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4회

한 잔의 차, 한 조각 마음

현등사는 대중이 평소에는 열 명도 못 되었다. 함허가 지도하는 경전 반이 개설되면 열댓 명으로 늘었다가 강의하지 않을 때는 대여섯 명으로 줄었다. <반야심경> 등 경전 반이 개설되면 소식을 들은 승려들이 전국 절에서 모였다가 흩어지곤 했다. 울울한 숲에 둘러싸인 현등사는 대중숫자와 상관없이 늘 한적하고 적막했다.

승려들이 주고받는 말이나 발걸음 소리도 새들이 우짖는 소리에 묻혔다. 해인사나 송광사, 봉암사는 계곡물소리가 경내에 가득하지만 현등사는 텃새와 철새들이 오가는 새들의 왕국이었다.

함허는 철새들의 소리를 듣고 흘러가는 세월을 느꼈다. 봄이 오고 있음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새는 휘파람새였다. 후이이 후이이. 새벽예불을 하고 있으면 휘파람새가 컴컴한 숲에서 한동안 길게 울었다. 초여름이 완연히 다가왔음을 실감나게 해주는 새는 꾀꼬리였다. 청명한 날에 꾀꼬리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속까지 상쾌한 울림이 전해졌다. 뻐꾸기는 한여름쯤 날아와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아득한 소리로 울었다.

신미는 돌샘에서 찻물을 기르다 말고 멈추었다. 딱따구리가 참나무 껍질을 쪼고 있었다. 찻물을 뜨러 올 때쯤이면 꼭 긴 부리로 참나무 껍질을 쪼았다. 딱따구리로서는 아침공양거리를 마련하고 있는 셈이었다. 현등사에서 신미가 하는 소임은 함허를 시봉하는 일이었다. 수시로 벼루를 갈거나 찻물을 길어 끓이기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함허가 기거하는 방을 청소했다.

함허는 신미에게 아직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자잘한 허드렛일만 시킬 뿐이었다. 신미에게 말을 길게 하지도 않았다. 용건만 짧게 말하고는 물리쳤다. 복천암에서 만났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분간 신미를 지켜보겠다는 태도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신미는 하고 싶은 말이 목에까지 차 있는 상태였다. 현등사로 오기 전에 경험했던 충격적인 사건을 가슴에 묻어둘 수만은 없었다. 향교 교생들의 방화로 스님이 죽고 절이 불타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딱따구리는 먹이를 구하고자 부리가 으깨질 만큼 나무를 쪼지 않는가. 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래, 오늘은 묻고 말테다.’

신미는 뜨거운 찻물을 들고 함허의 방으로 들어갔다. 솔방울을 태워 끓인 찻물이었다. 방은 늘 묵향이 가득했다. 윗목에는 붓글씨를 쓴 한지가 수북했다. 함허는 며칠째 무언가 집필 중이었다. 함허는 방에 굴러다니는 종이를 단 한 장도 버리지 말라고 신미에게 엄명해둔 터였다.

“거기 앉아라.”

신미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던 함허가 한 마디 했다.

“이 차를 한 잔 마시고 나가거라.”

“고맙습니다.”

“신미야,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다. 네 눈을 보니 그렇다.”

함허는 이미 신미의 눈을 통해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신미는 자신의 마음과 달리 엉뚱하게 말했다.

“스님, 무슨 책을 쓰고 계신지요? 몹시 궁금합니다.”

“알고 싶은 게 그것뿐이냐?”

신미가 잠시 주저하자 함허가 다시 말했다.

“스승이란 제자가 묻는 것을 답하는 사람이다. 답해 줄 능력도 없으면서 시봉을 받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무슨 책을 쓰고 계신지 그것부터 말씀해 주신다면 제가 정말 알고자 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허허허.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란 책이 있지. 거기에다 내가 사족을 붙이고 있다.”

사족이란 말은 함허의 겸손이었다. 일가를 이룬 다섯 명이 <금강경>을 선해(禪解)한 <금강경오가해>에다 함허의 설의(說誼)가 보태져 뒷사람들은 <금강경오가해 설의>를 <금강경육가해(金剛經六家解)>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미는 아직 함허가 집필하고 있는 <금강경오가해 설의>에 대한 깊이와 내용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무심코 들었다.

“저도 공부할 수 있는 책입니까?”

“너는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범자로 된 <금강경>을 구해서 읽어보아야 한다. 그래야 부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범자로 된 <금강경>을 읽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와전된 얘기다. 나 역시도 아쉬운 일이지만 범자 <금강경>은 아직까지 구해 보지 못했다.”

“스님께서는 한자 경전과 범자 경전을 다 보실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두 가지를 다 읽을 수 있지.”

“차이가 있습니까?”

