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30>

연날리기와 수영

충칭(重慶) 시가지는 양쯔강(長江)과 자링강(嘉陵江)이 합수해서 흘러가는 곳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었다. 김성숙 부부는 서민들이 밀집해 사는 장강 이남의 남안구에 살았다. 특히 남안구는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이른바 조선촌도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조선촌에는 항일투사들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드나들었다.

김성숙 부부는 결혼한 뒤 처음으로 금불산(金佛山) 초입의 노상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겼다. 온천수는 30도 정도로써 뜨겁지 않았다. 온천수 속에 사는 물고기들이 맨살을 간지럽게 했는데 사람을 겁내지 않고 살갗을 콕콕 쪼았다. 두쥔후이(杜君慧)는 기겁을 했다. 속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은 두쥔후이의 몸매는 두 아이를 낳은 여인 같지 않게 날씬했다. 혼기를 앞둔 처녀처럼 가슴과 둔부가 풍만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로 흘러내려 감추어진 야성미도 드러났다.

“아이들도 데려올걸 그랬어요.”

“지금은 당신 자신을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구려.”

“당신은 즐겁지 않으세요?”

“왜 즐겁지 않겠소. 이 순간이 꿈만 같소.”

“꿈이 아니라 현실이에요. 당신과 내가 지금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요.”

김성숙 부부는 온천욕을 끝내고 부근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두쥔후이는 식당메뉴판을 보더니 화과(火鍋), 일종의 전골을 시켰다. 광저우요리가 달콤하다면 충칭요리는 몹시 매웠다. 충칭사람들은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 고추와 독특한 향의 산초를 넣어 요리했다. 김성숙은 곱창과 생선, 육류와 야채 등이 들어간 전골요리를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다.

마치 전장 터의 직업군인이 휴가를 받아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두쥔후이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전장 터의 동지들을 생각하면 지금 당신과 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의 휴식도 길지는 못할 거예요.”

“당신 생각이 맞아요. 지금 우리는 투쟁하다가 잠시 멈칫거리고 있을 뿐이지요.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이 연합해 투쟁하고 있지만 우리 조선 우파와 좌파는 그러지 못하고 있어요.”

“저우언라이 동지와 장제스(蔣介石) 동지가 만나 연합했던 것처럼 당신도 임시정부의 누군가를 만나야 해요.”

“나야 당장 임시정부를 찾아가 합작하고 싶지만 지금까지 함께 투쟁해온 조선민족해방동맹 동지들의 동의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민족혁명당, 그리고 조선혁명자연맹 등의 단체와 연합전선을 펴기는 했지만 충칭으로 옮겨온 임시정부와 힘을 합치는 데는 난관이 많았다. 노선의 차이도 부인할 수 없었고 주도권 다툼의 힘겨루기도 있었다.

김성숙 부부는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식당에서 마저 하지 못한 얘기를 계속했다.

“당신은 조국해방이 될 때까지 좌와 우를 초월하자는 민족주의자예요. 그것이 바로 불교의 중도논리라는 당신 주장에 나는 동의해요. 맞아요. 당신 나라에서 좌파와 우파를 아우를 수 있는 이념은 민족주의밖에 없어요.”

“중국은 민족주의가 없다는 것인가요?”

“중국은 단일민족이 아니에요. 여러 민족이 하나가 된 대국이에요. 그러니까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분열을 자초하는 것이죠.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잡은 것은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기 때문이죠. 공동의 적이 사라지면 분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반봉건, 반제국주의를 내세운 공산당이 국민당보다 도덕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우위에 설 수밖에 없어요. 중국인민들은 결국 공산당 깃발 아래 모일 수밖에 없어요. 국민당을 따라가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들이 중국 공산당을 협조해온 이유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소.”

“중국 청년들이 홍군을 따라서 엔안으로 떠나는 것도 그러한 현상이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은 여자지만 시야가 넓고 탁월하군요. 정율성 동지의 편지를 보면 엔안의 뜨거운 혁명 분위기가 느껴지니까요.”

“싸오쩡의 편지를 보면 누구라도 공산당의 미래를 예감할 수 있을 거예요.”

정율성은 김성숙 부부에게 가끔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의 편지에는 엔안의 분위기와 자신의 음악공부 이야기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두쥔후이는 곧 잠들었고 김성숙은 내일 아들 감(甘)과 젠(健)에게 연을 만들어주기로 한 약속을 떠올리며 엎치락뒤치락 했다. 이제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일부 동지들만이라도 임시정부에 참여해 투쟁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상하이로 보낸 정율성의 편지는 다행히 의열단 단원을 통하여 충칭으로 이사 온 김성숙 부부에게 전해졌다. 첫 번째 편지에는 정율성이 섬북공학을 졸업하고 노신예술학원에 입학했다는 소식과 엔안에는 한 달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학원들의 교육기간은 6개월밖에 안되며 수학이 끝나면 바로 항일과 혁명의 현장에 배치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두 번째 편지에는 정율성이 작곡한 <엔안송(延安頌)>이 엔안에 온 젊은이들에게 인기곡이 되었다는 사실과 마오쩌둥의 칭찬을 받았고 주더(朱德)가 자신에게 총 한 자루를 선물했다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

<엔안송>은 노신예술학원 동기생들과 북문 밖의 산에 올랐다가 노을에 붉게 물든 보탑산 봉우리와 엔안 시가지를 행진하는 학생들의 모습 등을 달이 뜰 때까지 보고 있다가 혁명에 대한 격정이 솟구쳐 옆에 앉은 입학동기인 중국인 여학생 모예(莫耶)에게 가사를 부탁하여 작곡한 노래였다.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이 불타고

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이 흐르네

봄바람 들판으로 솔솔 불어오고

산과 산 철벽을 이루었네

아, 엔안! 장엄하고 웅대한 도시

항전의 노래 곳곳에 울린다.

