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우이동에 소재한 봉황각 전경. 의암 손병희는 이곳에서 천도교도들의 역사 의식과 독립의지를 일깨우는 수련교육을 실시했다. 사진 출처=천도교 홈페이지그날은 손병희가 젊은 만해를 데리고 왔다. 만해 한용운은 월초가 교장을 역임했던 명진학교 출신으로 같은 승려이지만 월초를 꼭 선생님으로 불렀다. 태허는 주지채로 올라가 차 심부름을 했다. 차 심부름도 고명한 손님들을 사귀라는 월초의 배려였다. 월초는 외부 손님이 왔을 때는 더벅머리 행자를 심부름시키지 않고 반드시 태허를 불러 방에 앉혔다.
찻물을 끓이는 것은 더벅머리 행자 몫이었다. 어린 행자가 마당가 차 아궁이에 잔솔가지와 솔방울을 넣고 불을 붙였다. 솔방울은 연기를 내지 않는 땔감이었다. 찻물은 금세 물고기 눈 같은 기포를 드러내며 끓었다. 태허가 찻물을 담은 무쇠주전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이번에는 낯선 승려가 보였다. 태허보다 10살 위인 만해였다. 만해의 첫 인상은 날카롭고 강했다. 다탁을 사이에 두고 월초와 손병희가 마주보며 앉았고, 만해는 고집스럽게 한 걸음 정도 떨어져 반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월초가 만해에게 말했다.
“좀 더 가까이 앉으시게.”
“괜찮습니다. 선생님.”
월초가 네 개의 찻잔에 차를 가득 채우자, 태허는 다탁에 놓인 찻잔을 공손하게 들고 손님들 앞으로 날랐다. 그리고 자신 앞에도 찻잔을 가져다놓았다. 월초는 습관대로 차를 빨리 돌렸다. 손님들이 마시기 바쁘게 연거푸 세 잔을 따르더니 말했다.
“태허야, 인사 드려라. 몇 년 전에 <조선불교유신론>이란 논문을 발표해서 우리 절집을 들었다가 놓은 만해스님이다.”
“아이고, 선생님. 과찬이십니다.”
손병희가 거들었다.
“나도 보았소. 조선불교의 병을 진단하고 처방전까지 내놓은 유신론이었소.”
“월초선생님 덕분입니다. 다만, 허물이 있다면 모두 부족한 저의 탓입니다. 제가 출가해서 명진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신학문을 어디서 접했겠습니까? 외전(外傳)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불교 밖의 세계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우리 절집을 들여다보면 답답할 수밖에.”
월초는 만해의 말에 한 마디만 하고 입을 다물더니 차를 무겁게 마셨다. 그러자 태허가 조심스럽게 손병희에게 물었다.
“의암 선생님, 오늘 두어 가지만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하늘이다’를 ‘사람이 부처다’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옳거니, 말만 다르지 같은 뜻이오.”
“천교도에서 ‘내 안의 하느님을 모신다’를 불교의 ‘누구나 다 불성(佛性)이 있다’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손병희가 크게 만족하며 말했다.
“내가 따르는 차를 한 잔 받으시오.”
태허는 무릎을 꿇고 찻잔을 내밀었다. 다관에서 나온 찻물이 또르륵 소리를 내며 찻잔에 떨어졌다. 손병희는 만해의 찻잔에도 차를 부었다. 손병희에게 다관을 건네받은 월초는 묵묵히 태허를 바라보기만 했다. 찻물이 다 됐으니 다시 뜨거운 찻물을 가져 오라는 뜻이었다. 태허는 월초의 마음을 간파하고 빈 무쇠주전자를 들고서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때 만해가 밖으로 나와 정랑을 찾았고, 태허는 차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얼굴에 검은 검댕을 묻힌 어린 행자를 불러 정랑까지 안내해드리라고 시켰다. 그러자 만해가 조금 전 방에서 처음으로 대면한 태허를 비범하게 느꼈던지 불쑥 돌아보며 말했다.
“내 <조선불교유신론>을 보고 싶소?”
태허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방금 의암 선생님께서 병든 조선불교의 처방전이라 했습니다. 반드시 보고 싶습니다.”
만해가 호주머니 속에서 얇은 책을 한 권 꺼냈다. 태허는 만해가 들고 있는 책이 <조선불교유신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허물이 보이면 언제라도 지적해 주시오.”