“한역 경전도 더 없이 훌륭하지. 허지만 부처님 육성을 듣고 싶다면 범자 경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스님, 저에게도 범자를 가르쳐 주십시오. 반드시 배워 부처님께서 하신 말로 경을 읽고 싶습니다.”

“좋다. 오늘 당장 가르쳐주겠다. 수행자에게는 내일이란 없다. 지나간 과거도 없다. 오직 지금 현재가 있을 뿐이다. 지금을 전부 껴안지 않고 과거나 미래에 얽매여 사는 수행자가 있다면 그는 가사만 걸친 가승(假僧)이다. 원오극근 선사는 ‘온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어라’했다. 명심하거라.”

함허는 손짓으로 신미를 다탁 가까이 오게 했다. 함허는 차를 권할 때마다 자신이 쓴 다시(茶詩)를 읊조렸다. 술꾼에게 권주가(勸酒歌)가 있다면, 함허가 중얼거리는 시는 권다시(勸茶詩)였다.

한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으니
한 조각 마음은 한 잔의 차에 담겼어라
마땅히 이 차 한 번 맛보시게
한 번 맛보시면 한없는 즐거움이 솟아난다네.

一椀茶出一片心
一片心在一椀茶
當用一椀茶一嘗
一嘗應生無量樂

신미는 함허가 따라주는 작설차를 공손하게 받아 마셨다. 복천암에서 황토빛깔의 무말랭이차를 마셔 보기는 했지만 작설차를 음미하기는 처음이었다. 한 잔의 차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지만 차향은 입안에 그대로 남았다. 두 번째 잔은 차향이 몸속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죽을 마신 뒤끝의 식곤증과 아침나절의 나른한 이완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신이 산뜻하게 맑아지는 동안 저절로 허리가 꼿꼿하게 펴졌다. 어깨마저 가벼워지고 있었다. 이때 좌선하면 그대로 삼매에 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를 마실 때는 차만 마셔야 한다. 찻잔에 너의 심신을 풍덩 빠뜨려야 한다. 차 따로 몸 따로인 것은 조주스님의 가풍이 아니다.”

신미는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다.

“차 마실 때는 이런 저런 생각을 말란 말입니까?”

“그렇다. 너와 차를 일치시켜야 한다. 한 잔의 차와 한 조각 마음이 하나가 돼야 한다. 그래야만 차맛을 온전하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수행의 궁극은 수행과 자신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그제야 신미는 함허가 말한 ‘한 잔의 차와 한 조각 마음’을 이해했다. 그래도 신미는 마음이 흡족한 상태는 아니었다. 신미가 알고 싶은 것은 차가 아니었다. 보름 전에 보았던 불타는 절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들을 먼저 보낸 노파의 안부도 궁금했다.

여러 잔의 차가 몸속에 들어가자 이마에 땀이 송알송알 맺혔다. 차의 기운이 온몸에 퍼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심신이 정화되는 것을 느꼈다. 함허가 찻자리를 정리하면서 좀 전에 했던 말을 정리했다.

“신미야, 나는 너에게 범자를 가르쳐 줄 것이다. 단 그날 배운 것은 그날 다 외워 바쳐야 한다.”

“네.”

“범자는 너에게 행운을 줄 것이다. 반드시.”

“스님, 범자를 공부하기에 앞서 알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함허는 신미의 말을 가로막았다.

“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나는 안다. 원주한테 명성산에 있는 절 방화사건을 상세하게 들었다.”

“악몽을 꾼 것 같아 개운치 않습니다.”

“중들이 받아야 할 과보다.”

“목숨을 잃고 절을 잃었는데도 과보라고 하십니까? 항교 교생들의 무도한 짓이 분명합니다.”

“업을 지었으면 누구라도 피해 갈 수는 없다. 속절없이 받아야 한다.”

“스님들이 무슨 업을 지은 것입니까?”

“지금도 업을 짓고 있다. 앞으로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피할 길은 없습니까?”

“그럴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다.”

“무엇입니까?”

“중생을 위해 정진하는 길이다. 그것밖에 아무 방법이 없다.”

“저의 몫도 있는 것입니까?”

“공부하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네가 찾아야 한다.”

함허 방을 나온 신미는 돌샘으로 갔다. 머리에 불이 붙은 듯 미열이 났다. 목숨과 절을 잃었는데 받아야 할 과보라니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승려들의 업이 왜 그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신미는 표주박에 물을 떠 들이켰다. 달아오르는 몸을 식히고 싶었다.

태화루(太和樓) 뒤 산자락 너머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아버지의 불효 불충의 죄를 묻는다 하여 집안이 풍비박산 났을 때 들었던 어머니의 흐느끼는 소리로 들렸다. 신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눈물 한두 방울이 눈가에 비어져 나왔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