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31

해방 전후

광복군 제 2지대 대원 김준엽(金俊燁)은 약도만 들고 김성숙의 집을 찾아갔다. 김성숙이 세 들어 사는 집은 충칭 남안구의 언덕빼기 달동네 뒷골목에 있었다. 김준엽은 언덕빼기를 다 오른 뒤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약도를 다시 꺼내 보니 마주보이는 엉성한 대나무집이 김성숙이 사는 거처가 분명했다. 몸채는 흙벽돌집인데 현관은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놓아 비가 오면 빗물이 샐 것 같았다. 김준엽은 가게로 가서 호주머니를 털어 배갈과 건포도 안주를 샀다. 항일투사로서 대선배인 김성숙에게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어려운 중국생활이지만 빈손 방문은 조선인들 사이에 가장 무례한 일이었다.

정율성의 매형인 박건웅은 충칭생활 대부분을 김성숙 집에서 얹혀살고 있었다. 박건웅은 생활이 궁핍해져 일찍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국내로 들여보내고 홀아비처럼 살고 있었던 것이다.

“김원봉 부사령관님께서 약도를 그려줘서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절 받으십시오.”

“누군가?”

“저는 김준엽이라고 합니다. 광복군 대원입니다.”

“거기 제 1지대는 조선의용대 출신이 대다수지?”

“그렇습니다. 저는 제 2지대 대원입니다.”

“반갑네.”

조선의용대 대원 일부는 공산당의 홍군을 따라갔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해체를 선언하고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흡수되었는데 1942년 7월의 일이었다. 조선의용대와 통합한 광복군의 초대 총사령관은 지청천(池靑天), 부사령관은 김원봉이었다.

20대 중반의 김준엽이 큰절을 하고 나자 김성숙은 자못 놀라면서 말했다.

“김 동지가 나를 찾다니 괜찮겠소? 임정 안에서 나를 진짜 빨갱이라고 음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소.”

박건웅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정통성이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아래 모이자고 합의해서 우리가 합류했는데 임정 안에서조차 또다시 당이나 노선을 들먹이며 대립하다니 씁쓸하오. 김 동지는 어떻게 생각하오?”

“저는 선생님들의 존함을 일찍이 듣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인사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선생님들의 주장을 동조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김성숙은 머리카락이 다 빠진 대머리가 되어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적어도 10여 년은 더 나이 들어 보여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의 늙은이 같았다. 김성숙이 술을 두어 잔 마시더니 신세타령하듯 말했다.

“내가 임정에 합류할 때 김원봉 단장하고 얼마나 다툰 지 아시오? 내가 윽박지르다시피 설득하여 김 단장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 대원들을 임정에 가담시켰어요. 그러고 나니까 조선민족혁명자연맹을 이끄는 유자명 동지와 그 대원들도 합류했소. 내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오.”

광복군 제 2지대 대원 김준엽(金俊燁)

김성숙의 얘기를 듣고 있는 청년 김준엽의 이력도 드라마틱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도쿄 게이오(慶應)대학 학생이었는데 학도병으로 징집당해 중국 쉬저우(徐州)의 쓰가다(塚田)부대에 배치되었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충칭까지 6천리 길을 걸어 임정의 광복군 대원이 되었던 것이다. 김준엽은 삭발한 승려처럼 머리카락이 없는 김성숙의 대머리를 무의식적으로 보다가도 그의 열변에 감동하여 눈길을 거두곤 했다.

“내가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만들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전부 중국공산당원이 되어 버렸다. 조선공산당이 중국공산당이 다 되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나 혼자만이라도 조선혁명을 위해 노력해보자. 그런데 나 말고도 중국공산당에 들어가지 않은 채, 혹은 들어가지 못한 채 조선공산당 운동이나 조선의 혁명에 몸 바치려는 동지들이 있지 않은가? 이들이 함께 일할 곳을 만들자.’ 이래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만들었어요. 이 이름 안에 공산주의라는 말을 넣지 않았어요. 나는 공산주의보다 조국의 해방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단체를 공산주의 단체로 본 것은 사실이오. 임정에서도 우리를 그렇게 인정했으니까.”

김성숙은 얘기를 하다가 멈추었다. 안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내 두쥔후이가 아기를 다독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자장자장’ 히면서 조선말로 아기를 달래고 있었다. 실제로 두쥔후이는 충칭임정 외교부 과원(課員)으로 일하면서 자신을 ‘조선의 딸’이라고 연설한 적도 있었다. 김성숙이 안방 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작년에 또 아들을 봤어. 이름을 롄(連)이라고 지었지.”

“다복하십니다.”

“여보! 손님이 왔어요.”

두쥔후이가 바로 나왔다.

“낮술이군요. 아기 좀 봐줘요. 안주를 마련해 올 테니까요.”

“불쑥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아이들 아버지가 요즘 쓸쓸해하는데 잘 오셨어요.”

김성숙이 셋째인 롄을 보듬어 받는 사이에 15살 감과 12살 젠이 나와서 김준엽에게 인사를 했다.

“아기 눈이 또록또록 합니다. 선생님.”

“엄마 눈을 닮았어요. 눈을 보고 있으면 이놈이 큰일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요.”

김성숙은 다시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임시정부를 새롭게 강화할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해외에 있는 모든 정치세력은 임정에 집중하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나부터 솔선해서 나섰던 것이오.”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던 박건웅이 한 마디 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당이나 노선은 원래대로 유지한 채 임정 아래로 모든 단체들이 참여하는 통일전선이었소.”

“박 동지의 말이 맞아요. 무슨 당이 무엇을 한다고 하지만 권위로 보든지 국내의 대중 일반에 대한 영향으로 보든지 그래도 임정밖에 없거든. 임정도 계속해서 일본하고 싸워왔으니까 임정을 중심으로 해서 모이자고 한 것이었소. 당을 같이 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정부를 같이 하자는 것이니까 명분이 있었어요.”

