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24>
음모
세종은 안평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세종은 한가윗날 종묘제사를 지내고 나서 바로 불자신하인 정효강을 사헌부 지평으로 제수해 보냈다. 그리고 하연 뒤를 이어 불교혁파에 앞장섰던 대사헌 유계문을 한성부윤으로 보냈다. 이와 같은 인사(人事)를 가장 반긴 사람은 감찰 정현이었다. 정현은 다시청에서 차설거지를 하고 있는 희우를 불러냈다.
“희우야, 앞으로 헌부에 변화가 올 것 같다.”
“무슨 일이옵니까?”
희우가 미간을 찡그렸다. 가을바람에 날아온 낙엽이 희우의 머리에 붙었다 떨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그녀의 눈앞에서 나뒹굴었다.
“임금님께서 헌부에 불자신하인 정효강을, 또 대사헌 나으리를 한성부윤으로 보냈지 뭐냐.”
대사헌은 유계문이었다. 그는 사간원 관리시절부터 줄곧 드세게 불교혁파를 주장해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평 나으리는 어떤 분이옵니까?”
“안평대군께서 어렸을 때 시강관으로서 글을 가르친 사람이지. 안평대군께서 정효강을 헌부로 보내달라고 임금님께 말씀드렸다는 소문이 궐내에 자자하다. 그러니 정 지평은 안평대군의 복심(腹心)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나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리들이 세종이나 안평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불교혁파를 주장했다. 더구나 좌찬성 신개의 강력한 추천으로 권자홍(權自弘)이 사헌부 지평으로 왔고, 사간원은 서성(徐省)과 임종선(任從善)을 좌사간, 우사간으로 채웠던 것이다. 권자홍이나 서성, 임종선 역시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어찌 보면 유신들로 더 강화되고 만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정효강만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악수(惡手)가 되고 말았다.
대간들은 하나같이 정효강을 비웃고 손가락질했다.
“부처에게 아첨하는 효강은 성질이 편협하고 간사하여 맑고 깨끗한 체하면서 안으로는 탐욕을 품어 불사(佛事)를 빙자하여 대군들에게 어여삐 보이기를 구하고, 항상 간승 신미를 칭송하여 ‘우리 화상은 묘당(廟堂)에 모셔지더라도 무슨 부족한 점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미 불자가 된 수양이나 안평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요망한 중 신미를 우러러 흠모한다는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러나 일부 대간들의 모욕적인 언행은 수양이나 안평과 친교를 맺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열패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희우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제 소견으로는 헌부의 수장이 불자신하라 하더라도 어쩌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물론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사헌부와 사간원 모든 나으리들이 유신들로 똘똘 뭉쳐 있으니 그렇사옵니다.”
“희우 말이 옳다만 그래도 정 지평이 임금님께 직언할 수 있는 자리로 왔으니 조금은 나아지지 않겠느냐.”
정현은 희우 말을 수긍하면서도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는 못했다. 정효강을 통해서 세종의 속마음을 알고 또 위안 받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정현은 또 희우에게 신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주 기쁜 소식이 있다.”
“나으리. 무엇이옵니까?”
“신미대사께서 집현전 학사가 되셨다. 임금님께서는 말 한 마리도 하사하셨다고 하는구나.”
희우는 신미의 소식을 듣자마자 얼굴이 붉어졌다. 정현이 갑자기 안색이 변한 희우의 얼굴을 보고 한 마디 했다.
“하하. 마치 신미대사를 사모하는 것 같구나.”
“이제 대사님께서는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드실 수 있겠사옵니다.”
“임금님의 명을 받는 신하가 됐으니 당연하지.”
비록 왕사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왕실 종친들에게만 국한할 뿐이었다. 그러나 신하가 된다는 사실은 임금의 명을 받는 육조백관 중에 한 사람이 됐음을 의미했다. 학사가 됐으니 이제부터는 임금에게 아뢸 때 ‘승(僧) 신미’가 아니라 ‘신(臣) 신미’라고 할 터였다.
“나으리. 신미대사님께서는 집현전에서 무엇을 공부하는 것입니까?”
