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17>

혁명의 땅

1925년 4월.

김원봉은 폭탄 제조기술을 배우기 위해 여러 번 갔던 상해를 거쳐 광동성 성도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에는 상주하는 조선인들이 많았으므로 숙소를 정하는데 어렵지 않게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손문의 국민정부가 혁명을 이루려고 국공합작을 했던 광주는 아직도 뒤숭숭했다. 한 달 전 10여만 북경시민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장작림을 찾아갔던 광주의 혁명가 손문이 간암으로 갑자기 서거했기 때문이었다.

손문 정권을 지지하며 항일투쟁을 해왔던 광주의 조선인들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광주에는 상해 임시정부 노선을 따르는 우파 민족주의자와 모든 조직과 권력을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자, 반제국 반봉건의 구호를 좇아 공산주의자가 된 항일투사들이 혼재돼 있었다. 여기에다 머잖아 상해와 무한, 북경에 있는 의열단 단원들까지 광주로 온다면 조국해방이라는 목적은 같겠지만 또 하나의 분파가 더 생기는 셈이었다.

김원봉은 혁명의 기운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광주가 마음에 들었다. 다만 광주의 아열대 기후는 온대지방에서 자란 그를 한 동안 어리둥절하게 했다. 수시로 바뀌는 아열대 기후의 변덕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장마철이 아닌데도 북경의 날씨와 달리 비 내리는 날이 계속 이어졌다. 우산을 갖고 외출하지 않으면 비를 맞기 일쑤였다. 빨래는 눅눅한 습도 탓에 며칠 만에 말랐다. 몇 년 된 양복과 중국옷이 각각 한 벌밖에 없는 그는 축축하게 젖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국민정부의 지도자 요중개(寥仲愷)를 만나러 광동성 청사로 가는 날도 새벽부터 보슬비가 내렸다. 양복 차림의 김원봉은 비가 개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우산을 써도 양복의 바짓가랑이는 젖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좌파 지도자 요중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주도했던 공이 컸고, 손문이 서거한 뒤에는 국민당 최고 지도자로 각광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조선의열단 단원들이 광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려면 요중개의 협조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다행히 정오가 지나서는 보슬비가 멈추고 해가 났다. 비를 맞으며 번들거리던 망고나무와 보리수 잎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멀쑥하게 솟은 종려나무숲도 햇살이 스며들어 환해졌다. 자귀나무 꽃들이 듬성듬성 떨어진 보도는 마치 붉은 반점들이 발진한 병든 짐승의 살갗 같았다. 비 갠 거리는 사람들이 금세 쏟아져 나와 북적거렸다. 김원봉은 길잡이를 한 사람 데리고 광동 청사를 바로 찾아갔다. 청사는 상록 고목들로 둘러싸여 한낮이었지만 칙칙하고 어둑했다.

미리 약속하고 갔기 때문에 광동 성장(省長) 요중개와의 면담은 바로 이루어졌다. 양복을 입은 요중개는 40대 후반이었지만 머리카락과 수염은 이미 하얗게 변해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요중개는 비서로부터 김원봉의 이력을 다 살핀 뒤였으므로 의심 없이 맞았다.

요중개

“어서 들어오시오. 나는 동지가 우리 국민정부와 같이 항일투쟁을 하는데 무엇이든 도와줄 용의가 있소.”

“감사합니더.”

김원봉은 요중개의 한 마디에 감격했다.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의 좌파 지도자 중에서 최고의 요직에 있는 인물을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요중개는 집단지도체제로 바뀐 국민정부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국민정부의 총리 손문은 서거했지만 요중개는 민족, 민주, 민생을 이념으로 하는 손문의 삼민주의를 이어나갈 지도자로 광동의 중국인들에게 인기도 있었다.

“김 동지, 테러로 항일투쟁을 하는 것도 옳아요. 그러나 내 생각은 달라요. 손문 동지의 삼대정책을 아시겠지만 러시아와 연합하고 공산당과 연합하고 농민, 노동자의 힘을 모아 혁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오.”