“김 동지 생각은 어떻소?”

“선생님 의견에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조국해방이라는 목적 아래 모든 세력이 힘을 합치는 통일전선이 대의명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두쥔후이가 안주를 사왔다. 아마도 채소가게를 다녀온 듯 오이가 싱싱했다. 김성숙은 배갈을 마실 때 반드시 오이를 생으로 먹는 습관이 있었다. 오이가 없을 때는 생무라도 안주 삼아 먹었다.

“난 우리나라의 절대다수인 무산계급의 해방에는 동조하는 사람이오. 하지만 방법론에 있어서 계급투쟁이나 폭력혁명에는 반대하는 사람이오. 우리의 급선무는 모든 세력이 힘을 합쳐 일본제국주의 노예가 되어 있는 동족을 해방시키는 것 아니겠소? 그런데도 투쟁이나 혁명을 앞세우는 것은 우리의 화급한 현실과 맞지 않을뿐더러 왜놈들에게 억압받고 있는 우리 조선인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술을 몇 잔 더 마시고 난 뒤에는 취기를 빌려 임정의 우파들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했다. 김원봉, 박건웅 등과 함께 임정의 국무위원에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지만 임정의 우파 일부로부터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진짜 빨갱이라면 왜 충칭에 남아 있겠소? 임정의 국무위원으로 왜 활동하고 있겠소? 나도 엔안으로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소. 그러나 내 인생목표는 조국해방이었기에 나는 좌파를 설득해 임정에 참여했던 것이오.”

술자리는 초저녁이 되어서야 파했다. 김준엽은 젊은 패기로 술을 마셨지만 그도 역시 김성숙의 집을 나설 때는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김준엽은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일깨우면서 겨우 언덕빼기를 내려와 인력거를 불러 탔다.

이른바 ‘빨갱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임정에 합류한 김성숙의 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한번은 김구 주석에게 국무위원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반려된 적도 있었다. 유엔창립총회 때 임정의 대표자격으로 참석한 이승만이 벌인 반소활동(反蘇活動) 때문이었다. 유엔총회의 중국대표로 참가한 동비우(董必武)가 친분이 있는 김성숙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의 편을 들어 반소연설은 물론 반소전단까지 살포했다고 전해주었는데 김성숙은 격분했다. 소련 역시 임정에 대해서 적의를 가진 적이 없었지만 태도를 바꾸어 임정을 중국 국민당의 주구이자 반소 특무기관이라고 비난했다.

이승만의 반소 입장은 임정의 국제외교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소 간에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할 힘없는 임정의 외교활동에 큰 장애가 되었다. 김성숙은 조소앙, 김원봉, 장건상 등의 동의를 얻고 나서는 즉시 김구 주석에게 임정 국무위원회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그런 뒤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인 이승만을 맹렬하게 비판하며 파면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무위원회에서 이승만 파면 건은 다수결표결로 부결이 됐고, 김성숙은 국무위원 사퇴서를 김구 주석에게 제출한 뒤 충칭시 밖에 있는 판시(磻溪)로 떠나버렸다.

이는 훗날 이승만 정권과의 갈등을 예고하는 사건이 되었다. 불우한 김성숙의 소식은 한국으로 오지 못한 두쥔후이에게도 전해져 그녀를 한동안 우울하게 만들었다. 김성숙은 이승만의 노선과 반대되는 길을 걸으면서 박해를 받았고, 그 후의 정권에서도 좌절과 시련이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1945년 11월.

8월 15일에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지 3달 만이었다. 김성숙에게 3달은 일제의 패망으로 얻어진 조국해방의 황홀한 기분과 동시에 미소 강국에 의한 남북분단이라는 한탄이 교차하는 기간이었다. 김성숙은 임정을 따라 충칭에서 상하이로 갔다. 조국이 독립했으니 서둘러 귀국하기 위해서였다. 두쥔후이와 세 아들은 미군군용기를 탈 수 없다는 미군정(美軍政)의 방침으로 충칭에 남았다. 김성숙은 귀국하여 자리를 잡으면 가족을 부르기로 약속했다. 미군군용기를 함께 탈 수 없었던 두쥔후이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한국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곧 알았다. 여비를 마련한다 해도 한중수교 전이었으므로 한국으로 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일제가 패망한 뒤 충칭은 갑자기 무서운 도시로 돌변했다. 공산당원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국민당원들의 백색테러가 날마다 도심 거리에서 벌어졌다. 두쥔후이는 거리로 나갈 때는 평범한 아낙네처럼 신분을 위장했다. 설상가상 둘째아이 젠이 복막염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았다. 결국 두쥔후이는 충칭에서 더 살지 못하고 아이들 셋과 함께 46년 1월말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상하이에는 지인들이 많아 안주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복막염을 앓은 둘째아이 젠은 상하이에 살면서도 병을 달고 살았다. 이번에는 늑막염에 걸려 입원했다. 두쥔후이는 둘째아이 치료비를 마련하느라고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빌렸다. 둘째아이가 입원해 있을 때는 월세를 아끼기 위해 낮에는 아이들과 함께 다른 곳에 있다가 밤이 되면 병원 병실로 돌아와 밤을 지새웠다.

두쥔후이의 희망은 남편 김성숙을 다시 만나는 것뿐이었다. 특히 병약한 둘째 젠은 병실 침대에서 열이 오를 때마다 아버지 김성숙을 찾았다. 두쥔후이 가족 모두는 한국으로 떠난 김성숙을 애타게 기다렸다. 김성숙이 머잖아 반드시 가족을 부르겠다며 약속하고 떠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