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20

생무

가을이 왔지만 광주의 한낮은 여전히 더웠다. 섭씨 30도를 넘어서는 날이 많았다. 걷다가도 땀이 나면 그늘에서 식혀야 했다. 다만 비 오는 날이 봄여름보다는 줄어들어 습도는 낮았다. 석양 무렵에야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김성숙과 두군혜도 수업이 끝나면 중산대학을 빠져나와 바로 약속장소로 가곤 했다. 두 사람이 만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그들이 자주 가는 곳은 황화강열사능원이었다.

두군혜는 김성숙을 만나는 날에는 늘 중국여성의 전통 옷차림을 했다. 김성숙은 두군혜의 전통 옷차림을 좋아했다.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가 드러나게 달라붙은 전통 옷차림은 김성숙의 심장을 뛰게 했다. 비단 천에 새겨진 만개한 모란꽃들은 여인으로 성숙한 두군혜를 상징한 듯했던 것이다.

그날도 김성숙과 두군혜는 황화강열사능원 초입의 가로수길을 걸었다. 백운산 맞은편의 먼 산자락으로 석양이 기울고 있었다. 석양빛에 반사된 두군혜의 콧날이 더욱 오뚝해 보였다. 두군혜는 김성숙과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이 더 없이 행복했다. 두 사람은 능원 앞의 식당에 들어 잡채와 만두를 시켰다. 김성숙은 특히 잡채를 잘 먹었다. 팔보채는 비싸기도 하거니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해산물 요리는 개펄 냄새가 나고 느끼하여 잘 시키지 않았다. 김성숙은 언제나 허둥지둥 먹고는 두군혜가 남긴 음식까지 해결했다.

“나는 잡채가 조선 요리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보니 광동 요리이군요.”

물론 나물이나 당근이 들어가는 조선의 잡채와는 달랐다. 광주의 잡채는 독특한 향신료와 해산물이 들어가 있으며 단맛이 더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광주에서 잡채를 먹는다는 것은, 그것도 자신보다 6살 아래의 귀여운 두군혜와 함께 식사한다는 사실은 김성숙만이 갖는 행운이었다.

“지난번에 <전야>를 스무 번 읽었다고 했소?”

“그 뒤로는 시험 때문에 못 읽었어요.”

“이제 일어독해는 그런대로 되지요?”

“사전에서 단어만 찾으면 할 수 있어요.”

“일본 공산주의 창시자지요. 가타야마 센(片山潛)이 쓴 <나의 사회주의(我社會主義)>를 구해서 읽어봐요. 독해실력도 늘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거요.”

“일본이 중국보다 공산주의 사상이 앞선 나라인가요?”

“제국주의 일본이지만 소수의 양심세력은 공산주의자들이라오. 내가 좋아하는 승려 세노기로(妹尾義郞)도 있어요. 그는 농촌에서 소작쟁의를 중재하는 동안 토호들의 착취와 횡포를 알게 된 뒤부터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일련종 종단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산중에서 깨닫는 ‘나만의 깨달음’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어요. 나와 남, 정신과 물질이 하나라는 부처님의 연기법 입장에서 남이 불행하고 물질이 불공평하게 주어지는 환경에서의 ‘나만의 깨달음’은 성립할 수 없다고 본 것이지요.”

“제국주의 야만성이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공산주의를 공부하려면 일본으로 유학 가는 것도 한 방법이겠군요.”

“아무튼 세노는 부처님의 사상이나 마르크스의 주장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지요. 계급을 부정하고 민중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 등이 공통점이라고 보았어요.”

“금강산 붉은 승려답군요.”

“이해가 빠른 엘레나씨는 명석하다니까.”

“제가 엘레나라구요?”

“<전야>의 엘레나, 그 이상으로 이타적인 여성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소.”

그날따라 두군혜는 열사능원 안의 72열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1911년 4월 27일 손문을 따르는 동맹회(同盟會)는 황흥(黃興)의 지시로 광주에서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1백여 명이 모두가 팔에 흰 천을 두르고 청정부(淸政府) 양광총독서(兩廣總督署)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합세할 줄 알았던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할 수 없이 봉기한 사람들은 총독서 건물에 불을 지르고 빠져나왔지만 곧바로 청정부 군인들에게 색출되어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시신은 거리에 내던져졌다. 5월 3일이 되어서야 동맹회 회원 반달미(潘達微)가 신문기자로 위장하여 사람들을 동원한 뒤 시신을 수습하여 현재의 능원에 가매장했다. 그런데 열사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중국 도처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민중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신해혁명은 성공했고, 그것을 계기로 열사능원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1919년에 완공되었던 것이다.

