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16>

대장경 1

대마도정벌 이후, 조선과 일본은 매년 사신을 왕래시켰다. 세종은 왜구들의 노략질을 막고자 화친외교를 폈고, 숭불(崇佛)로 돌아선 일본은 조선 절에 있는 <대장경>을 구해 가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실제로 일본은 세종 2년부터 사신 양예(亮倪)를 보내는 등 <대장경>을 보내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세종은 일본의 첫 사신 양예를 만난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곤룡포 속으로 파고드는 삭풍이 어찌나 차갑던지 뼛속까지 어는 듯 얼얼했다. 그렇다고 혹한을 탓하며 일왕의 사신이 궐 밖에서 1주일째 기다리고 있는데 마냥 면담을 미룰 수는 없었다. 양예는 인정전 조정(朝廷)으로 나아가 서반(西班) 종 3품의 반열에 서는 예우를 받았다. 마침내 조회에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벽돌처럼 네모지게 반듯한 돌들이 깔린 조정은 살얼음이 낀 듯 미끄러웠다. 조회란 입궐한 문무관들이 동반, 서반의 반열에 따라 자기 자리에 서서 임금에게 문안드리고 정사를 아뢰는 일을 말했다. 혹한 속에서 행한 그날 조회는 임금을 알현하는 의례가 끝나자마자 사신 양예를 면담하는 순서부터 시작했다.

“바람과 물이 험한 길을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임금님께서 걱정해주신 덕분인 줄 아옵니다.”

일본말을 잘하는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의 안내를 받아 전상(殿上)에 오른 양예가 엎드려 말했다.

“너희 나라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오직 <대장경>뿐이옵니다.”



해인사 대장경 판고. 사진=문화재청 제공


양예가 짧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미 양예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윤인보에게 보고를 받았고, 이후 의정부 대신들과 <대장경>을 보내야 할지 말아야 되는지 의견을 나누었던 것이다. 물론 대신 중에는 <초조대장경> 목판이 고려 때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으므로 인쇄본도 희귀해진 까닭에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들은 <초조대장경> 인쇄본이 무용지물이라는 의견을 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장경>은 희귀한 것이오. 하지만 너희 나라가 원하니 1부는 주겠소.”
“우리나라에서 받는 임금님의 은혜는 말로써 다하기 어렵습니다.”

양예는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렸다. 세종은 날이 너무 추웠으므로 조회를 빨리 마치고 싶었다. 말할 때마다 턱이 떨릴 정도였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말로서는 다 할 수 없사오니 삼가 시를 지어 충성을 보이겠습니다.”

세종이 허락하니 양예가 품속에서 시가 적힌 비단을 꺼내어 바쳤다.

넓게 개척한 산천은 우공(禹貢)에 돌아가고
높이 달린 일월은 요천(遙天)이 열리도다
무엇으로서 성조(聖朝)의 황화(皇化)에 감사할는지
다못 읍하여 세 번 만만년을 부른다.

세종은 양예가 올린 시를 본 뒤 몹시 흐뭇해했다. 양예에게 두 나라가 화친해야 한다는 점을 한 번 더 타일렀고, 객청(客廳)을 관리하는 신하에게는 양예 일행에게 날씨가 추우니 따뜻하고 진귀한 음식을 대접하도록 지시했다.

<대장경>을 달라는 일본의 간청은 다음해에도 계속됐다. 이번에는 일왕 차원이 아니라 지방, 즉 구주(九州)의 총관이나 도원수 등이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대장경>을 요구했다. 그런가 하면 세종 4년 초겨울에는 일왕과 모후가 승려 규주(圭籌)를 보내어 세종에게 서간과 예물을 바치며 또 다시 <대장경>을 보내달라고 했다. 일왕의 서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바닷길이 멀어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이제 장마는 그치고 가을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오는데, 신령이 호위하여 전하께서는 만복을 받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지난해 귀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지각보명(智覺普明) 국사가 개설한 관(館)에서 후하게 대접하였더니, 국사의 제자 주당(周棠)이 귀국에 갔을 때 귀국의 선왕(태종)께서 화공을 시켜 국사를 그리게 하고 문신 이색으로 하여금 찬(贊)을 짓게 하여 주당이 돌아오는 편에 보내셨으니, 이는 예전의 후의를 잊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를 보건대 귀국과 우리 국사와는 인연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대장경>을 탑원(塔院)에 안치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송함으로써 사은(四恩; 부모, 중생, 국왕, 삼보)과 온 세계에 이바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장경>이 없으니 귀국에 가서 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 역시 바다의 파도를 무릅쓰고 법보(法寶)를 유통시키려는 마음에 감동하여 기쁘게 도우려고 이 글을 보냅니다. 삼가 청하건대 간절한 뜻을 불쌍히 여기시어 경전 전질을 갖추어 7천 권을 보내주시면 나도 그 혜택을 받으려고 하나이다. 그리하면 두 나라의 우호가 더욱 영구히 계속될 것입니다. 변변하지 않은 토산물은 별폭(別幅)에 적었사오며 감히 편안하게 복을 받으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하옵고 그만 그치나이다.’

