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4월.
산골짜기를 흐르는 계곡물이 간밤에 내린 가랑비로 부풀어 있었다. 바위덩어리에 부딪치는 물줄기는 기세등등하게 튀어 올랐다. 육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신사가 여관 앞으로 흐르는 계곡물에 얼굴을 훔쳤다. 4월 초순의 봄이었지만 계곡물은 아직 겨울의 체온이었다. 노신사는 간밤 서울에 사는 후배시인들과 마신 술로 대취했음에도 일찍 일어나 연거푸 찬물을 얼굴에 뿌렸다.
소쩍새가 피울음을 쏟아내듯 길게 울었다. 소쩍새는 날카로운 부리로 노신사의 등짝을 쪼며 비통한 소리를 냈다. 방은 어느새 젊은 시인들이 어지럽게 비운 술병들이 다 치워지고 없었다. 시인들은 간밤에 하나 둘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빈 술병들은 노신사 곁에서 뒹굴었던 것이다.
어젯밤에 한 시인이 가지고 온 석간신문은 여전히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좀 전에 노신사가 정치면에서 사회면으로 넘기다 말고 놀란 채 놓아버렸던 신문이었다. 노신사가 하룻밤을 묵고 있는 곳은 자하문 밖에 있는 <세검정 여관>이었다. 여관 이름대로 세검정 골짜기의 가정집을 개조해 영업하는 객실이 서너 개뿐인 단출한 여관이었다. 여관은 숙박비가 저렴하여 가난한 시인들이 시회(詩會)를 자주 여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노신사는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두 눈가를 닦았다. 골짜기의 찬 계곡물로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했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운암 선배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시다니.’
노신사는 다섯 살 위인 운암의 생애가 가련하여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운암과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억울했다. 기이한 인연이었다. 바로 10년 전에 이 <세검정 여관>에서 후배들 몇몇이서 회갑연을 열어주었는데 똑같은 장소에서 부고를 접하다니 심장이 졸아드는 것처럼 아팠다. 노신사는 심장이 위치한 자신의 가슴을 문질렀다. 노신사가 운암을 마음속으로 흠모했던 까닭은 그의 바다와 같은 포용력 때문이었다. 노신사가 1960년 3월 부정선거를 획책한 이승만 대통령을 변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정치적으로 생애 최대의 곤경에 빠졌을 때 운암은 등 돌리지 않고 그를 찾아와 지인들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타일렀으며, 한 번의 실언으로 일제강점기 때 감옥에 갇혔던 항일의 이력이 묻혀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던 것이다.
골짜기에 자리한 여관은 주변의 풍치와 달리 칙칙했다. 환한 산봉우리와 달리 아침햇살이 늦었다. 여관방도 어둑하여 신문을 보려면 고개를 들이밀어야 했다. 노신사는 신문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소쩍새가 여관 가까운 숲까지 내려와 울었다. 운암의 외로운 넋인 듯 노신사를 우울하게 했다. 노신사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두 손으로 신문을 폈다. 운암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노신사는 신문의 사회면 톱기사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쓸쓸히 간 임정요인, 애국지사 고 김성숙 옹
항일독립투쟁의 가시밭길을 걸어온 노애국지사 김성숙 옹은 가난에 시달려 중태에 이르도록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이승을 떠났다. 그가 숨을 거둔 뒤에도 가난의 그림자는 이내 가시지 않아 퇴원비가 마련되는 여섯 시간 동안 김옹의 유해는 병원을 떠나지 못했다.
지난 12일 오전 10시 성요셉병원(서울시 서대문구 중림동149)에서 만성기관지염으로 숨을 거둔 임시정부요인 김옹의 임종을 지켜본 유족들은 눈물을 흘릴 겨를도 없이 모자란 퇴원비 1만1천원을 주선하기 위해 거리에 나서야 했다. 가까스로 이 돈을 마련한 것은 김옹이 숨진 지 6시간 뒤, 유해를 안고 병원을 나선 유족들은 그제야 외로운 고인의 죽음과 가난 앞에 북받치는 설움으로 목 놓아 울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김옹의 만년은 너무나도 가난했고 고생스러웠다. 서울성동구 구의동 236의 6에 있는 그의 집은 대지 20평에 건평 11평의 소옥, 이집이 김옹이 남기고간 유일한 유산이었다. 이것도 6년 전 10년 동안이나 셋방살이에 허덕이는 김옹을 위해 친지들이 돈을 모아 비나 피하도록 마련해준 것. 그래서 집앞 문 위엔 피우정(避雨亭)이란 목각 현판이 걸려있다.
