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 <18>
황포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가 위치한 장주도는 광주 시가지에서 동남쪽으로 한 나절 거리에 있었다. 김원봉과 김성숙은 주강 강변길을 잰걸음으로 걸었다. 다행히 나루터에는 화물선을 개조한 철선이 정박해 있었다. 승선하는 사람들이 차야만 장주도를 오가는 배였다. 장개석의 부관 손두환을 장주도쪽 나루터에서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했으므로 아직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강가에는 막 움이 트기 시작한 버드나무 가지들이 여인의 풀어헤친 머리채처럼 치렁치렁 흔들거렸다. 강폭이 1km쯤 되는 주강은 바다의 한 자락처럼 넓고 도도했다.
두 사람은 철선 옆구리에 설치한 나무의자에 앉아 배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4기로 이미 입학하기로 돼 있었다. 며칠 후면 아예 군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할 것이기 때문에 아직은 외박이 자유로웠다. 김성숙은 자신보다 3살 위인 손두환을 만나보고 싶어 김원봉을 따라 나선 길이었다. 황해도 은율 출신의 손두환은 초립둥이 어린 시절에 김구의 제자였고,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다니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소독단(消毒團)이란 암살단체를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동한 사람이었다.
소독단은 일제의 밀정이나 변절한 자를 처단하는 단체였는데 처음에는 20여 명으로 출발했으나 1921년에는 5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소독단의 활동은 손두환이 임시정부에서 군법부장, 경무국장 등 신분을 노출하여 활동함으로써 차츰 침체했다. 그러다가 손두환이 임시정부의 온건한 노선을 비판하고 1925년에 황포군관학교로 적을 옮긴 뒤부터 소독단의 활약은 유야무야돼 버렸다.
“김 동지, 손 동지가 부관이니까 장개석 교장을 만날 수 있을 낍니더.”
“장개석은 우리 조선인 청년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아직까지는 호의적입니더.”
“내가 알기로는 장개석은 우파라던데.”
“중국의 좌파나 우파 모두 주적은 왜놈들이니까 우리한테 호의적입니더.”
김성숙이 장개석을 의심하자 김원봉이 일본을 들먹이며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조선의 적이 일본이듯 중국의 좌파나 우파의 적도 일본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한 배경이었고, 조선의 항일투사들이 중국의 좌파나 우파에 협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철선은 금세 주강을 건너 장주도 나루터에 꽁무니를 댔다. 중국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간 뒤 김원봉과 김성숙은 천천히 배에서 내렸다. 손두환과 김원봉은 구면인 듯 서로 손을 흔들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김원봉이 손두환에게 김성숙을 소개시켰다.
“중산대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김성숙 동집니더. 이쪽은 아까도 말했지만 장개석 교장 부관인 손두환 동집니더.”
“반갑습니다. 손 동지께서 여운형 동지를 장개석 교장에게 소개하여 우리 조선 청년들이 혜택을 많이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나야 뭐 존경하는 여운형 동지께서 부탁하기에 다리를 놓아드린 것뿐이지요.”
황포군관학교는 나루터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장주도는 작은 섬이 아니었다. 장주도 마을사람들은 농사도 짓고 주강으로 나가 고기도 잡는 모양이었다. 논밭 가운데 있는 민가 울타리에는 손질해 놓은 어망들이 보였다. 황포군관학교가 광주 시가지에서 먼 장주도에 자리 잡은 이유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학교이기 때문이었다.
손두환은 건강한 무인 체질은 아닌 것 같았다. 백면서생과 같이 학처럼 가는 목에다 피부가 깨끗했다. 체격도 삼대처럼 호리호리했다. 한 마디로 약골 체질의 그가 적의 밀정을 청소하겠다고 결성한 소독단의 단장을 결성하고 이끌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승만의 노선이나 안창호가 때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자 그것을 비판하고 황포군관학교로 왔다는 게 놀라웠다. 더구나 훗날 김구의 권유로 다시 임시정부에 들어가 한인애국단의 단원으로 활동한 사실만 보아도 그의 항일의지만큼은 약골의 체질과 상관없었다. 김구의 지시를 받았던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 역시 조선의열단처럼 일제의 수뇌부 암살을 목적으로 했던 바,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등이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것이다.
손두환.
