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 <2>


비를 피하는 집


왕십리 구익균 선생의 집 옆의 피우정 마당에는 조문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산이 피우정 마당으로 들어서자 서너 사람이 노산에게 다가와 인사했지만 한두 명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친일파를 감싼 이승만에 대한 분노를 노산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노산은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개의치 않았다. 마당가 응달에는 매화 한 그루가 때늦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북풍한설이 모질었던 지난겨울과 초봄의 꽃샘추위를 견딘 매화가 이제야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운암이 퇴비를 묻고 애지중지 키운 매화였다. 대범하면서도 세심한 성격의 운암은 유난히 화초를 좋아하였던 것이다. 화초 중에서도 매화를 사랑하여 피우정 낙성식 날에 청매 한 그루를 구해와 심었던 것이다.

노산은 아직 새벽이슬이 마르지 않은 청매 한 가지를 꺾었다. 영정은 피우정 방벽에 걸려 있었다. 영정 사진은 두 눈이 살아 있는 것처럼 강렬했다. 비록 사진이지만 눈빛이 상대를 압도하는 듯했다. 대머리는 삭발한 스님 같았고 긴 인중은 꽉 다문 입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비분강개하여 언제라도 소리 지를 듯싶은 입으로 3년여 동안 쿨럭쿨럭 천식기침을 토하며 앓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노산은 영정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상주이자 숙녀(淑女)의 동생인 정봉(鼎鳳)에게 한 번 절했다. 그러자 운암의 큰딸 숙녀가 다가와 노산의 손을 잡고 흐느꼈다. 흰 상복차림의 숙녀는 운암이 출가하기 전 평안북도 철산에서 결혼했던 정(鄭)씨 부인이 낳은 딸이었다.

청매 한 가지지만 매화꽃 향기는 피우정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코를 찔렀다. 운암의 운명을 기다렸다는 듯 개화기를 훨씬 지나서야 피어난 청매 꽃이었다. 김구 선생이 쓴 산고수장(山高水長)이란 액자 속의 글씨가 영정을 내려다보고 있다. 김구 선생이 1949년 암살되기 몇 달 전 운암의 대쪽처럼 올곧은 성품을 높은 산과 긴 강에 비유하여 경교장(京橋莊)으로 찾아온 운암에게 써준 글씨였다.

노산은 숙녀에게 다시 한 번 더 들르겠다고 말한 뒤 피우정을 나왔다. 오후 3시쯤 기자가 추도사 원고를 받으러 집으로 오겠다고 했던 것이다. 노산은 시내버스로 동대문까지 나왔다가 전차를 한 번 탄 뒤 다시 시내버스를 갈아탔다. 발을 헛딛었다가 시내버스 안에서 구를 뻔해 승객들의 눈총을 받았다. 피우정을 나서면서부터 줄곧 운암의 기막힌 생애만 생각하다가 실수를 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노산은 벼루와 먹을 꺼냈다. 흥에 겨울 때는 만년필을 즐겼지만 마음이 경건해지고 싶을 때는 붓을 들곤 했던 것이다. 노산은 벼루에 먹을 갈았다. 묵향이 코끝을 스치자 그제야 노산은 붓을 들었다. 먹물을 이리저리 묻히며 붓끝을 세운 뒤 추도사의 제목부터 써 나갔다.

‘운암(雲岩) 김성숙(金星淑) 선생을 곡(哭)하다’

노산은 시내버스 안에서 머릿속으로 썼던 추도사를 원고지에 옮기기 시작했다. 감정이 고조되면 행을 바꾸고 문단을 무시했다. 선배동지를 보내면서 문장작법 따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행이나 문단을 바꾸면서 생긴 원고지 빈 칸은 비통한 감정으로 채웠다.

＜운암 김성숙 선생이 가셨다.

이름 글자 그대로 맑은 별 하나.

지나간 일제시대 역사의 어둔 밤을 지켜주던, 독립정신의 값진 별이 또 하나 이 하늘 아래서 사라져갔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온통 지저분하기만 한 여기서, 그래도 ‘불굴의 지조’로써 자기를 지키고 남을 맑히던 깨끗한 스승이, 또 한 분 이 땅에서 사라져갔다.

나는 여기서 구태여 선생의 사상 계열과 정치노선의 온갖 이야기를 되풀이하고자는 아니한다.

다만 이십여 년의 가난과 박해 속에서도 깨끗이 살고 간, 그것 하나 가지고 우리는 우러러 그를 받들 따름이다.＞

노산은 붓끝에 다시 먹물을 묻혔다. 선생의 사상 계열은 좌우를 넘어선 민족주의였고, 정치노선은 현 정부를 비판하는 야당의 입장이었다. 신민당 지도위원으로서 야당 국회의원들을 격려해 왔던 원로였다. 특히 김대중 의원은 운암을 자신이 존경하는 다섯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러나 노산은 그런 정치적인 이야기로 운암의 생애가 빛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반생(半生)을 온갖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맑게 살다간 운암의 기개가 자신의 마음을 숙연케 할 뿐이었다.

＜십년 전 선생의 회갑에 동지와 제자들이 자하문 밖 세검정에서 초라한 잔치나마 베풀어 선생을 위로해 드렸을 적에 선생은 굳이 내 손에 붓을 쥐어주며 즉흥시 한 장을 청했었고 나는 사양하는 걸 잊어버리고 붓에다 먹을 찍어 시 한편을 써드린 일이 있다.

선생이 즐겨 마시던 값싼 술과 외로움을 주제로 한 짧은 시였다.

