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 <최종회>
꿈
김성숙은 방바닥을 짚고 가까스로 일어나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런 뒤 보름 전에 약국에서 지어온 진통제 세 알을 삼켰다. 약봉지에 든 마지막 진통제였다. 잠시 후, 터져 나오려던 기침은 멎었지만 정신은 몽롱해졌다. 멀리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흐릿한 의식을 쪼는 듯했다. 간밤에 꾼 꿈은 기쁘고도 슬펐다. 5년 전에 꾼 꿈과 흡사한 꿈이었다. 통일사회당 국제국장 김철(金哲)을 만나 다방에서 환담하고 돌아온 날 밤에 꾼 꿈이었다. 김철은 5.16 이전에 일본으로 갔다가 수일 전에 귀국하였는데, 2차에 걸쳐 유럽과 미국 등 민주사회주의 정당들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5년 전 왕십리 피우정으로 이사 온 지 3일 만에 꾼 꿈보다 이번에는 이야기가 더 구체적이었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선명했다. 김성숙은 죽기 전에 꼭 만나고 싶었던 중국의 세 아들을 꿈속에서 다시 상봉했다.
한 노승이 피우정에 나타났다. 노승은 나한전의 나한처럼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주먹코에다 눈은 부리부리했다. 자신의 키 높이만한 육환장을 든 노승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마당에서 김성숙에게 물었다.
“중국으로 건너가서 가족을 만나고 싶소?”
“스님, 남북통일이 되는 날 만날 수 있겠지요.”
노승은 말할 때마다 자신의 흰 수염을 쓰다듬는 버릇이 있었다.
“통일 전이라도 신통으로 갈 수 있소.”
“저는 일찍이 환속하여 도인이 되지 못하였는데 어찌 신통 같은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노승이 흰 수염을 자랑이라도 하듯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나를 따라 오기만 하면 되오. 단 자격이 있어야 할 것이오.”
“무슨 자격을 지녀야 한단 말입니까?”
노승은 김성숙의 호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노승이 흰 수염을 또 다시 만지더니 말했다.
“저고리 안주머니에 있는 것을 내보이시오.”
“도첩증뿐입니다. 평생 넣고 다닌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오. 바로 그것만 있으면 나와 같이 중국에 갈 수 있소.”
김성숙은 읽고 있던 잡지 <사상계>를 한쪽으로 밀쳐놓고 외투를 꺼내 입었다. 밖의 날씨는 영하로 떨어져 있었다. 김성숙에게 한문을 배우겠다는 청운, 천연, 배명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한 삼양에게 <명심보감>을 가르쳐주기로 한 날이었지만 약속을 어기고 노승을 따라 나섰다. 겨울이었으므로 북풍의 손길이 거칠었다. 찬바람을 쐬자 기침이 나고 숨이 더 가빠졌다. 청운, 천연, 삼양의 어머니가 피우정을 나서는 김성숙을 보았다면 만류했을 터였다. 천식이 심해지면 그만큼 그녀의 간병도 힘들어지고, 또한 피우정 쌀독에는 양식이 떨어져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김성숙은 자신의 몸이 풍선처럼 붕 뜨는 느낌을 들었고, 잠시 후에는 구름을 방석 삼아 앉아 있는 듯했다. 구름 위 세상의 날씨는 거친 북풍도 없었고 봄날씨처럼 포근했다. 기침 없이 한숨 편하게 자고 일어나니 낯익은 도시가 나타났다. 노승과 함께 걷고 있는 곳은 베이징 거리였다. 1923년에 금강산을 떠나 처음으로 본 베이징과는 전혀 딴 세상이었다. 고층 빌딩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윽고 노승이 걸음을 멈춘 곳은 고급주택들이 들어 서 있는 목서지북리(木樨地北里)였다. 노승은 김성숙을 셋째아들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는 자신이 사는 절에 볼 일이 있다며 홀연히 사라졌다. 집은 정원이 딸린 고급주택이었다. 정원에는 금가루처럼 황금빛깔을 띤 금목서꽃의 향기가 진동했다. 황실 정원에만 심었다는 금목서는 이제 절의 정원이나 민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번에는 고깔을 쓴 해맑은 여승이 나왔다. 미소를 머금은 여승은 관세음보살처럼 눈썹이 초승달처럼 가늘고 오뚝한 코에다 볼은 통통했다. 김성숙은 여승이 안내하는 대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세 아들 감, 젠, 롄이 모두 아버지 김성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 두쥔후이는 아쉽게도 외출하고 없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세 아들이 일어나 김성숙에게 조선식으로 큰절을 했다. 김성숙은 여승이 내온 감로수를 한 잔 마신 다음 이런저런 얘기 끝에 첫째아들부터 직업을 물어봤다. 무엇을 하고 사는지가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감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저는 광동악단의 지휘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예술가가 되었구나. 우리가 상하이에서 살 때 정율성이라는 혁명음악가가 우리 집에 가끔 머물며 바이올린을 켜곤 했었지. 그때부터 너는 음악을 좋아했었지.”
“둘째 젠은?”
“서양화가가 됐습니다. 북경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충칭에 살 때 내가 방패연을 만들어주면 너는 연에다가 그림을 그리곤 했었지.”
“막내 롄은?”
“저는 예술가인 형님들과 달리 수학과 물리 등을 좋아하여 북경 항천대학(航天大學)을 졸업한 뒤 제 적성을 살려 활동하고 있습니다.”
“네 어머니는 건강 하느냐?”
“어머니는 북경 6중 교장으로 계시다가 퇴임하셨습니다. 특히 농민과 노동자의 자녀들을 가르치시는 데 남다르게 헌신하셨습니다.”