<엔안송>이 처음 불려진 곳은 엔안의 중앙대례당이었다. 마오쩌둥의 연설에 앞선 공연에서 정율성은 바이올린을 켜며 여가수 당영매(唐榮枚)와 함께 불렀다. 노을이 보탑산을 적시듯 서정적으로 잔잔하게 시작한 곡조는 행진곡풍으로 바뀌어 우렁차게 불리다가 다시 달빛이 물결에 스며들듯 고요하게 끝났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당의 간부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가사를 쓴 모예는 한쪽에서 환호하는 당 간부들을 보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정율성은 노신예술학원의 비서장에게 불려가 마오쩌둥이 당 간부회의에서 엔안의 혁명정신을 격찬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후 마오쩌둥은 정율성을 위로하기 위해서 엔안에 모인 조선인들을 만나게 해주었고,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는 정율성에게 파격적으로 성능이 뛰어난 총 한 자루를 선물했다. 천재성을 인정받은 정율성은 노신예술학원을 졸업하자마자 항일군정대대학에 배치되어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17곡이나 작곡하였고 섬북 민요와 가곡을 결합한 서정적인 노래 <연수요(延水謠)>를 발표했다.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 딩쉐쏭(丁雪松)을 만난 것은 항일군정대학에 근무할 때였다. 당시 딩쉐쏭은 항일군정대학 여학생대대 대장이었으므로 회의 때마다 자주 마주쳤던 것이다. <팔로군 행진곡>의 가사를 쓴 청년시인 궁무(公木)와 교유한 것도 항일군정대학 시절이었다. 정율성은 궁무에게 가사를 부탁하여 바로 작곡에 들어갔던 것이다.

운암 김성숙 선생과 그의 세 아들. 항일독립투쟁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운암 선생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중국에서 이룬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진=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김성숙은 두 아들과 약속한 대로 연을 만들었다. 대나무를 젓가락처럼 얇게 갈라서 살을 만든 뒤 커다란 문종이를 직사각형과 마름모꼴로 잘랐다.

“아버지, 연 만드는 것을 어디서 배우셨어요?”

감과 젠은 능숙하게 연을 만드는 김성숙 곁을 떠날 줄 몰았다.

“조선에서 살 때 배웠지.”

“조선이 어디 있는데?”

“저 동북쪽에 있는데 땅덩어리가 호랑이처럼 생긴 나라다. 연은 서당에 다닐 때 친구와 같이 만들었지.”

“서당이 연 만드는 곳이에요?”

“아니다. 서당은 한문을 배우는 곳이다.”

“아버지는 공부하지 않고 연만 만들었구나.”

“아버지가 살던 나라에서는 연날리기 대회도 있었단다.”

김성숙은 아들들에게 직사각형은 방패연, 마름모꼴은 가오리연이라고 얘기했다. 방패연은 자신이 혼자서 만들었지만 가오리연은 두 아들과 함께 만들었다. 감과 젠에게 종이조각을 주고 가오리연 꼬리를 붙이도록 했던 것이다. 이윽고 김성숙은 방패연과 가오리연을 들고 양쯔강 강변으로 나갔다. 때마침 남동풍이 강북 시가지 쪽으로 불어가고 있었다. 연날리기에 더 없이 좋은 바람이었다.

아이들이 날리는 가오리연의 실은 곧 바람에 끊어지고 말았다. 실이 바람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김성숙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연을 보며 향수에 젖었다. 조선은 연이 사라지고 있는 서북쪽 너머 먼 하늘 아래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고국을 떠난 지 15년이나 되었다.

김성숙은 아이들이 심심해하자 늪지 가운데의 깊지 않은 둠벙으로 갔다. 갈대가 울타리처럼 자라 있었으므로 옷을 홀랑 벗어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 김성숙은 두 아들과 물장구 장난을 친 다음에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두 발과 두 손으로 물장구를 치면서 가는 것을 개구리헤엄이라고 하지.”

“아버지는 어른 개구리, 우리는 아기 개구리. 개굴개굴.”

두 아이들이 개구리 울음소리를 흉내 내며 웃었다. 김성숙은 두 손으로 감과 젠의 몸을 교대로 바치면서 물에 뜨는 연습을 시켰다. 몸이 물에 뜨게 되면 두 손과 두 발을 움직이면서 앞으로 나가게 했다. 두 아들은 입술이 파랗게 질릴 때까지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감과 젠의 고추가 번데기처럼 오그라들었다.

“아버지, 날마다 연 날리고 수영만 했으면 좋겠다. 내일 또 와.”

“그러자구나. 나도 너희들과 이렇게 번데기를 내놓고 노는 시간이 좋다.”

“내일 또 연 날리는 거 약속해 줘.”

“좋아. 수영도 하자구나.”

김성숙은 강변 모래밭에 누워 아이들과 함께 몸을 말렸다. 새떼가 날아가고 있었다. 북쪽으로 날아가는 철새 떼였다. 철새 떼는 날갯짓을 멈추지 않고 북쪽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신세도 철새와 마찬가지였다. 조국이 해방되는 그날 중국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성숙의 두 눈이 젖었다.


*알림: 독자의 요청으로 인해 이번 연재부터 중국인의 인명과 지명이 중국어로 표기됨을 알려드립니다. 예) '두군혜'는 '두쥔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