그런데 이때 규주가 달라고 한 것은 <대장경> 인쇄본이 아니라 <대장경> 동판(銅版)이었다. 이는 뜻밖의 새로운 요구였다. 이미 <화엄경판>과 <밀교 대장경판>과 금으로 사경한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을 일본에 준 적은 있지만 <대장경> 동판을 달라고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규주의 속마음을 알아챈 것은 왜승 가하(加賀)가 규주가 본국에 보내려고 쓴 초안을 훔쳐 통사 이춘발(李春發)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초안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지금 조선에 와서 힘써 대장경판을 청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으니 병선(兵船) 수천 척을 보내어 약탈하여 돌아가는 것이 어떤가.’





세종은 규주의 속마음을 알고도 그를 인정전으로 불러 달랬다. 더구나 해인사에 <팔만대장경> 목판은 있지만 <대장경> 동판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세종이 <대장경>이라고 부르는 책은 인쇄본일 따름이었다.

“너희가 청구한 <대장경>은 마땅히 정질(正秩)로써 회례사에게 부쳐 보내겠고, 태후가 청한 <대장경>도 또한 마땅히 청한 대로 하겠노라.”

그제야 비로소 규주가 아뢨다.

“신들은 <대장경>의 동판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글월을 받들고 와서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없는 것입니다. 이 뜻을 회서(回書)에 아울러 써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이는 <대장경> 동판을 얻지 못한 자신의 책임을 면하고자 하는 규주의 궁여지책이었다. 세종은 일본으로 떠나는 회례사 박희중(朴熙中)에게 국서를 내렸다. 규주가 바라던 대로 조선에는 <대장경> 동판이 없음을 명기했다.

‘조선 국왕은 일본 전하에게 회답하오. 바다와 하늘이 멀고 넓어서 소식이 오랫동안 끊겼는데 사신 편에 주신 글월을 받아 보니 몸이 편안함을 잘 알고, 또한 좋은 선물을 받게 되니 기쁨과 감사함이 매우 깊소이다. 말씀한 바 <대장경>을 어찌 보내지 않으리오. 또 태후가 귀한 선물을 보내 주시고 겸하여 <대장경>을 청하니 마땅히 보내야 할 것이매, 지금 신하 전농시윤(典農寺尹) 박희중과 용양 시위사 호군(龍驤 侍衛司 護軍) 이예(李藝) 등을 보내어 후의에 사례하게 할 것이오. 상세한 것은 별록에 갖추어져 있으며 귀국의 사신이 말한 <대장경> 동판은 우리나라에 없는 것이니 양해를 바라오. 앞으로 더욱 신의를 굳게 지키고 길이 많은 복을 받기를 바라오.’

<대장경> 목판을 달라고 했다면 세종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침전인 동별궁으로 불러 만난 함허에게 절대로 해인사 <팔만대장경> 목판은 내어주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세종이 “일본과의 화친도 중요하거니와 <대장경>을 무용지물이라는 군신들의 의견을 무조건 물리칠 수만은 없으니 백성이 알지 못하는 한자로 된 경전이나 중들도 읽지 못하는 범자 <대장경>은 과인의 뜻대로 하되 오직 1질밖에 없는 해인사 <팔만대장경> 목판은 결코 내어주지 않겠소. 대사의 생각은 어떻소?”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함허가 감격하여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목판을 지키신 전하의 공덕은 춘추만세에 빛날 것이옵니다.”라고 아뢨고, 신미는 한문으로 된 <팔만대장경>을 무지렁이 백성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우리 글 <대장경>이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원을 세웠던 것이다.

아무튼 진귀한 예물을 가지고 들어오는 일본 사신들의 <대장경> 청구는 끈질겼다. 세종 즉위 5년 가을에도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 난 뒤 금사사(金沙寺)의 진언(眞言) <대장경>과 영통사(靈通寺)의 <화엄경> 목판과 운암사(雲巖寺)의 <금자삼본화엄경(金字三本華嚴經)> 1부와 <금자단본화엄경(金字單本華嚴經)> 1부를 세곡을 실은 선박이 정박하는 수참(水站)의 배로 운송하도록 지시했음이었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