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15>
재회
사헌부에서 흥천사는 의외로 가까웠다. 흥천사는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가 왕비를 추복하기 위해 세운 절인데, 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둔 까닭은 그만큼 태조가 왕비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왕비가 생각나면 언제든지 능을 찾아가고 싶어서 민가가 있는 지척의 산자락에 조성했던 것이다. 5층 사리전을 장엄하게 짓고 고려 때부터 전해온 하나밖에 없는 보물 사십이수관세음보살상을 불단에 봉안한 것도 모두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한 태조 이성계의 의지였다.
길잡이 군사가 원주스님을 만나러 간 사이에 희우는 사리전으로 들어가 참배했다. 희우는 난생 처음 보는 사십이수관세음보살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캄캄해진 허공에 망루처럼 치솟은 사리전의 모습도 장엄했지만 사십이수관세음보살의 번쩍거리는 위의에 숨이 막혔다. 기름불빛에 반사되어 드러난 42개의 손들이 홀연히 앞으로 뻗어 나와 희우의 이마와 어깨를 쓰다듬을 것만 같았다.
희우는 자신이 절하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채 홀린 듯 기도했다. 처음에는 부모를 위해서 했고, 나중에는 신미의 신상에 아무런 해가 없도록 빌었다. 삼배를 하고 나오자 원주스님이 절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희우는 원주스님 앞으로 가 공손하게 합장했다.
흥천사에 모셔진 사십이수관세음보살상.
“스님, 사헌부 감찰 나으리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급한 일인가요?”
“네.”
“신미스님은 지금 주지스님과 함께 출타하고 없소.”
희우는 맥이 풀렸다.
“신미스님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내가 전해주겠소.”
“아닙니다. 감찰 나으리께서 스님을 직접 뵈라고 하셨습니다.”
희우는 낙담했다. 사헌부 대간들이 흥천사로 불시에 야다시를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기조차 했다. 야다시란 한마디로 죄를 캐내어 벌을 주기 위한 표적수사였다. 누구든 샅샅이 조사하면 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신미는 세종이 흠모하는 함허의 제자였으므로 흥천사 대중 가운데 누구보다도 위험했다. 희우가 말을 못하고 있자 원주스님이 대중 방으로 안내했다.
“신미스님을 오늘 밤에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 같소.”
“스님을 뵐 수 있다면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군사가 있으니 돌아가는 밤길은 걱정되지 않소만.”
“스님께서는 멀리 출타하셨습니까?”
“성 안의 중들은 볼 일이 있더라도 밤중에만 다니려고 해요.”
“스님, 어찌 그렇습니까?”
“세상이 바뀌어 어수선해진 까닭에 위험해서 그렇소. 하루아침에 공자 맹자의 딴 나라가 돼버렸소.”
원주스님이 갑자기 흥천사를 조사한 사헌부 감찰에 대해서 분통을 터뜨렸다.
“보살, 하연대감님이 왜 우리 흥천사를 비난하시는지 모르겠소. 처음부터 우리 주지스님 말씀을 믿지 않고 다른 절 노비 말을 듣기만 한 억울한 조사였소.”
“스님께 말씀드리기 외람됩니다만 사헌부에도 불도를 믿는 분이 있습니다.”
“정말이오? 한 번 만나보고 싶소.”
“감찰 나으리 한 분이 독실한 불도입니다.”
“그분이 누구신가요?”
원주스님이 안색을 바꾸었다. 마치 돌파구를 찾았다는 듯 희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희우는 원주스님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얼굴을 돌렸다.
“정자 현자, 감찰 나으리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소. 나 같은 중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요. 사헌부에 불도가 있다니 그분을 만나 흥천사 대중의 억울함을 하소연해 보고 싶소.”
“감찰의 나으리 고조부님이 고려 때 정안 대감이라고 합니다.”
“허허. 내 어찌 정안 대감을 모르겠소. 정안 대감이 안 계셨더라면 지금 왜국의 사신들이 달라고 떼를 쓰는 팔만대장경이 무슨 수로 제작되었겠소.”
“내일이라도 감찰 나으리께 흥천사 대중의 억울함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 가피로 나라를 지키자고 만든 대장경인데 육조의 문무관들이 무용지물이라 하여 왜국에 줘버리자고 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오.”
희우는 불도를 배척하는 조정의 분위기를 흥천사에 와서도 실감했다. 배불의 돌풍이 점점 태풍으로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대장경을 왜국 사신들이 가져가려고 한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던 것이다.
“보살, 감찰 나으리께 전해 주시오. 흥천사 사건은 노비의 고자질만 듣고 조사한 것이니 우리 주지스님의 말씀도 한 번 들어보시라고 말이오.”
“기회를 보아 반드시 감찰 나으리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정말 그래 주시오. 학수고대하고 있겠소.”
이른바 흥천사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선교양종으로 개혁하면서 선종 본사로 지정된 흥천사에서 선직(禪職)과 계를 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노비 가운데 한 사람이 불만을 품고 사헌부에 고자질을 한 사건이었다. 노비 출신의 불목하니가 승려가 되려고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고양 대자암에서 흥천사로 왔다가 발각되어 돌아간 사람이었다. 고려 때부터 노비는 주인이 출가할 때 함께 절로 따라와 승려가 된 주인의 온갖 시중을 들었던 것이다.
