 있었다.

정효강은 마당에서 신미를 맞이했다. 땅바닥이었지만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벼슬아치가 승려에게 땅바닥에 머리를 숙이고 절한다는 것은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보기 힘든 구경거리였다. 정효강이 흙 묻은 바지를 털고 나서 말했다.

“대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평대군께서도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수양대군마마께서 대신 와 계십니다.”

신미는 정효강을 따라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사랑방에서는 수양이 먼저 와 밝은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수양은 신미가 방으로 들어서자 벌떡 일어나 정효강처럼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수양의 절은 자연스러웠고 스스럼없었다.

신미는 수양의 절을 받을 때마다 늘 미안해했다. 수양은 유생들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비웃든 말든 신미를 마음속으로 흠모한 나머지 절을 했다. 신미도 맞절로 대군에 대한 예를 표했다.

“대군마마, 송구합니다. 빈도가 먼저 와 있는 것이 예인 줄 아오나 낙산에 들렀다 오느라 늦어졌습니다.”

“대사님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신미가 낙산에 들른 것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낙산 산자락 갖바치 마을에 사는 말구종의 큰어머니가 갑자기 죽어 극락왕생염불을 해주러 갔던 것이다. 신미는 말구종을 자신에게 보내준 정효강에게도 고마움을 나타냈다.

“정 지평께서 베풀어주신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말먹이꾼은 원래 안평대군마마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니 안평대군마마께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옳습니다.”

수양이 말했다.

“대사님, 안평 동생도 좋아할 것입니다. 더구나 말먹이꾼의 무예가 출중하다고 하니 안심이 됩니다. 정 지평으로부터 헌부의 음모를 다 들었습니다. 대사님을 호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시기에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수양은 볼 때마다 키가 왕대의 죽순처럼 쑥쑥 자라 있었다. 갓 20대가 되었지만 풍기는 풍모가 예사롭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매는 상대를 금세 제압할 것처럼 강렬했고, 호신용 장검을 차고 있는 수양의 몸집은 무술을 단련한 무사처럼 단단했다. 말투는 거칠 것이 없다는 듯 시원시원했다.

"오늘 누추한 저의 집에 모신 것은 대사님의 안위를 걱정해서입니다. 제가 깊이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만 대군마마의 지혜가 절실합니다.”

“정 지평, 그런 말씀 마십시오. 대사님이 계신데 저의 지혜라니요. 저는 아바마마께서 신(信)하시는 대사님 말씀만 따르겠습니다.”

수양의 말은 사실이었다. 언젠가 세종이 수양과 안평에게 신미를 의지해서 세상을 살라고 당부했으며, 더구나 신미는 세종의 지시를 받아 우리 글자를 비밀리에 만들고 있는 학사였던 것이다.

“정 지평께서 대사님을 위해 생각하신 바가 무엇인지 그것부터 들어 봅시다.”

“점심이 늦어졌습니다. 소찬이지만 드시고 난 뒤에 말씀 드리지요.”

“빈도가 낙산을 들렀다 오는 바람에 늦어진 것입니다. 대군마마께서 시장하실 테니 점심을 먼저 하자는 정 지평의 제의가 마땅합니다.”

사실, 사랑방 밖 툇마루에는 이미 점심상이 오방색 상보에 덮여 있었다. 점심상은 바로 들어왔다. 상보를 벗기자 조촐한 점심이 드러났다. 개다리소반 위에는 흰 소금으로 간을 맞춘 메밀수제비 세 그릇과 묵은 간장을 뿌린 두부와 오글오글 마른 오이장아찌가 놓여 있었다. 수양이 소박한 점심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메밀수제비와 두부를 보니 정 지평의 인품을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평 동생이 정 지평을 아바마마께 추천했나 봅니다. 나라에 정 지평 같은 청백리만 있다면 나라의 곳간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대군마마, 소신이 무엇을 탐하지 않고 소욕지족할 수 있음은 집착과 욕심을 버리라는 대사님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입니다.”

“정 지평, 과찬입니다.”

신미가 화제를 돌렸다. 수양과 정효강을 번갈아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좀 전에 얘기하겠다는 정 지평의 생각이 무엇인지요?”