“엘레나씨. 신해혁명이 좌초된 원인이 무엇인지 아시오?”

“손문 선생에게 혁명군사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힘이 없었기에 부패한 청정부에서 군권을 쥐고 있던 원세개(袁世凱)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던 거예요.”

청정부가 어떻게 무너지고 말았는지를 두군혜는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원세개는 신해혁명의 성과를 가로챈 뒤 청 황제를 퇴위시키고 나서는 자신이 황위에 올라 봉건제도를 다시 회복하고,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는 등 자기 세력을 확보하려다가 각 지역 군벌들의 퇴진투쟁이 일어나자 1916년 황제의 지위에서 스스로 물러난 뒤 3개월 만에 울화병으로 죽었던 것이다.

손문이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한 동기는 군사 없이 민중혁명을 성공시키려 했던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손문은 자신의 각오를 만방에 알리기 위해 국민당 정부의 총리가 아니라 스스로를 국민당 혁명군의 대원수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언제 저희 집으로 가요. 식구들이 성숙씨를 한 번 보고 싶어 해요.”

“어려운 일은 아니오. 나도 빨리 인사를 드리고 싶소.”

김성숙은 두군혜 가족들의 허락을 받고 그녀를 떳떳하게 만나고 싶었다. 중산대나 황포군관학교의 동지들에게도 알려 공개적으로 연애를 하고 싶었다. 서로가 사랑하면서도 몰래 만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김성숙과 두군혜는 이미 서로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황호강열사능원을 나와 차응준이 머물고 있는 광효사로 갔다. 다른 날 같으면 밀린 과제 때문에 바로 헤어졌는데 두 사람은 한 마음이 되어 광효사로 향했다. 두 사람이 차를 타고 가려 하는 광효사는 당나라 때 육조 혜능대사가 삭발하고 구족계를 받은 곳으로 유명한 절이었다.

광효사 경내는 붉은 깃발이 유난히 많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는 자풍선서(慈風扇瑞), 불광보조(佛光普照), 수희공덕(隨喜功德) 등등 네 글자의 법어나 혜능대사의 게송이 적혀 있었다. 예전에는 풍번(風幡)이라고 불렸던 장식물이었다.

차응준이 요사에서 나와 친절하게 맞이했다. 차응준 얘기에 의하면 그 옛날 혜능대사가 광효사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풍번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고 한다. 광효사는 이른바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라는 비풍비번(非風非幡)의 화두가 탄생한 현장이라고 설명했다.

혜능이 홍인의 법을 이어받았다는 소문은 이미 남쪽 광주 땅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 법성사(현 광효사) 주지였던 인종(引宗)법사도 혜능의 수법(受法)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인종은 법성사를 찾아온 봉두난발의 사내가 혜능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마침 인종은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다가 문득 바람에 펄럭이는 풍번을 보고는 학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어떤 학인은 바람이 움직인다 하고, 어떤 학인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며 서로 다투었다. 그때 혜능이 인종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인종이 혜능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움직이는 것이냐?”

“스님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인종은 소문으로만 듣던 혜능이 아닐까 의심했다.

“오래 전부터 홍인대사의 가사와 법을 전수한 분이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혹시 당신이 아닙니까?”

“과분한 말씀입니다.”

인종은 합장하며 기뻐했다.

“제가 경을 강의하는 것은 마치 깨어진 기왓장과 같고 당신의 말씀은 순금과 같습니다.”

비로소 혜능은 삭발과 수계의식을 가졌다. 676년 정월 15일에 머리를 깎고, 2월 8일에 지광(智光)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아 비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대웅전으로 들어가 부처님 앞에서 향을 사르고 난 뒤 무릎을 꿇었다.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지만 혜능이 머리를 깎고 승려로서 계를 지키고자 맹세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연인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것을 이심전심으로 다짐했다. 차응준의 방으로 들어가서는 <아리랑> 대금연주를 들었다. 두군혜는 아리랑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대금의 슬픈 곡조에 눈물을 글썽였다.

두군혜와 사랑에 빠진 김성숙. 훗날 세 아이와 함께 가정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