초립둥이인 그의 상투머리를 잘라준 사람은 김구였다. 손두환은 장진읍 봉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읍으로 이사 온 김구가 봉양학교에서 근무하게 된 인연 때문이었다. 김구는 학교에서 날마다 아이들의 머리를 얼레빗이나 참빗으로 몇 시간씩 빗겨주곤 했다. 상투나 긴 댕기머리를 하고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는 머리에 이와 서캐가 많았던 것이다. 농사일이 바쁜 부모들이 아이들의 머리를 자주 빗겨주지 않았으므로 그랬다.
할 수 없이 김구는 부모들을 설득하여 아이들 머리를 하나 둘 잘라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단발(斷髮)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투를 튼 어른들 중에도 몇몇은 개화기 분위기를 타고 스스로 단발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읍민들은 단발한 그들을 정신이상자로 취급했다. 그래도 김구는 초립둥이 아이들의 머리를 자르는 것이 위생적이라고 보았다. 봉양학교에서는 총명한 손두환을 먼저 불러 그의 의사를 물었다. 그러자 손두환은 상투를 틀고 거추장스런 초립을 쓰는 일이 괴로우니 단발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김구는 수업이 끝나고 나서 손두환의 머리를 가위로 잘랐다. 그런 뒤 집으로 돌아가는 그를 따라갔다. 중추원 의관(議官)을 지낸 손두환의 아버지 손창렴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해서였다. 더구나 손창렴은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었으므로 손두환을 애지중지 키웠던 것이다. 손창렴의 반응은 김구가 예상한 대로였다. 아들의 단발한 모습을 보자마자 기가 막힌 듯 말도 못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손창렴은 집으로 뒤따라 들어온 김구를 보고 하소연했다.
“아이고, 선생님. 웬 날벼락입니까? 두환이를 망치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어린 손두환은 아버지의 항의에 김구가 아무런 대꾸를 못하자 김구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원망하듯 쳐다보았다. 그제야 아들이 선생님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느낀 손창렴은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두환이의 머리를 깎아주시고 싶다면 제가 죽은 뒤에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두환이를 사랑하는 영감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도 두환이를 사랑합니다. 두환이는 목이 가늘고 길어 상투 위에 초립을 쓰는 일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또한 아이들 머리에 이와 서캐가 번져 위생적으로도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깎아준 것입니다. 나중에는 영감님이 저한테 고맙다고 인사할지도 모릅니다.”
결국 손창렴은 김구에게 설득당하고 말았다. 김구의 인품에 반한 나머지 김구가 안악으로 근무지를 옮기자 손두환도 그곳의 학교로 보냈고 자신도 따라서 안악에서 생활하며 뒷바라지했다.
이후 손두환은 김구의 평생 제자로서 늘 그의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메이지대학 법과 재학 중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김구를 보좌하게 된 것도 스승 김구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였는데, 때로는 의견충돌로 김구의 곁을 떠나 있을 때도 있었지만 김구는 늘 그를 제자로서 받아주었다.
앞서 걷고 있는 손두환에게 김원봉이 물었다.
“손 동지, 오늘 장개석 교장을 만날 수 있십니꺼?”
“외출했소. 오늘밤에나 돌아올 것 같은데 만나야 할 이유가 있소?”
“김성숙 동지가 면담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십니더.”
황포군관학교 정치주임 시절의 주은래 모습.
“그렇다면 내가 다른 분을 추천하여 만나게 해주겠소.”
“누굽니꺼?”
“주은래 정치주임이오.”
김원봉이 김성숙보다 더 놀랐다.
“만나기 힘든 동지 아닙니꺼?”
프랑스에서 귀국한 올해 28세의 주은래는 황포군관학교의 군사훈련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는 생도들과 만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중국공산당에서 파견한 그는 황포군관학교 안에서 자신의 사무실을 개방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공산당 간부였다. 그러나 그의 직무가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침 일찍 황포군관학교로 왔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광주 시내로 돌아가 공산당 간부들에게 강의하거나 광동구 공산당위원회에 나가 밤 11시, 12시까지 모택동의 지도 아래 회의를 했다.
이처럼 공산당 간부 중에서도 주은래는 몹시 바쁜 사람 중에 하나였다. 작년 8월 초에 천진지역 부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의 애인 등영초(鄧潁超)가 중국공산당의 명으로 광주에 왔을 때 그는 그녀를 마중 나갈 틈이 없어서 대신 비서에게 등영초의 사진 한 장을 쥐어주며 천자(天字)부두로 내보냈던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비서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부두에서 그녀를 찾지 못했고 주은래를 기다리던 그녀 역시 실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 스스로 주은래가 보냈던 서신의 주소를 들고 물어 물어서 주은래의 숙소로 찾아왔던 것이다.