조촐하게나마 축수를 드린 지 겨우 십년! 거리엔 술이 남았는데 그는 그 술을 다 못 말리고 가버렸다. 아마 이 나라 거리의 술맛이 너무도 써서 짐짓 밀쳐버리고 가셨나보다.＞

노산은 운암이 자신에게 시를 청했던 사실을 잊지 못했다. 그것은 자신을 항일동지로 인정해 준다는 표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산은 운암의 항일투쟁에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고 늘 여겨오던 터였다. 자신이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던 것이나 해방 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붙들려 있다가 광복을 맞았다는 것이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쫓기는 맹수처럼 반생(半生)을 항일투사로 살아온 운암에 비하면 부끄러운 이력이었던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더니만 이 나라에서는 친일파에게 오히려 ‘고대광실’이 있고, 모리배에게는 ‘고루거각’이 있어도 오직 독립 운동자에게는 비 피할 곳도 없는 것을 어찌하랴.

동지들 몇 사람이 푼돈을 모아 그에게 방 한 칸 지어드리고 나는 특히 그 집에다 피우정(避雨亭)이란 이름을 붙여드렸다.

어제의 해외에서는 눈을 맞았고, 오늘의 고국에서는 비를 피하며 맞아야 하는 독립 운동자에게 위로의 글자가 되었으리라.

이같이 정(亭)으로 이름한 굴(窟) 속에서나마 비를 피하며 살겠거니 했더니마는, 그 집도 마침내 못마땅해서, 그는 이제 멀리 다른 어디로 떠나고 말았다.＞

피우정을 짓는 데 가까운 동지들과 노산, 구상 등 31명이 지갑을 열어 냈다. 자발적으로 형편에 따라 모금에 응했다. 공사는 여름에 시작하여 가을햇살이 양명한 초가을에 준공했는데 비록 10.5평짜리의 오두막이었지만 모금에 참여한 지인들 몇 명은 낙성식 날 눈물을 흘리며 ‘만세 삼창’을 했다. 감격해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상한 ‘만세 삼창’이었다. 노산은 그날 피우정을 보면서 먹먹해지는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잠시 붓을 놓았다.

＜피우정은 비었다. 다만 여기 운암(雲岩)이란 이름의, 굽힐 줄 모르던 지조인(志操人) 한 분이 끼쳐준 감명과 인상만이 벗들의 가슴마다에 서려 있을 따름이다.

운암이란 그 구름은 흔히 일컫는 무상한 구름만이 아니다. 물 위에 그림자 진 구름같이 젖지 않고 가는 그 구름이다. 아무리 물결이 뒤눕혀도 젖을 수 없는 구름이다.

운암이란 그 바위는, 다만 산 위에 우뚝 서 있는 풍치의 바위가 아니다. 거리 복판에, 정치의 복판에, 사상의 복판에 서 있는 바위다. 아무리 뒤흔들어도 움직일 수 없는 바위다.＞

노산은 어제 지었던 추도시를 꺼냈다. 몇 글자를 수정해 보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운암에 대한 소회와 자신의 심정을 진솔하게 읊조렸던 어제의 시를 다듬어지지 않은 그대로 추도사에 넣고 싶었다. 한두 구절을 손댄다면 어제 순간적으로 격동했던 감정의 밀도가 옅어질 것 같아서였다. 노산은 메모지에 적힌 추도시를 그대로 옮겼다. 그런대로 추도사의 문장과 잘 어울렸다. 추도사의 문장은 추도시를 산문으로 풀어놓은 것과 흡사했던 것이다. 마침내 노산은 마지막 문장을 한 호흡으로 써내려갔다.

＜이것이 운암이 우리에게 끼쳐준 인상이요, 감명이요, 교훈이었다. 이같이 그는 우리들의 소맷자락을 스치고 구름같이 갔다. 그러나 이같이 그는 또 우리들 가슴속에 바위처럼 서 있다.＞

괘종시계를 보니 오후 3시 10분 전이었다. 노산은 D신문사 기자와 약속시간을 지켰다는 것에 안도했다. 괘종시계 옆의 거울에 희미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이마주름은 깊어져 있고 눈은 퀭한 데다 입술꼬리는 쳐져 있었다. 생전에 운암은 자신의 큰 귀를 부처님 귀라고 부러워했는데 오늘따라 귓불은 쪼글쪼글하게 말라 있었다. 두툼한 코도 탄력을 잃어 이제 ‘복코’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어느 순간 지인들의 소맷자락을 스치고 구름같이 이 세상과 하직할 터였다.

노산은 어금니를 꽉 물면서 희미한 미소를 거둬들였다. 인생이란 영욕을 뒤로 하며 앞서거니뒤서거니 영원한 미답(未踏)의 길로 사라지고 마는 무상한 무엇일 뿐이었다. 오늘은 운암이 먼저 가지만 내일은 노산 자신이 가야 할지도 모르는 숙명적인 존재가 인생이었다. 노산은 옆구리로 빠져나가는 바람 같은 허전한 기분에 휩싸였다. 밤하늘의 맑은 별 하나가 홀연히 떨어진 듯한 허허로움, 그 서늘한 기분은 부질없는 허무도 슬픈 상실감도 아닌 차라리 목마른 갈증 같은 것이었다. 추도사에서는 운암이 우리들 가슴속에 바위처럼 서 있어 감화를 준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가 사라져 허허롭기 짝이 없었다.

노산은 집안일을 거들어주는 청년을 불러 술을 사오게 했다. 운암의 잔을 앞에다 놓고 그와 대작하듯 술을 마시며 대취하고 싶었다. 노산은 붓통에서 모지랑붓을 꺼낸 뒤 먹물을 듬뿍 찍어 주먹만큼 큰 글씨로 곡(哭)자를 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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