“위험하므로 대사님께서 당분간 궁궐 출입을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전하의 명을 받고 드나드는 것이므로 그것은 전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대군마마께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대사님을 탄핵하자는 의견이 계속해서 들끓고 있습니다. 이는 대사님께도 지난번에 제가 대자암으로 찾아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대관들이 문제 삼는 것은 대사님을 집현전 학사로 전하께서 제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빈도는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전하의 신하이기 때문입니다.”

“탄핵이 여의치 않으면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대사님을 위해하겠다는 음모까지 꾸미고 있으니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일은 무엇보다 화급합니다.”

“정 지평, 전하를 위해 일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빈도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양이 다급하게 신미의 말을 잘랐다.

“대사님께서는 아바마마의 명을 받아 큰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옥체를 보전하시는 것도 신하 된 도리입니다.”

메밀수제비가 든 사발은 서너 젓가락을 움직이자마자 다 비워졌다. 세 사람 다 맛있게 먹어치웠다. 개다리소반에는 흰 두부 두어 모와 소금덩어리처럼 짜디짠 오이짱아지만 남았다.

“대군마마 말씀이 옳습니다.”

“정 지평께서는 무슨 계책이라도 있습니까?”

“대사님께 외람된 일입니다만 집현전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뜻을 이룬 대관들이 굳이 탄핵하려들지 않을 것입니다.”

정효강은 수양을 보며 말했다. 세종이 사헌부 관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신미를 자주 만날 수 있도록 집현전 학사로 추천한 사람이 바로 수양이기 때문이었다. 수양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정 지평께서 짜낸 계책이 고작 그뿐입니까? 그것은 아바마마께서 대사님을 만날 수 없게끔 막아버리는 악수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계책은 더 있습니다. 대사님이 집현전 학사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지 않고도 전하를 뵐 수 있는 계책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신미는 눈을 지그시 감았고 수양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앞으로 뺐다.

“집현전을 떠나는 대신 임시관청을 하나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유신들이 반대할 명분이나 대사님이 그들과 부딪칠 일도 사라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임시관청이라니요?”

“나랏일을 할 때 임시로 두는 관청의 예는 허다합니다. 더구나 대사님께서는 우리 글자를 전하의 지시를 받아 연구하고 계시니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임시관청을 전하의 의지에 따라 둘 수 있는 것입니다.”

“관청 이름을 생각해 둔 것은 있습니까?”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글자를 만드는 일이니 정음청(正音廳)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임시관청의 소속은 어디로 해야 되겠습니까?”

“당연히 집현전 아래 두어야 대사님의 학사 벼슬도 유지될 것입니다.”

“정 지평, 계책이 놀라울 뿐입니다. 아바마마께 말씀드리어 반드시 관철하겠습니다.”

수양이 감탄하여 소리쳐 말했다.

“그런데 장애는 또 있습니다. 어찌 보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대사님께서 입궐하시는 것을 유신들이 시기 질투한다는 것입니다.”

“아바마마의 일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유신들을 내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자들은 언젠가 엄중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수양이 분한 듯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제야 신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군마마, 빈도가 지혜롭게 처신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신들의 모함이 두려워 입궐하기를 주저하는 빈도가 아닙니다.”

그때였다. 말구종이 머리를 산발한 거지행색의 장정 하나를 붙잡아왔다. 거지행색의 장정이 담벼락 뒤에서 한동안 서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정을 마당에 꿇어앉힌 뒤 말구종이 정효강에게 보고했다.

“이놈이 나으리 집안 동태를 살피고 있었사옵니다.”

“쇤네는 밥 빌어먹고 사는 거지입니다요.”

“거지를 가장한 놈이 틀림없사옵니다.”

정효강이 눈을 치뜨며 말했다.

“어디서 많이 본 놈 같구나. 이놈! 누가 보내서 온 놈이냐.”

“나으리. 죽을죄를 졌습니다요. 사간원에서 얄궂은 일을 하는 쇤네입니다요.”

수양의 두 눈에 불이 켜졌다. 양미간에는 내 천(川)자의 주름이 그어졌다. 살기가 묻어나는 주름이었다. 수양은 칼집에서 휘어진 곡도(曲刀)를 뽑더니 망설이지 않고 거지로 변장한 장정 앞으로 다가갔다. 곧 장정의 목을 베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신미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만류했다. 대신 말구종을 시켜 점심으로 먹다 남은 두부를 장정에게 주도록 했다. 장정은 정말 배가 고팠던지 두부 두 모를 허둥지둥 먹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