“저희들은 중국이 혁명을 성공하면 그 여세를 조선까지 몰아치게 하여 왜놈들을 몰아낼 낍니더. 그래서 저희들은 중국이 혁명하는데 힘을 보태려 하고 있십니더.”

이는 김원봉의 생각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광주에 온 대부분의 조선인 항일투사들의 생각이었다. 중국이 통일되면 국민정부의 지원 아래 항일투쟁을 지속함으로써 조선이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맞아요. 지금은 중한 동지들이 힘을 합치어 투쟁할 때지요.”

요중개는 김원봉을 극진히 대접했다. 비서에게 차 이외에도 광동에서 나는 두더지처럼 생긴 과일을 가져오도록 시켰다. 김원봉은 그동안 광주의 습한 날씨 탓에 우울하기조차 했는데 요중개의 친절함으로 답답했던 마음이 말끔하게 씻기는 기분이 들었다.

“별세한 손문 동지는 군벌들에게 실망을 많이 했어요. 중국 도처에서 난무하는 군벌들이 문제라는 거지요. 그 자들은 눈앞의 자기 이익밖에 몰라요. 이익만 되면 제국주의, 봉건주의세력과도 손을 잡아요. 동북삼성의 장작림 군벌이 중국을 침략하려는 일본과 결탁한 것도 그 한 예라오.”

“군벌들과 싸워 이기기 위해 국공합작을 한 거 맞십니꺼?”

“그렇소. 국민당은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국공합작을 한 것이오. 국공합작을 한 뒤 쾌거가 있소. 손문 동지가 친히 민족해방투쟁의 기량을 연마하고자 군관학교와 광동대학을 설립했소. 군관학교에서는 고급한 군사인재를 양성하여 국민당 군대에 배속할 것이고, 광동대학에서는 혁명사상을 전파하는 당원간부를 양성할 것이오.”

군벌정권들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현재 중국땅의 3분의 1을 지배하고 있는 막강한 장작림 군벌만 해도 수만 명의 정예 보병과 포병으로 조직된 육군뿐만 아니라 수십 대의 전투기를 보유한 공군, 수십 척의 군함을 거느린 해군이 있었다. 더구나 장작림 군벌정권은 대포와 기관총, 소총을 생산하는 대규모 병기창까지 있었다.

김원봉은 비로소 광주에 온 보람이 느껴졌다. 요중개가 항일투사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데다, 조선의 항일투사들도 군관학교와 광동대학에 입학하여 기량을 닦는다면 투쟁의 역량은 배가될 것이 틀림없었다. 요중개가 말하는 군관학교란 중국국민당육군학교가 정식 명칭이었다. 학교가 주강 하류의 황포구 장주도에 있었으므로 일반인들은 황포군관학교라고 불렀다. 교장은 국민당의 실력자로 부상한 장개석(張介石), 정치주임은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공산주의자 주은래(周恩來)였다.

그런가 하면 광동대학은 원래 광동고등사범학당을 1924년 11월 11일 손문이 대학으로 승격시켰는데, 대학의 강당은 요중개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건물이었다. 1924년 1월 20일부터 30일까지 국민당 제 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는데, 손문은 국민당 총리 신분으로 대회를 주관하여 국공합작을 이루어냈던 바, 국민당의 요중개, 담평산(潭平山), 장개석은 물론이고 공산당원인 이대소, 모택동, 임백거(林伯渠), 구추백(瞿秋白) 등도 대회에 참여해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를 선포하면서 통일전선을 구축했던 것이다.

요중개가 광동대학의 설립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공산당원이면서 국민당에 입당하여 중앙조직부장을 맡았던 담평산이 성장실(省長室)로 들어왔다. 담평산은 요중개보다 세련돼 보이지는 않았지만 강골의 인상을 풍겼다. 의자에 앉자 냉기가 훅 끼치는 듯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분명한 화법을 구사하는 담평산이 곧 좋아졌다. 김원봉이 요중개에게 조선인 항일투사들에게 황포군관학교와 광동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부탁하자, 담평산이 대신 답변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주은래 동지를 찾아가시오. 추천서를 써 주겠소. 허나 올해는 입학이 어려울 것이오. 이미 3월에 입학생을 선발했소.”