운암 김성숙 선생이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할 때의 모습. 사진=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김성숙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두쥔후이의 안부를 더 물으려고 하다가 목이 메어 잠시 멈추었다. 세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못난 아비한테 할 말은 없느냐?”
“아버지 허락을 받지 않고 저희들은 어머니 성으로 바꾸었습니다. 대신 저희 이름 앞 자에 아버지 성인 김(金)을 붙였습니다.”
김감(金甘), 김건(金健), 김연(金連)을 어머니 성인 두(杜)로 바꾸어 두감(杜鉗), 두젠(杜鍵), 두롄(杜鏈)으로 개명했다는 첫째아들 감의 얘기였다.
“아, 그것은 일찍이 네 어머니가 나에게 양해를 얻은 일이다.”
“아버님,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오겠습니다.”
첫째아들 감이 방을 나갔다. 둘째와 셋째만 남아 김성숙과 얘기를 나누었다. 여승은 말없이 밖의 벤치에 앉아서 염주를 굴리며 ‘아미타불’을 외고 있었다. 감정이 섬세한 둘째는 김성숙이 두쥔후이의 안부를 물을 때마다 안경을 벗고 눈을 훔쳤다.
“연애시절에는 네 어머니를 엘레나라고 불렀지.”
“뚜르게네프의 소설 <전야>의 여주인공이 엘레나죠?”
“그래, 맞다. 혁명가를 사랑한 아름다운 엘레나였지.”
김성숙은 두쥔후이와 함께 다녔던 중산대학 시절이 떠올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는 저희들에게도 <전야>를 읽도록 권했습니다.”
여승이 들어와 거실 다탁 위에 감로수가 든 정병(淨甁)을 놓고 나갔다.
“아버님, 중국에는 언제까지 계실 겁니까?”
“그건 모른다. 노승이 허락할 때까지다.”
“아버님은 왜 저희들을 데리러 오지 않았습니까?”
셋째의 원망어린 물음에 둘째가 대답했다.
“아버님 편지에 어머님이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답장을 하셨으니 원망할 필요는 없다.”
“젠의 말이 맞다. 내가 한국에서 출가 전에 결혼한 늙은 아내가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편지를 하자 네 어머니가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허나 중국에 두고 온 너희들을 어찌 하루라도 잊었겠느냐?”
이윽고 여승이 노승이 왔다고 전해주었다. 오고 가는 것은 김성숙의 의지가 아니었다. 노승의 생각에 따라 김성숙의 몸은 저절로 움직였다. 끝내 두쥔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성숙은 젠과 롄에게 말했다.
“한국이 남북통일 되면 다시 오겠다. 그때 만나자구나.”
“아버지, 한국의 남북통일은 언제 됩니까?”
“지금도 나는 주장하고 있단다. 자주독립을 하지 못한 우리나라는 외국세력에 의해 남북한이 분단하여 전 민족이 신음하고 있으므로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자주노선을 밀고 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 힘으로 남북통일이 될 것이다.”
아들의 물음에 대답하는 김성숙은 괴로웠다. 메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쭈글쭈글한 볼을 타고 주르르 흘렀다. 아내 두쥔후이를 만나지 못하고 가는 것도 안타까웠고, 남북통일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여 심장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김성숙은 숨을 몰아쉬며 심장을 움켜쥐었다.
김성숙이 베고 있던 베갯머리가 축축했다. 푸른 새벽빛이 창을 타고 넘어와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을 알리는 닭 우는 소리에 의식 한 가닥이 또렷해졌다. 간밤 꿈에서 만난 세 아들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항상 마음으로 사랑했던 군혜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탓이리라. 언제나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죽기 전에 남북통일만 되면 만날 수 있을 게다.’
멎었던 천식기침이 다시 터져 나왔다. 김성숙은 찬물로 기도를 진정시켰다. 그래도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진통제는 약봉지 안에 더 이상 없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약국으로 보내 진통제를 사오게 할 수도 없었다. 김성숙의 호주머니 속에는 단 1원도 없었다.


운암 김성숙 선생의 장례식 장면. 사진=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김성숙은 두어 시간 동안 천식기침을 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기침발작 끝에 사지가 늘어졌다. 기침을 토해낼 여력도 없는 혼절이었다. 다행히 심장의 박동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맥박은 느리게나마 뛰고 있었다. 김성숙은 택시에 실려 급히 서대문에 있는 성요셉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가 응급조치를 취하자 김성숙은 가늘게 실눈을 떴다. 동공은 이미 풀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숙녀와 정봉, 청운 등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웅얼거렸다. 한국의 가족에게 남기는 유언은 그뿐이었다. 단 하나 너희들을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는 표정이 전부였다. 김성숙은 응급실의 형광등 불빛이 부신 듯 눈을 감았다.
결국 김성숙은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유족들은 그의 기침소리라도 듣고 싶어 그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흔들었지만 그의 심장은 곧 멎고 말았다. 눈을 감은 김성숙의 강개한 얼굴에는 울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죽은 뒤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겠다는 투쟁의지의 발현 같기도 했다.
1969년 4월 12일 오전 10시.
그에게 허락된 이승의 시간은 거기까지였다. 김성숙은 이승의 남루한 헌옷을 벗고 불우한 혁명가로서 삶을 마쳤다. 반생(半生)은 중국 대륙에서 풍찬노숙하면서 항일투쟁을 했고, 조국에서의 반생은 끼니를 걱정하는 가난과 투옥의 고초(苦楚), 말년의 병마 속에서도 민족자주노선으로 남북통일을 갈망했던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끝>
*그동안 정찬주 선생의 장편소설 '금강산 붉은 승려'를 애독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연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소설 연재에 아낌 없는 협찬을 해주신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와 민성진 회장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