달포 전부터 3년 전에 앓았던 기관지염이 도져 병상에 누운 김옹은 병원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약국에서 약을 사다 집에서 치료를 해왔다. 이제까지 김옹은 가족들의 생계를 거의 친지들의 도움을 입어 어려운 고비를 넘겨오곤 했었다. 이러한 딱한 처지에서 "약값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해왔다“고 말하는 둘째아들 청운(靑雲 21, 국민대법과 1년)군은 10여일 전부터 병세가 악화되자 박기출 의원의 소개장을 얻어 메디컬센터에 무료치료를 받으려 했으나 서류구비가 번거로워 입원하지 못했다” 고 한숨지었다.
김옹은 삼일운동에 관련 2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 1942년 상해임시정부 내무부차관에 임명되었고 해방과 더불어 귀국해서는 정계에 몸을 담아 최근엔 신민당지도위원으로 있었으나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도 뼈저린 가난은 그의 곁을 떠날 줄 몰랐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가난에 시달려야했던 노애국지사의 빈소 바른쪽 벽에 걸린 백범 김구선생의 친필 산고수장(山高水長)이란 족자는 광복에 바친 고인의 높은 뜻과 가난 속에서도 끈기로 엮어온 그의 생애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했다.>

피우정(避雨亭).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비나 겨우 피하는 집. 식솔 한 둘이 겨우 몸을 누이는 작은 오두막이므로 당(堂)이라 하지 않고 정(亭)자를 붙였다. 피우정은 운암의 초라한 만년을 강변했다. 회갑을 지낸 나이에도 집 한 칸이 없었을 뿐더러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고단한 삶이었기 때문에 운암에게는 오두막을 갖는 것만으로도 꿈같은 일이었다.
6년 전이었다. 구익균 항일동지가 운암에게 자기 집터 한쪽으로 20평을 내어준다고 하자, 지인들이 운암이 기거할 11평짜리 오두막을 짓고자 모금을 시작했다. 오두막의 크기는 정확하게 10.5평이었다. 모금용지는 항일동지들은 물론 구상 시인과 노신사에게도 인편으로 보내왔다. 모금은 길게 끌지 않고 31명에서 마감했다. 고대광실을 건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멘트벽돌집 오두막 한 채를 짓는 모금이었던 것이다.
운암은 노신사에게 집 이름까지 부탁했다. 노신사는 망설이지 않고 여러 개의 당호(堂號)를 지었다. 그러나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도 마음에 드는 당호는 피우정(避雨亭)이었다. 평생 가난과 고독의 비를 맞고 살아왔지만 앞으로의 여생은 ‘비를 피하는 집’에서 안락하게 살라는 축원이 담긴 당호였다.
노신사는 아침상을 물렸다. 한 수저를 떴으나 밥알을 씹지 못하고 말았다. 운암 유족들이 퇴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병원 밖으로 나가 6시간이나 거리를 헤맸다는 신문기사가 눈앞에 아른거려 밥알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못했다. 살아생전은 물론이고 죽음 이후조차 궁색하기 짝이 없는 그의 인생이 비통하기만 했다. 운암이 회갑연에서 조국해방을 바랐을 뿐 부귀영화를 바라지 않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분하기까지 했다. 노신사는 밖으로 나가 심호흡을 했다. 조국해방을 위해 항일투사로 살아왔지만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죽어간 운암을 생각하자 분노가 치밀었다.
노신사는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자드락길을 걸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를 때까지 오르막 자드락길을 탔다. 청랭한 산바람과 솔향이 차츰 흥분을 가라앉혀 주었다. 분노를 삭일 때는 몸을 혹사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노신사는 세검정의 주택들이 한눈에 드는 고갯마루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구렁이처럼 허리가 휜 낙락장송 그루터기 옆의 너럭바위에 앉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첩첩이 이어지는 파도 같은 능선들이 보였다. 망망대해 같은 창공에는 흰 구름이 몇 점 떠 있었다. 노신사는 운암을 떠올리며 추모시를 한 수 읊조렸다.
하늘에 구름이 간다
나도 그 구름같이 간다
물속에 구름이 간다
나도 저 구름같이 간다
아무리 파도가 쳐도
젖지 않고 간다
산위에 바위가 섰다
나도 저 바위처럼 섰다
비바람 뒤흔들어도
꿈쩍 않고 섰다
노신사가 산을 내려온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정오의 햇살이 노신사의 등을 떠밀었다. 여관으로 돌아온 노신사는 방으로 곧장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때 여관 여주인이 방문을 노크하면서 말했다.
“손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손님은 어젯밤 시회 자리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가 오지 못한 신문사 기자였다. 낯익은 목소리였으므로 노신사는 그가 D일보 기자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노산 선생님. 이기잡니다.”
노신사는 그가 왜 달려왔는지 그의 용건을 짐작했다. 운암에 대한 원고를 청탁하려고 온 것이 분명했다. 노신사는 운암의 추도사만은 자신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산에서 지은 추도시가 들어간 추도사를 써 운암의 생애를 세상 사람들과 함께 기리고 싶었다. 운암의 추도사를 쓰고 싶은 참담한 심정의 노신사는 시조의 대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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