만해는 정랑으로 들어가 버렸고, 태허는 마당가 차 아궁이에 무쇠주전자를 올려놓고 행자 대신 입으로 바람을 만들어 후후 불며 잔불을 살렸다. 만해가 다가와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차를 마시면 오줌만 마려워서.”
그제야 태허가 방으로 들어가려는 만해에게 한 마디 했다.
“스님, 무슨 일로 봉선사에 오셨습니까?”
“거사 날을 잡기 위해 왔지요.”
“무슨 거사입니까?”
“독립선언을 하고 탑골 공원부터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할 겁니다.”
태허도 막연하게 분위기는 감지하고 있었지만 만해 입을 통해서 직접 듣고 나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태허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도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할 결심을 했다. 봉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좌절된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사실 작년부터 손병희는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할 인물들과 만나 거사계획을 세워왔으며 봉선사에 와서도 월초를 만나면 으레 조선독립운동 얘기부터 했고, 태허는 차 심부름을 하면서 얼핏얼핏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태허는 차 아궁이 옆에서 만해가 건네준 책을 폈다. 첫 장 서문과 서론의 한 구절부터 시선을 끌었다. 태허는 아궁이 속의 불티로 눈썹에 불이 붙은 것처럼 놀랐다.
〈매실을 보고 그 갈증을 멈추게 하는 것도 양생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 유신론이야말로 매실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갈증의 불이 몸을 불태우니 매실의 그림자를 가지고서라도 만석이나 되는 많은 샘물을 당해 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다.〉
〈조선불교 유신에 뜻을 둔 이가 있기는 하나 지금까지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나는 천운에 돌리고, 하나는 남을 탓함이 그 원인인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일을 성사시킴이 하늘에 있다’는 말에 의혹을 품게 된 뒤 비로소 조선불교 유신의 책임이 천운이나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음을 알았다.〉
태허는 월초의 묵직한 음성에 책을 덮었다.
“찻물 가져오너라!”
“네.”
방 안에서는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에 대한 깊은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손병희가 주로 얘기하고 과묵한 월초는 듣는 입장이었다. 만해는 여전히 한 걸음 떨어진 채 꼿꼿하게 앉아서 손병희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곤 했다.
“만해스님이 불교대표들을 만나 우리 입장을 설명해주시오.”
“큰절 스님들은 다 산중에 계시니 뵙기가 힘들고 비밀을 유지하기도 힘듭니다. 일본의 정토종이나 조동종 승려들이 우리나라 산중 절까지 들어와 있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월초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만해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손병희가 천도교 쪽의 입장을 얘기했다.
“우리 천도교에서는 이미 15명을 대표로 뽑아 놓았어요. 원근각처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할 교역자들이지요.”
월초가 부러운 듯 말했다.
“목숨을 내놓겠다는 대표들이 15명이나 된다니 대단합니다.”
“신자 2백만 명 중에서 내가 직접 뽑은 교역자들입니다. 불교계 고승들은 몇 분이나 대표로 동참할 것 같습니까?”
“만해스님이 얘기한 대로 어려움이 많아요. 내 생각으로는 서울 대각사에 계시는 백용성 스님이야 흔쾌하게 동참하시겠지만 말입니다.”
손병희는 다른 날과 달리 오후 늦게 떠나지 않고 점심을 한 뒤 바로 봉황각으로 돌아갔다. 바랑을 멘 만해도 손병희와 함께 떠났다. 그들이 떠난 뒤 월초는 주지채 자신의 방을 정리했다. 손병희와 주고받은 편지를 손수 마당가 차 아궁이에 넣고 태웠다. 벽장 속에 개어놓은 장삼은 한 벌만 남기고 태허에게 물려주었다. 족자와 병풍만 방에 남겨두고 선물 받은 벼루들과 붓통 등은 강원 학인들이 사용하게끔 강원 방으로 옮겼다. 태허는 월초가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는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실제로 2월 하순부터는 봉선사도 태풍전야처럼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손병희가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기로 한 3월 1일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월초는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들지 못했다. 만해는 손병희가 당연히 동지인 월초의 동의를 받았을 거라고 방심했고, 손병희는 불교 쪽이니 만해가 스스로 찾아가서 승낙 받았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기까지 했던 월초는 그런 자리나 이름에 연연하지 않았다. 자기 질서를 지키면서 젊은 승려들을 교육하여 그들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 수행자로서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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