“혜택을 얼마나 받을 수 있십니꺼?”

“군관학교 생도나 대학생들이 훈련과 공부만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할 테니 걱정 마시오.”

성장실을 나온 김원봉은 광주로 내려온 것을 행운이라고 여겼다. 조선인 항일투사들이 무료로 훈련도 받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최고의 조건을 허락받은 셈이었다. 국민정부가 운영하는 군관기관이나 대학에 조선 청년들이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으며 아무런 걱정 없이 투쟁할 수 있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김원봉의 꿈은 요중개를 만난 지 네 달 만에 물거품이 돼버렸다. 8월에 요중개가 국민정부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우파에게 피살되었고, 그 바람에 요중개에게 받은 지원약속은 흐지부지돼 버렸던 것이다. 북경에서 활동하던 의열단 선전부장 김성숙이 6월에 광주로 왔고, 나머지 단원 19명이 8월에 왔지만 황포군관학교나 광동대학, 그 밖의 국립학원에 입학하려던 단원들의 각자 계획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김원봉과 김성숙 등은 크게 실망했다. 그런데 장지락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가을에 광주로 내려왔다.

물론 자기 힘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조선인 젊은이들도 있었다. 함북의 이빈(李彬), 차정신(車廷信), 장성철(張盛哲), 서울의 유철선(劉鐵仙), 이일태(李逸泰) 등 4명은 3기 생도로서 봄부터 훈련받고 있는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아무런 특혜나 지원 없이 중국인들과 당당하게 겨루어 실력으로 합격한 생도들이었는데, 특히 차정신, 장성철, 유철선은 일찍이 광주로 와 손문의 지시로 설립한 항공학교에서 항공기술을 배운 학도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3기에는 조선인 출신의 교관이나 부관, 조교 등도 있었다. 러시아 군사학교 출신의 강섭무(姜燮武)는 포병 교관 겸 러시아 고문의 통역을 맡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 온 김철남(金鐵男)은 제3교도단 부단장이었고, 손두환(孫斗煥)은 교장 장개석의 부관이었고, 이검운(李劍云)은 훈련 조교였던 것이다.

“김 동지 기쁜 소식이오.”

“광주에 온 지 몇 달만인가요?”

광주에서 동가식서가숙하던 김원봉과 김성숙에게 또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김원봉과 김성숙은 환호성을 질렀다. 투쟁의 성과가 미미했던 한 해가 지나고 1926년 1월의 일이었다. 상해에 머물고 있던 여운형(呂運亨)이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汪精衛) 초청으로 광주에 와서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을 만나 담판을 지었던 것이다. 장개석 교장의 부관으로 있던 손두환이 두 사람의 회동을 주선했다. 여운형이 장개석을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상해임시정부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임시정부 자금지원에는 난색을 표했다. 대신 국민정부의 지시를 받는 국립대학에 조선인 청년들이 입학하고자 한다면 언제라도 허가하고, 황포군관학교 생도들은 숙소, 식비, 옷을 제공하고 심지어는 봉급을 지급할 것을 약속 했다. 대신 군관학교 생도들은 졸업 후 국민혁명군에 2년 동안 의무 복무할 것을 문서로 합의했다.

1926년 봄이 되어 조선의열단 단원들은 각자 소신대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봉급까지 주는데도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 입학했다. 김원봉을 비롯하여 뒷날 김성숙과 친분이 두터워지는 박건웅(朴建雄) 등 몇 명뿐이었고, 4기로 입학한 생도 24명 중 대부분은 광주나 무한, 상해 등지에서 활동해온 항일투사들이었다.

김성숙과 장지락은 중산대학에 입학했다. 중산대학의 전신은 광동대학이었다. 위기 속의 중국을 구하고자 나섰던 손문의 혁명정신을 기리고자 그의 호를 빌려 광동대학을 중산대학으로 개명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