“집현전 학사들에게 범자를 가르친다고 하더라만.”
“범자라면 천축국의 말이 아닙니까?”
“그렇다. 그런데 왜 천축국 말을 가르치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지평 나으리께 물어보면 되겠사옵니다.”
“그렇지. 임금님을 친견하는 정 지평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야.”
정현은 원래 차보다는 술을 좋아했지만 희우가 사헌부 다시청으로 들어온 이후부터는 차를 더 가까이 했다. 정현은 희우가 우려낸 발효차의 부드러운 맛을 음미하며 마셨다. 발효차의 색은 달빛처럼 황금 빛깔이었고 향은 여운이 짙었다.
“이제는 희우차를 모르는 벼슬아치들이 없더라.”
어느 새 다모 중에서 우두머리가 된 희우는 사헌부 다시청뿐만 아니라 궁에서 지내는 정기적인 제사의 차까지 우려 올리는 일까지 전담했다.
“신미대사님께도 제 차를 올리고 싶사옵니다.”
“기다려라. 내가 기회를 만들어 볼 테니.”
며칠 후.
희우는 아침 일찍 입궐하는 신미를 보았다. 말을 타고 육조거리를 지나치는 신미의 늠름한 자태는 예전에 보았던 모습과 달랐다. 수염을 길게 기른 때문인지 위의가 대단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어깨를 펴고 있었고 허리는 꼿꼿했다. 때마침 사헌부로 출근하는 정효강이 자신이 타고 오던 말에서 내려 합장했다. 육조거리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희우는 자신이 잘못 보지는 않았는가 싶어 몇 번을 망설이다가 정효강에게 물었다.
“나으리. 방금 지나쳤던 분이 신미대사이옵니까?”
“그렇다. 헌데 네가 어찌 대사를 아느냐.”
“일찍이 뵌 적이 있사옵니다.”
“그래? 너도 석교(釋敎; 불교)를 신봉하느냐?”
“그렇사옵니다.”
“알려지면 위험한 일이니 앞으로는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마라.”
“네.”
“당장 헌부에서 쫓겨날 것이니라.”
“나으리. 궁금한 것이 하나 있사옵니다.”
“무엇이냐?”
“신미대사께서 무슨 일로 입궐하시는 것이옵니까?”
“전하께서 부르셨을 것이다.”
“감찰 나으리 말씀으로는 집현전 학사가 되셨다고 하셨사옵니다.”
“하하. 학사가 되신 건 맞다. 허나 집현전 학사들 중에 대사를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전하께서 대사를 인정할 뿐이다.”
“임금님께서 부르신다니 상서로운 일이옵니다.”
“무슨 일이야 있지 않겠느냐. 허나 난들 어찌 그 일을 알겠느냐.”
그런데 희우는 정오 전에 다시청에서 불길한 얘기를 듣고 말았다. 정효강이 대사헌을 뒤따라 다시청을 나가고 난 뒤였다. 마치 정효강이 나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우헌납인 배강(裵杠)과 권자홍이 남았다. 희우는 그들의 얘기를 우연히 엿듣고 말았다. 배강이 먼저 말했다.
“간사한 중 신미가 학사가 되다니 우습기 짝이 없소.”
“그렇습니다. 이를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허물을 조사해 학사 직을 박탈해야지요.”
“아비가 불효 불충의 죄를 저지른 김훈이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허물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영동현감에게 신미의 과거행적을 조사해 올리도록 하시오. 반드시 요망한 사실들이 드러날 것이오.”
“헌납 나으리. 우리가 탄핵하고서도 신미를 성 밖으로 쫓아내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헌부의 문지기 군사를 시켜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해 버려야지요.”
희우는 거기까지만 들었다. 더 들을 수도 있었지만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찻잔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시청을 나온 희우는 불어오는 가을바람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머리를 식혔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들이 사헌부 마당가에서 뒹굴었다. 정신을 차린 희우는 곧바로 정현에게 자신이 들은 대로 알렸고, 놀란 정현은 정효강 집을 찾아가 보고했다. 정효강 역시 낯빛이 노랗게 변했다. 그는 곧 신미를 만나러 대자암으로 떠났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