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허(김성숙)와 운허


마침내 운허는 저녁공양을 마치고 월초를 만나기 위해 주지채로 올라갔다. 아직은 겨울이라 낮이 짧았다. 저녁예불이 끝나자마자 경내는 금세 캄캄해졌다. 주지채 방안의 불빛이 마루와 토방을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토방에는 신발 한 켤레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운허는 신발을 향해 합장한 뒤 말했다.

“큰스님, 유점사에서 온 객승입니다.”

“들어오너라.”

월초는 운허가 절하는 순간 호롱불을 꺼버렸다. 불이 꺼진 심지에서 한 동안 연기냄새가 났다. 방안은 어둠에 휩싸였다. 운허는 창졸간의 변화에 놀랐다. 잠시 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월초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보였다.

“중이 왜 됐느냐?”

“절로 피신했던 것이 인연이 됐습니다.”

“절은 몸을 숨기는 곳이 아니다. 정말 중이 될 생각이 있느냐?”

“큰스님, 실다운 중이 되게 해주십시오.”

“지금 방안이 어떠한지 말해보아라.”

“캄캄합니다.”

그러자 월초가 다시 물었다.

“방안의 어둠을 몰아내려면 어찌해야 하느냐? 몽둥이를 휘둘러 몰아내야겠느냐, 아니면 칼을 휘둘러 몰아내야겠느냐?”

“불을 다시 켜야만 합니다.”

운허가 당황하지 않고 바로 대답하자 월초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다시 운허를 다그치듯 말했다.

“방문을 열어 보아라. 바깥은 어떠한지 말해보아라.”

“겨울바람이 차갑게 불고 있습니다.”

“북풍을 피하려면 몸으로 막아내야겠느냐, 담을 쌓아 막아내야겠느냐?”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제야 월초가 심지에 불을 붙였다. 심지를 태우는 불이 심하게 흔들리자 운허에게 방문을 닫으라고 손짓했다. 월초는 운허의 총기에 만족했다.

“방안의 어둠은 몽둥이를 휘둘러도, 칼을 휘둘러도 몰아낼 수 없다. 네 말대로 불을 켜면 된다. 중은 지혜의 불을 켤 줄 아는 사람이다.”

순간, 운허는 머리에 벼락이 치는 느낌이 들었다. 월초의 법문에 눈앞이 크게 밝아지는 듯했다. 피신 중에 임시방편으로 승려 행세를 하다가 월초를 만나 비로소 참다운 수행자가 돼야겠다고 발심을 했다.

“북풍한설을 몸으로도, 담으로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네 말대로 방문을 닫으면 된다. 중은 자기를 가둘 줄 아는 사람이다. 알겠느냐?”

“큰스님, 다시 절 받으십시오.”

운허는 월초에게 다시 삼배를 올렸다. 단 몇 마디로 자신을 압도하는 월초야말로 큰스님이었던 것이다. 월초 역시 자신이 던지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운허가 대견했다. 부처님 법의 큰 그릇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몇 달이라도 직접 가르치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났다.

“유점사에서 하는 공부도 있겠지만 봉선사 강원에서 몇 달만이라도 나한테서 공부하고 돌아가거라.”

“큰스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운허는 다음날로 바로 봉선사 강원에 들었다. 그런 지 며칠 만이었다. 밤중에 월초는 은밀하게 운허와 태허를 불렀다. 때마침 태허는 용문사에서 돌아와 있었다. 은사 풍곡이 하는 자잘한 사무를 도왔고, 속가동생 능허에게 며칠 동안 조석 예불하는 법,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등 짧은 경전을 가르쳐주고 왔던 것이다.

월초는 여느 날과 달리 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손님이 오지 않았는데도 대중스님과 차를 마신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시간을 유난히 아껴 쓰는 월초이기에 손상좌와 차담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다탁에는 다식용으로 그릇에 인절미도 놓여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운허는 몹시 긴장했고, 태허는 반가부좌로 편안하게 앉았다. 월초는 차를 한 잔 따른 뒤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그 바람에 운허와 태허는 찻잔을 들었다가 놓아야 했다.

“너희들은 큰일을 해야 할 중이다.”

태허는 자신에게 당부할 월초의 말을 이미 짐작했다는 듯 말했다.

“당부를 따르겠습니다.”

“큰 뜻을 이루려면 너희들은 각자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운허는 국내에서 큰일을 하고, 태허는 대륙으로 가 활동하거라.”

월초의 당부는 죽기 전 제자들에게 남기는 유훈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자신의 목숨도 12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예견해왔던 월초는 자신의 가풍을 잇는데 운허에게는 절 안에서 교육과 역경을, 태허에게는 절 밖에서 독립운동을 주문했던 것이다.

월초의 당부는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겨울바람이 봄바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평소에 하던 무거운 말투가 아니었다. 손상좌가 되는 운허와 태허를 바라보는 눈빛도 자애로웠다. 그러나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차를 세잔 마시는 동안 할 말을 다하고 나서는 운허와 태허를 물리쳤다. 운허와 태허는 다식으로 나온 인절미를 입에 물지도 못하고 주지 방을 나왔다.

그날 밤 태허는 운허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평안도 사투리로 고향과 절 얘기를 나누며 밤을 새웠다. 두 사람은 독립운동의 열망을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인지 오래된 도반처럼 바로 의기투합했다.

다음날.

태허는 하룻밤 동안에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된, 유점사에서 온 운허와 헤어졌다. 헐렁한 바랑을 메고 수국사로 떠났다. 수국사에 볼일이 있어 간 것은 아니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속가를 한번 들르기 위해서였다. 철산 집을 떠난 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어린 딸 숙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속가아내와도 하룻밤 자야 했다. 형수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속가동생 능허의 하소연을 끝내 물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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