노비가 사헌부에 고발한 내용은 모함에 가까웠다. 흉년이 되어 금지된 유밀과가 불단에 올랐는데, 이는 흥천사 대중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신도가 가져온 시주 물이었고, 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흥천사에서 빚은 술이 아니라 신도가 가져온 재물로 천도재가 끝난 뒤 음복했을 뿐인데 노비는 흥천사 대중이 귀한 꿀로 유밀과를 만들어 먹고 술을 빚어 취하도록 마셨다는 식으로 모함했다. 사헌부 대관들은 고자질한 노비의 편을 들면서 흥천사 승려들을 비난하는 조서를 꾸몄다. 세종이 흥천사에서 원경왕후 제사를 지내고 비새는 사리전에 은근히 관심을 갖고 있는 탓이었다. 대관들은 배불에 앞장선 태종과 달리 세종의 그런 숭불적인 태도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결국 희우는 신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섰다. 원주스님은 희우를 산문 밖까지 배웅했다. 사헌부에 감찰 한 명이, 그것도 기원정사를 보시했던 수닷타 장자만큼이나 승려들이 존경하는 정안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캄캄한 동굴 속에서 빛을 하나 발견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희우가 더욱 캄캄해진 어둠 속으로 사라질 무렵이었다. 원주스님이 희우를 다급하게 불렀다.
“보살!”
원주스님의 목소리는 턱없이 컸다. 길잡이 군사가 놀란 채 되돌아보았다. 희우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 사이 원주스님이 달려와 말했다.
“보살, 신미스님을 만나게 해주겠소.”
“스님, 출타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신미스님이 당분간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했기에 그랬소.”
“어머나!”
희우는 비명처럼 짧게 소리쳤다. 갑자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오해는 마시오. 신미스님이 함허스님의 제자라서 대중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소. 미안하오.”
“스님, 감사합니다.”
원주스님이 희우를 속인 것에 대해서 사과했다. 그러나 희우는 신미를 빈틈없이 외호하고 있는 원주스님이 고마웠다.
“신미스님이 있는 임시 거처로 갑시다.”
신미는 원래 대중방 뒤편의 골방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산신각 뒤쪽에 지은 임시토굴로 올라가 있었다. 대중과 떨어져 있는 까닭은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야다시, 즉 표적수사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주스님의 말대로 신미는 산신각과 나무숲에 가리어 드러나 보이지 않는 토굴에 있었다. 토담집 모양의 토굴은 방 하나가 전부였다. 원주스님은 희우를 안내하고는 대중방으로 내려갔다. 희우는 신미에게 절을 했다. 다행히 신미는 단번에 양주 오두막에 살았던 희우를 알아보았다.
“보살, 오래 만이오.”
“스님, 흥천사에서 다시 뵐 줄 몰랐습니다.”
희우는 얼굴을 약간 붉혔다. 신미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의젓해진 풍모에다 목소리는 우렁우렁 굵어져 있었다.
“깊은 인연이 있는가 보오.”
“저는 지금 사헌부 다시청 다모로 있습니다.”
“다모가 되었다니 좋은 일이오. 사람들에게 맑은 차를 공양한다는 것은 복덕을 짓는 일이오.”
그제야 희우는 마음을 진정하고 나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벽에는 은부채 하나가 걸려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토굴이었으므로 황토냄새가 방안에 가득했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사헌부 감찰 나으리께서 어서 빨리 흥천사를 떠나 피신하시라고 하셨습니다.”
“나더러 피신하라는 말이오?”
“이제 성 안팎의 절들은 모두 위험합니다.”
“보살, 마음이 극락도 되고 지옥도 되는 것이오.”
신미는 뜻밖에 태연했다. 오히려 희우를 위로했다.
“스님들이 수행을 잘했으면 이런 고약한 일이 있겠소? 지은 업을 받고 있으니 억울할 것도 없소. 소나기가 멎을 때까지 비를 맞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소.”
“스님, 은부채를 처음 봅니다.”
“임금님께서 내리신 은선(銀扇)이오.”
“임금님을 뵀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은선은 나를 지켜주는 신장님이오. 내 옆에 부처님이 계시고 은선이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실제로 임금의 수인(手印)이 적힌 물건을 지닌 자는 함부로 체포하거나 구금할 수 없었다. 신미가 흥천사를 급히 떠나지 않는 이유도 하사받은 은선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그러니 은선은 신미를 외호하는 신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임금님께서 부채를 주신 깊은 뜻이 있을 것이오. 저 부채 속에는 백성을 시원하게 해줄 바람이, 백성의 눈을 뜨게 해줄 글자가 있소. 나는 그것을 찾고 있는 것이오.”
“스님의 화두 같습니다.”
“보살, 그렇소. 은부채가 나의 화두라오.”
길잡이 군사가 밖에서 발로 땅바닥을 탁탁 소리 나게 밟았다. 밤이 야심해졌으니 사헌부로 돌아가자는 신호였다. 희우는 신미에게 또 다시 절을 하고 물러났다. 감찰 정현의 전언을 신미가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아쉽기는 했지만 달리 방법은 없었다. 그보다는 신미가 말한 알쏭달쏭한 얘기가 머릿속을 여운처럼 길게 맴돌았다. 신미는 자신만의 화두에 몰두하여 위태로워진 처지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