“주은래 동지는 조선의 젊은 동지들을 아주 좋아하지요. 나도 장개석 교장실에서 한두 번 보았는데 아주 지성적으로 생긴 데다 품성이 온화한 것 같았소.”
산길로 들어선 지 20여 분이 지났을 때 손두환이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내 황포군관학교 정문과 흰 담이 나타났다. 정문에는 육군군관학교(陸軍軍官學校)라는 검은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산속에 지은 건물치고는 규모가 컸다. 이층 건물이 네 줄로 나란히 배열되어 있었고, 각 건물들은 중간쯤에 회랑으로 이어져 있었다. 회랑 양쪽이 연병장인 셈이었다.
손두환은 첫 번째 건물 복도를 지나면서 중국공산당에서 파견한 간부들을 두 사람에게 일일이 설명했다.
“이쪽은 전부 공산당에서 파견한 간부들 방들이오. 이 방은 교수부 주임 섭영진(聶榮臻), 이 방은 교수부 부주임 엽검영(葉劍英)이, 이 방은 정치교관인 등연달(鄧演達), 운대영(惲代英)이 쓰고 있소. 팻말이 없는 이 사무실이 바로 정치주임 주은래 동지의 방이오.”
손두환은 곧 주은래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는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방 안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김원봉은 아쉬워하며 복도에서 기다리자고 말했다.
“이왕 왔으니 더 기다립시더.”
“아침에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소만.”
그러나 더 낙담하지 않아도 되었다. 주은래가 복도 끝에서 조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지 원추리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손두환을 보더니 눈보다 눈썹이 먼저 꿈틀거렸다. 마치 그의 짙은 눈썹이 웃는 것 같았다.
“손 동지 무슨 일로 왔소?”
“아, 이 분은 이번에 우리 군관학교에 입학한 생도고요, 이 분은 중산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조선에서 온 동지들 환영합니다.”
주은래는 조선 청년들에게 아주 우호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손님을 들이는 법이 거의 없었는데 김원봉과 김성숙에게는 예외였다. 두 사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무실에 의자에 앉자마자 반가움을 표시했다.
“조선에서 온 동지들 반갑습니다. 우리 중국이 수나라, 당나라, 원나라 때 침략하기도 했지만 조선과는 형제의 선린관계를 유지한 역사가 대부분이었소. 그러니 지금 우리 중국과 조선이 힘을 합쳐 일제와 싸우는 것은 역사적인 배경으로 봐서도 대단히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대들 생각은 어떻소?”
“중국의 혁명이 성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 주은래의 입에서 조선의 고구려 역사가 나오다니 김성숙은 내심 놀랐다. 조선의 현실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사까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주은래는 조선의 역사를 가지고 농담반 진담반의 얘기를 했다.
“동지들, 수나라는 요동을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망했소. 조선을 건드려 크게 손해를 본 나라가 수나랍니다. 그러니 중국은 조선과는 늘 형제의 나라로써 화평하게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하하.”
비록 지금의 요동과 만주는 중국 땅이 돼 있지만 중국의 공산당 간부 입에서 한때 고구려 땅이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더구나 주은래는 때를 보아 자신이 살고 있는 집으로 김원봉과 김성숙을 초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오차를 몇 잔 마시고 난 뒤 주은래 사무실을 나온 손두환은 당분간 그가 사는 집으로 가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작년에 혼인신고도, 결혼식도 하지 않은 채 부부가 친한 동지들 앞에서 팔호(八互; 서로가 지켜야 할 여덟 가지)를 선언하고 난 뒤부터 현재까지 살고 있는 곳은 겨우 세 평짜리 허름한 방이라는 것이었다.
주은래와 등영초가 혁명동지로서 서로 약속한 팔호가 무엇인지를 안 김성숙은 자신도 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그렇게 살고 싶었다. 팔호란 서로 사랑하기(互愛), 서로 존경하기(互敬), 서로 돕기(互助), 서로 격려하기(互勉), 서로 의논하기(互商), 서로 용서하기(互諒), 서로 신뢰하기(互信), 서로 이해하기(互識)로 부부가 실천해야 할 조건들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